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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주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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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주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이라영과 미투 톺아보기] ②실명 미투만 인정하겠다는 위험한 태도

미투 운동이 긴 시간 우리 사회에 파장을 낳고 있다. 적잖은 유명인이 충격적인 폭력의 가해자로 언론에 오르내렸다. 여성들이 미투로 드러난 성폭력 문제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폭로를 뒤이어 이어지고 있다. 국회와 여성단체 등은 우리 일상의 성폭력 문제를 논의하고, 대안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에서는 미투를 향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익명 폭로자를 향한 '꽃뱀'이라는 날선 비난이 제기되고, '어디까지가 미투냐'는 식의 질문의 외피를 쓴 비난이 이어지고 있다. 다시금 인터넷은 과거 메갈리아 사태 당시처럼 미투를 계기로 남녀 성대결 구도로 재편되는 모양새다.

남성 대부분에게서 미투의 맥락과 원인, 더 구조적으로는 여성이 집단으로 목소리를 내는 현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를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지금이라도 미투를 더 큰 맥락에서, 더 쉬운 말로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과거 <프레시안>에 여성혐오 문제에 관한 글을 여러 차례에 걸쳐 게재한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가 미투와 관련한 첨예한 질문들에 대답하는 글을 보냈다. 세 차례에 걸쳐 미투가 지금 나오는 이유, 미투에 대한 남성들의 일반적인 생각에 관한 단상, 미투 운동의 다음에 관한 고민 등을 나눠 싣는다. 글은 <프레시안> 이대희 기자가 질문하고 이라영 연구자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여성 문제에 관한 이라영 필자의 다른 글 보기



여성의 일상을 이해해야 미투에 공감한다

-'미투'란 '나도 당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너도 용기를 내라는 뜻을 갖고 있잖아요. 왜 꼭 미투여야 하나요? 내가 성폭력을 당했다면, 곧바로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하고 법적 대응을 하면 안 되나요? 많은 남성이 '당했을 때 바로 변호사를 찾지, 왜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냐'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런 시각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일부 정치인을 두고 황당한 음모론이 나오는 원인이 되는 듯합니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주인공들은 왜 경찰서에 가지 않았을까요? 왜 도망 다니다가 일을 점점 더 부풀린 끝에 자살할까요. 델마는 사건이 벌어진 후,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자고 합니다. 정당방위이지 않았냐고. 그러나, 이미 한 번 성폭력을 겪었던 루이스는 경찰을 신뢰하지 않아요. 루이스는 델마에게 이렇게 말하죠. "네가 그 남자랑 춤추는 거 술집 안 사람들이 다 봤다. 경찰이 네 말을 믿어 주겠니?" 같이 춤을 췄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자의 말이 믿어지지 않으리라는 루이스는 걸 잘 압니다. 피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으라는 게 아니에요. 성폭력 문제에서 세상은 여성의 말을 공정하게 들어볼 생각조차 안 한다는 겁니다. 이게 여성들이 미투를 통해서야 겨우 자신의 폭력 경험을 얘기하기 시작한 첫째 이유입니다.

둘째, 사회가 피해자의 말을 불신하기 때문에 2차 가해가 서슴없이 자행됩니다. 단역배우 집단 성폭행 사건 피해자는 경찰의 2차 가해에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했습니다. 피해자들의 어머니는 "경찰이 죽였다"고 말합니다. 물리적 폭행은 한 사람이 했을지라도, 그 후 이어지는 2차 가해에 가담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아요. 성폭력 피해를 알린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 되는 거죠.

셋째, 추행이나 희롱의 경우 증거 확보가 어렵고, 물리적 폭력의 증거가 설사 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 증거의 효력이 결국은 사라집니다. 다시 <델마와 루이스>를 보면, 사건 발생 후 며칠 지나 루이스가 델마에게 이러지요. "이제는 네 얼굴에 맞은 상처도 사라졌어"라고. 어차피 말은 믿어지지 않고, 그나마 폭력의 증거가 되는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을 증명하기 어려워져요.

"차라리 법의 심판을 받고 싶다"고 말하는 가해자가 있었죠. 법이 누구의 말을 들어주는지 아는 겁니다. 37년 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여성이 남편을 살해했을 때 정당방위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가 있습니다. 반면, 여자친구나 아내를 살해한 남자들이 3년 이하의 형량을 받은 후 집행유예로 사실상 풀려나거나, 아예 무죄를 선고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결국 폭로라는 최후의 수단을 택하는 결정적 계기는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해자의 모습을 볼 때입니다. 안태근의 간증하는 모습을, 대외적으로 페미니스트 흉내를 내면서도 성폭력을 행사한 안희정 전 지사의 모습을 보며 피해자들은 폭로를 결심했습니다.

