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이런 신간 중에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미국 태생의 노동운동가이자 독립 저널리스트 에릭 리(Eric Lee)의 <실험: 조지아의 잊힌 혁명(The Experiment: Georgia's Forgotten Revolution)>(Zed Books, 2017. 국내 미번역)이다. 분명 러시아 혁명 100년을 맞아 기획됐겠지만 '러시아' 혁명을 다룬 책은 아니다. '조지아' 혁명 이야기다.
조지아,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러시아 혁명사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러시아식 발음 '그루지야'로 더 잘 알려진 나라다. 흑해 동쪽, 카프카스 산맥에 자리한 인구 400여만 명의 작은 나라. 그들 자신의 역사보다는 오히려 러시아 역사에 깊은 상흔을 남긴 조지아인, 이오세브 주가슈빌리(별칭 '스탈린')로 더 유명한 나라.
이 나라의 사회주의 혁명을 다룬 책이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혹은 러시아 혁명사 마니아라면 볼셰비키 정권에 맞선 조지아 멘셰비키 정권이 있었음을 떠올리며 오히려 '반혁명' 이야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볼셰비키 정권이 혁명 정부이니 흑백의 세계관에 따르면 당연히 이와 대립한 한 '지방(?)' 정부는 반혁명 세력이 된다.
그러나 러시아 중심부에서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던 그 시기에 변방 조지아에서 벌어진 일 역시 또 다른 '혁명'이었다. 볼셰비키 정권 초기이던 1918~1921년, 약 4년 동안 조지아에는 볼셰비키와는 다른 사회주의 프로그램을 추진한 혁명 정부가 있었다. 에릭 리의 책을 통해 나는 참으로 뒤늦게 그들의 놀라운 이야기를 알게 됐다.
조지아의 멘셰비키 혁명 정부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조지아인 다수는 농민이었다. 또한 농민의 다수는 소작농이었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도 러시아 사회의 최대 숙제가 토지 개혁이었듯이 조지아 민중의 가장 절실한 바람도 농지 분배였다.
그러나 같은 농업 사회라도 러시아 본토와 조지아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러시아에 비해 조지아 농촌은 교육열이 높았다. 덕분에 조지아어를 말할 뿐만 아니라 고유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농민의 비중이 늘어났다. 이렇게 이민족 지배와 민족어 읽고 쓰기 능력의 확산이 겹치면 예외 없이 성장하는 게 근대 민족주의다. 19세기 말 조지아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한데 조지아 민족주의의 담지자는 단순한 민족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농민 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이 무렵 러시아를 휩쓸던 나로드니키가 영향을 끼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조지아 민중에게 민족 문제, 토지 문제를 해결할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은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마르크스주의라면 민족주의보다는 국제주의, 농민보다는 노동계급을 더 강조하는 사상인데도 그랬다.
이는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제국의 지배를 받는 피억압 민족의 전략적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피억압 민족은 침략국보다 더 선진적인 나라들의 이념, 문화를 받아들여 저항의 무기로 삼으려 한다. 왜냐하면 식민 지배자들은 보통 '근대화'를 명분 삼아 침략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피억압 민족은 침략자보다 더 근대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이런 정당화 논리를 뒤집으려 한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들이 미국식 기독교나 소련식 사회주의를 열렬히 받아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조지아인들도 러시아식 농민 사회주의가 아니라 독일식 마르크스주의를 전폭 수용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당을 건설한 시기는 1890년대 말로, 러시아나 조지아나 엇비슷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10월 혁명 무렵까지 사회민주노동당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를 다 합쳐도 나로드니키 정당(사회주의혁명당)을 압도하지 못한 데 반해 조지아에서는 처음부터 조지아 사회민주당이 차르 전제에 맞서는 대중운동을 주도했다. 10월 혁명을 다룬 문헌에 볼셰비키의 정적으로 가끔 등장하는 니콜라이 츠헤이제, 뒤에 조지아 민주공화국 총리를 역임하는 노에 조르다니아 등이 창당 때부터 조지아 사회민주당을 이끈 주요 인물들이었다.
조지아 사회민주당원들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일부로도 활동했다. 그리고 사회민주노동당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하자 조지아 사회민주당은 멘셰비키 쪽을 선택했다. 즉, 조지아 사회민주당은 1903년 이후 조지아 멘셰비키였다. 볼셰비키 당원이 된 스탈린은 조지아인들 가운데에서는 특이한 사례였다.
