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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부대, 이스라엘 국기가 웬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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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태극기부대, 이스라엘 국기가 웬 말인가

[우리는 왜 전쟁을 했을까] ④ 국가 우선주의에서 국민 우선주의로

국가주의는 최악의 일제 잔재다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세상을 만드는 사회성 동물이다. 그래서 모든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은 먼저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4.27 판문점 선언은 길게는 근대 100년 동안 지속된 구체제,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적대적 공존과 전쟁문화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전환점이었다.

이제 새롭게 전개되는 인민의 한반도 평화운동은 새로운 패러다임과 새로운 평화의 언어를 새봄의 벚꽃과 철쭉 축제처럼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벗겨내야 할 구체제의 이데올로기 족쇄 가운데 첫 번째가 국가주의다.

국가주의란 인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국가를 위해 인민이 존재한다는 이데올로기다. 한마디로 국가 우선주의, 국가 지상주의다. 국가주의는 국민을 국가에 집중시키고 복종시키기 위해 상시 전쟁 상태의 전쟁국가를 만들어낸다.

히틀러의 제3 제국과 일본 제국주의가 그랬다. 나이 어린 가미카제 특공대 병사들은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치면서 자살공격을 하도록 세뇌 교육을 받았다. 국가의 결정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말은 결국 관료와 지배층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라는 말이다.

국가주의는 지배자, 독재자들이 자신들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인민들을 억압 착취하기 위한 편리한 인민 노예화 이데올로기다. 국기와 국가(國歌) 등 국가주의 상징에 대한 지나친 충성 의례를 강요하는 것도 국가주의의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태극기부대가 그 사례다.

국가가 인민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라는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취임 연설문은 국가주의의 아주 간결한 정의다.

오늘날 미국의 지배층과 정치가, 펜타곤 전쟁 마피아들은 거침없이 자신들을 국가주의의 결정체인 제국이라고 호언한다. 록펠러, 모건 등 국제 금융 마피아들의 자본과 국방부 지원으로 제작된 숱한 할리우드의 국가주의 영화는 지금도 넘치고 넘친다.

국가주의는 국가의 암세포다. 민주주의 정치라는 면역력을 감옥에 가두어 놓고 수많은 인민을 학살하는 끔찍한 전쟁으로 치달아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들어가는, 국가의 악성 종양이다.

전쟁은 서구의 이른바 전문가들이 주장하듯이 다른 수단을 동원한 정치의 연장이 결코 아니다. 전쟁은 명확히 정치의 실패다.

정치란 갈등을 끈질기게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아무리 험한 욕설과 몸싸움이 일어나도 전쟁으로 비화하지는 않도록 때로는 냉각 기간을 갖기도 하고, 때로는 술도 먹고, 때로는 정략을 동원하기도 하면서 타협과 조화를 추구하는 게 정치 본연의 모습이다.

그런데 국가주의는 이런 정치를 부정하고 인종청소 하듯이 없애버린다.

한국의 국가주의는 부활한 친일파들이 구축해 놓은 친일 잔재이자 군사독재체제의 유산이다.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 이데올로기다. 판문점 선언을 음양으로 무력화시키고자 할뿐만 아니라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 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보수단체 회원들은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에서 집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국가 우선주의에서 공동체 우선주의로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가 최고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명시한 조항이 단 하나도 없다. 국가는 국민에 대한 의무 조항만 있다.

헌법에는 권리라는 말이 21번 나온다. 모두 주권자인 국민, 인민의 권리다. 의무란 말은 20번 나온다. 자녀에 대한 교육 의무, 근로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등 국민의 의무를 빼고는 나머지는 모두 국가와 대통령, 국회의 의무다.

헌법 10조는 이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국가주의는 애국을 강요한다. 그러나 강요된 애국은 애국이 아니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고 인민 스스로 판단할 때 애국심은 저절로 나온다. 내 가족과 내 이웃,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국가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국토 방위와 국가 안전을 위해 흔쾌히 병역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병역 의무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감옥과도 같은 강제 사육 기간으로 청년들에게 인식되어 왔다. 그나마 돈 있고 배경 있는 전쟁세력의 기득권 자식들은 갖가지 편법을 동원해 아예 군대에 가지도 않았다.

남북의 전쟁 체제는 폭력으로 인민을 이 같은 국가주의의 감옥에 가두어 놓았다. 이제 우리는 그 같은 감옥의 벽부터 우리 스스로 평화의 망치를 들고 베를린 장벽 허물 듯이 허물어뜨려야 한다.

국가 우선주의가 아니라 국민 우선주의와 공동체 우선주의가 대한민국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다. 공동체 국가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지속가능하게 만들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평화국가다.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지방의 연대(연방주의)와 연합, 권력 분점의 연방주의 국가가 평화와 민주주의를 꽃피게 할 수 있다.