왜 긴 시간이 흐른 후 나서느냐는 지적에 거꾸로 질문하자면, 왜 그 긴 시간동안 우리 사회는 피해자의 말을 듣지 않거나, 그가 말하지 못하도록 했나요.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과거에는 자살을 하곤 했는데, 이는 명백히 사회적 살인이죠.

-'여성이 용기를 내고, 연대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이 많습니다. 여성들이 왜 이럴 수밖에 없는가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미투 운동에 관한 공감의 출발이 가능할 것 같아요. 여성이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더 일상의 차원에서 설명해주세요.

살면서 '가벼운' 성추행 한 번 안 겪은 여자가 있을까.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한편 가해자들을 비롯하여 미투 운동을 바라보는 남성과 일부 여성 중에는 '저런 식이면 안 걸릴 남자가 어디 있느냐'는 반문이 나옵니다. 결국, 두 상반되는 입장은 한 가지 사실을 입증합니다. 성폭력이 매우 일상적이라는 뜻이죠.

여성을 연쇄 살인하고 강간한 흉악범이 아니라, 꽤 괜찮아 보이는 남성이 성폭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몹시 불편해 합니다. 성폭력범의 얼굴이 악마나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하다는 사실은, 바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기 마련이죠. 결국, 그와 비슷한 행동을 자신도 했고, 하지 않았어도 적어도 들었거나 봤는데 이 모든 게 졸지에 폭력이라니, 환장할 노릇이죠. '강간문화'라는 말에 발끈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 대다수 여성의 일상을 짚어 보죠. 화장실 갈 때 디지털 성폭력을 걱정하거나, 취업과 승진, 임금 협상에서 성별 때문에 불이익을 받거나, 결혼 후 집과 직장 중에서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이거나, 꾸밈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지만 꾸밈 때문에 성폭력 원인제공자가 될 위험에 처하거나, 술에 취하면 강간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거나, 택시에 홀로 탔을 때 기사가 무섭거나, 집요한 스토킹으로 공격받거나, 심지어 살해되는 여성을 보며 전이되는 불안을 느끼거나, 길거리나 직장, 학원, 식당, 대중교통 가리지 않고 성별 때문에 추근대는 사람들을 맞닥뜨리거나, 모두가 신화 속의 파리스라도 된 양 여성의 외모를 품평합니다. 여성이 겪는 이 모든 상황은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어요.

피해 사실을 고발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사건을 재정의하고, 가해자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라고 말입니다. 더불어 같은 경험을 한 다른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고 싶으며,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성폭력 문제를 피해자 잘못으로 돌리는 문화에 문제제기하고, 피해자들의 연대를 구축해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사회 구조의 개혁을 호소합니다.

▲ 많은 남성이 여성의 일상의 공포를 그저 유난 떠는 수준으로 생각한다.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미투운동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해당 카드뉴스 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 가능하다. http://icwa.kr/226105 ⓒ인천여성회

펜스룰 운운은 '여성을 사람으로 보려 노력할 의사 없음'

-여성을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남성이 이른바 '펜스룰'을 미투 대처법으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언론은 이런 남성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펜스룰이 왜 문제인가요?

펜스룰을 일상에 적용하겠다는 선언은 '나는 여성을 나와 동일한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여성들은 나에게 그저 성적 대상으로만 보입니다. 그렇게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꼴입니다.

펜스룰 운운하는 태도는 바로 자신만이 여성과의 성애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위치에 있음을 과시하는 겁니다. 사실 한국에 굳이 펜스룰이 왜 필요한가 싶어요. 이미 여성 배척이 만연하잖아요. 국민은행과 하나은행에서 신입사원 채용 시 성차별 기준을 적용한 정황이 나왔습니다.

여성이 성폭력 구조를 이야기하면 "무슨 말도 못하겠다"고 푸념하는 남성도 있는데, 이는 두려움을 느껴서가 아니라 상대에게 두려움을 주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내 말을 문제 삼지 말라는 일종의 권력행위지요. 두려움을 이용해 지배하려 합니다.

펜스룰이 이와 마찬가지 태도입니다. 무고가 두렵다고 하지만, 이는 과잉 걱정입니다. 여성을 자신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고, 여성과 충분한 대화와 교감을 나누는 남성이라면 무고를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남성을 과잉 걱정합니다. 남성 걱정을 중심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습관이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 있어요. 미국도 그래요. 남자들이 무고를 걱정하고 아들의 부모가 제 아들이 무고 당할까봐 걱정해요. 남성의 감정은 정치화되기 쉽죠. 이들의 불안과 걱정은 사회가 들어주니까요.

-일각에서는 '미투 때문에 한국도 일본처럼 남녀의 데이트가 어려워지는 사회로 변화할 것'이라며 경계감을 드러냅니다. 이런 변명성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는 데 여성들이 큰 피로감을 호소합니다만, 안타까운 건 이런 시각이 남성 일부만의 문제는 아니리라는 점입니다. 답변을 해 주신다면요?

성폭력 고발로 데이트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 데이트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점검해 보는 게 좋습니다. 성범죄로 오해 받을지도 모를 말과 행동이 아니고선 여성을 대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걸까요? 많은 남성의 관계를 시작하고, 관계를 끝내는 방식에 심각하게 문제가 있습니다.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야 하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해주는 남자를 만나야 행복하다는 말이 있죠. 매우 이상한 말이에요. 이런 관념이 안전한 관계가 아니라 위험한 관계를 조장합니다. 선택과 거절을 여성에게 봉쇄시킨 채 남성이 관계를 이끌어야 한다는 문화가 있습니다. 이는 소유관계이지 동지관계가 아니에요. 그러니 고백을 안 받아줬다고 죽이고, 거절하면 죽이는 사람이 나오죠.

춘향에게 수청을 들게 하는 변학도의 행동은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면 성상납 강요입니다. 춘향은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이몽룡이 방자를 시켜 만남을 청하지만 처음에 이를 거절해요. 춘향은 감히 거절하고, 선택합니다. 춘향은 봉건적 가치관에서 자유로운 인물이 아니지만, 근대적 개인의 모습도 중첩되어 있습니다. 변학도의 몸의 지배를 거부함으로써 계층과 무관하게 한 개인 여성이 성적자기결정권을 가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회가 여성의 선택과 거절을 묵살하다가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순간은 성매매와 성폭력에 한해서입니다. 성매매는 여성이 '선택'했으며, 성폭력은 여성이 '거절'하지 않았다며 여성에게 책임을 지웁니다. 남성은 욕망의 수동적 피해자가 되죠.

"실명 미투해야 한다"는 폭력성

-많은 이가 '미투는 실명 공개를 전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최근 <프레시안>의 A씨 보도 논란에서도 숱한 이는 물론, 이른바 진보 언론 일부도 익명 미투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같은 지적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매우 위험한 태도입니다. 얼굴과 이름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피해자를 더욱 취약한 상태로 만들어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으려는 태도입니다. 복면 쓴 시민은 테러리스트라고 하던 박근혜 정부의 태도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을 공개하면 피해자의 말을 믿나요? 여성이 신변 보호를 위해 익명을 유지하려 할 때는 가면을 벗기려고 하지만, 정작 여성이 이룬 성취에 대해서는 여성을 열심히 지우지요.

정봉주 씨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요.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걸리지 않은 이상, 가해자가 가해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대체로 피해 여성의 말보다는 남성의 말을 더 믿어요. 정봉주 씨는 자신의 말과 기억이 훨씬 객관적인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사건은 '객관성'이라는 기준을 지배해온 남성 권력행위의 막강함을 보여줍니다. 말과 기억에 대한 남성의 지배 권력을 과시하는 행위였습니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옥분이 옷을 걷어 올리고 "내가 증거요!"라고 외치는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옥분이 제 몸의 상처를 보여 주며 자신이 증거라고 합니다. 몸에 참혹한 증거가 새겨져있어야 우리 사회는 겨우 피해자의 말을 믿습니다.

-많은 이가 '익명 미투=꽃뱀' 프레임에 동조하는 듯합니다.

과잉 공포입니다. 미투 운동 국면에서 많은 이가 피해자의 말을 듣고 생각하기보다, 피해자가 '누구인지' 궁금해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이름을 밝히면, 가해자와 같은 입장의 이들이 피해자를 응징하기가 더 쉬워지죠. 전혀 죄의식을 갖지 못한 채 신상을 털고, 외모 품평을 하며 피해자를 서슴없이 괴롭힙니다. '꽃뱀'도 바로 여성의 말을 믿지 못하도록 조장하는 전략입니다. 유혹의 피해자가 되는 남성이라는 틀을 만들어요. 꽃뱀이라는 틀은 여성이 몸을 통해 돈을 번다는 생각을 반영합니다.

이름과 얼굴 공개에 집착하는 행동은 인격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뜻일 뿐입니다. 여성뿐 아니라 사회의 소수자 말은 믿어지지 않기에, 약자들은 오직 몸이라는 물질성으로만 존재합니다. 반면, 성폭력 가해자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거의 예외 없이 '의도'에 집중합니다. 나타난 결과가 무엇이든 애정표현이었다, 교육목적이었다, 위로였다는 등 자신의 의도를 강조해요. 이 말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이죠. 가해자의 '의도'는 피해자의 고통보다 상대적으로 더 신뢰받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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