지방분권과 지역자치가 인민의 평화체제 구축에 필수불가결한 까닭은 이것이야말로 주권자의 권력행사와 지역공동체 재생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전국 방방곡곡의 지역공동체 자치 민주주의가 떠받쳐 주지 않는 민주공화국은 언제든 파시즘으로 휩쓸려 들어갈 위험이 너무나 많다. 비만증 걸린 국가주의는 점점 비대해지는 관료제로 귀결되고, 결국은 부패와 불평등으로 국가 자체를 붕괴시키고 만다.

지방이란 말은 고을의 행정 용어로 그 자체가 중앙권력의 용어이자 개념이다.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풀뿌리 인민들의 자치와 자립 시각에서는 지역이란 말이 사용된다. 지방과 지역, 고을과 마을은 이렇게 관점의 차이가 뚜렷한 말이다. 고을 수령이라고 하지 마을 수령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공동체 국가를 강조할 때는 중앙정부 시각의 지방자치란 말 대신 굳이 지역자치란 말을 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늘날 한국의 헌법은 여전히 주권재민의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대의정 권력체제 일색이다. 깃발만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 깃발이지 실제로는 전국토가 반란군인 극소수 엘리트 대의정에 점령되어 있는 형국이다. 주권자의 권력 행사와 자치 민주주의는 아예 원천 봉쇄되어 있다. 대통령만 제왕이 아니다. 제왕적 국회의원, 제왕적 판사, 제왕적 검사 등을 우리는 지금 점점 더 커지는 분노와 함께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국회와 행정부의 여전한 '이명박근혜'식 행태를 보라. 심지어 사법부는 주권자의 사법권력 위임 절차인 선거도 거치지 않고, 법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제멋대로 방목된 도적의 무리처럼 탈취한 사법 권력의 칼을 마구잡이로 인민들을 향해 휘두르고 있다.

진보 국가주의도 극복 대상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 세력이란 그 주의 주장과 범위가 너무나 넓다. 사회주의 지향 세력을 지칭하던 진보란 말은 19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해서 이른바 개혁을 지향하는 세력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심지어는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자들도 진보를 자처한다.

워낙 한국의 우익이 종잡을 수 없는 20세기의 극우 전쟁세력 일색이었기에 벌어진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태극기집회에 감초격으로 성조기가 나오는 것은 그렇다 쳐도 이스라엘 국기가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미국인과 유럽인들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현실 사회주의는 사실 국가 사회주의 또는 국가 자본주의라고 지칭될 정도로 국가주의로 치달았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생산수단의 국유화로 대체한 결과였다. 구소련은 수천 년 내려오던 전통 미르 농업공동체를 강제로 해체하고 농민을 국영농장의 노동자로 신분 이동시키기도 했다. 사회 대신 국가를 대입한 것이다.

결과는 사회주의의 실험의 대실패였고, 실제로는 국가주의의 실패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한국의 진보 또한 지금까지도 국가주의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진보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본소득을 국가복지의 축소로 보고 반대하기까지 한다.

기초자치단체의 정당추천제를 강하게 주장해, 보수 정당에 명분을 제공해 주면서 정당추천제 폐지를 막은 주범 또한 자칭 진보정당인 민노당, 지금의 정의당이었다. 결과는 지방자치는커녕 중앙 권력자에 예속된 지방 토호 정치, 지역까지도 보수-진보의 적대적 공존으로 분열되는 지역공동체 민주주의 정치의 실종이었다.

지방과 지역을 국가 차원에서 중앙을 추종해야만 하는 하위 식민지로 본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는 행위였다.

6월 항쟁 이후에 창립하거나 변화된 이른바 진보언론 또한 이런 국가주의에 갇혀 여전히 중앙언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방은 그저 지방판이나 중앙에서 파견하는 주재기자로 존재할 뿐이다. 지금도 여전히 보도의 대부분은 중앙의 의제이거나 국가에서 생산하는 뉴스 따라잡기 중심이다.

새로운 저항과 탐사 미디어로 주목을 받은 팟캐스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4.27 판문점 선언을 계기로 국가주의 언론에 대한 성찰과 새로운 모색은 풀뿌리 지역 미디어와 결합하는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의 주요한 과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재벌과 국가로부터의 광고에 의존하는 '기생언론'을 때려치우고 독립언론을 추구하는 실험은 이미 다양하게 진행 중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역 미디어 연대 연합으로서의 연방주의 언론, 지역주민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제대로 된 연대의 지역 미디어 활동이야말로 풀뿌리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전초기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남한 내부의 상위 적대적 공존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북미의 적대적 공존이 해체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판문점 선언 이후의 한반도 정치경제 변화와 인민의 평화체제 구축에 이른바 진보 언론이 무슨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아니 급변하는 미디어 시장의 변화 앞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는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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