러시아 혁명사에서 '멘셰비키'는 흔히 '온건파'와 동일시된다. 단계론에 따라 러시아의 당면 혁명은 철저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탓에 노동자, 농민 투쟁보다는 자유주의자들과의 연합을 더 중요시한 세력, 이것이 멘셰비키의 교과서적 이미지다. 그러나 이는 페트로그라드나 모스크바는 몰라도 티플리스(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의 옛 이름)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1905년 러시아 제1차 혁명이 일어나기 이미 1년 전에 조지아에서는 대중 봉기가 시작됐고, 조지아 멘셰비키가 이 투쟁의 정치적 대변자였다.
1904년에 조지아의 구리아 지방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경작권을 놓고 지주와 대립하던 소작농들이 들고 일어나 러시아 경찰들을 쫓아내고 자치를 시작했다. 농민들은 구리아 공화국을 선포했고, 조지아 사회민주당에 대거 입당했다. 노동계급 정당이라 자임하던 조지아 사회민주당은 농민을 '농업 노동자'라 부르며 농민 혁명의 대변자로 나섰다.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농업 사회의 현실에 맞게 개조하려고 애쓰던 그때에 조지아 멘셰비키도 같은 작업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구리아 혁명은 1년 뒤에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운동이 일어났다가 진압당하면서 함께 미완으로 끝났다. 그러나 제국 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때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이어지다 10여 년 뒤에 다시 작렬했다. 게다가 제1차 혁명이 러시아 본토보다 조지아에서 먼저 폭발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듯 조지아 혁명은 단지 러시아 혁명의 일부만은 아니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난 뒤에 조지아인들은 러시아 전체의 제헌의회가 소집되기만을 기다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지아 사회민주당 방침은 러시아 연방공화국 안에서 조지아인들의 자치를 최대한 보장받는다는 것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조지아 출신 멘셰비키 지도자들이 제헌의회 소집을 주관하는 임시정부의 유지에 집착한 것도 이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10월 혁명의 우여곡절을 거치며 제헌의회는 흐지부지돼버렸다.
그러자 조지아인들은 과감한 선택을 했다. 1918년 5월에 멘셰비키가 이끄는 티플리스 소비에트와 노동조합, 인민방위군(러시아 군에서 떨어져 나온 조지아 병사들이 조직한 군대) 등의 대표들이 모여 조지아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또 다른 사회주의 국가 실험이 시작됐다.
러시아 10월 혁명과는 달랐던 조지아 혁명
조지아 혁명정부의 가장 급박한 과제는 물론 토지 개혁이었다. 1917년 여름에 러시아 곳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지아에서도 이미 소작농들이 대지주 소유 농지를 점거하고 있었다. 새 정부는 이런 아래로부터의 농민 혁명을 사후 승인하기만 하면 됐다. 농지 소유는 각 농가가 직접 경작할 수 있는 만큼으로 제한됐다. 신경제정책(NEP)을 추진하던 1920년대 초의 소비에트연방과 마찬가지로 조지아는 삽시간에 자작농의 나라가 됐다.
티플리스와 모스크바의 경제 정책이 갈라진 지점은 민간 기업 처리였다. 볼셰비키 정부가 내전기에 대다수 기업을 국유화한 데 반해 조지아 멘셰비키는 국유화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주된 외화 수입원이던 망간 광산 정도만 국유화했다. 이념이나 전략이 다른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경제 상황이 달랐다. 아직 조지아에는 러시아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거대 자본주의 기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기존 민간 기업을 국유화한다고 해서 경제 전체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대신 조지아 정부는 신규 공공 투자로 국영 기업을 신설했다. 협동조합도 적극 육성했다. V. I. 레닌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협동조합의 가치를 재발견했지만, 조지아 멘셰비키는 처음부터 협동조합을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의 핵심 구성 요소로 바라봤다. 1920년 조사에 따르면, 조지아 노동 인구 중 52%가 국영 기업 소속이고 18%가 협동조합 소속이었다. 민간 기업에 고용된 인원은 19%에 불과했다. 대규모 국유화 없이도 사회화가 이뤄진 셈이었다.
노동조합은 사회화된 부문, 민간 기업 가릴 것 없이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았다. 소비에트연방에서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전통적 기구인 노동조합이 어떤 지위를 지니며 기능은 무엇인지가 뜨거운 쟁점이 됐다. 오랜 논란과 투쟁 끝에 소련 노동조합은 공산당의 부속 기관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지아에서는 노동조합의 자주성이 너무도 당연한 전제였다. 이런 자유롭고 안정된 지위 덕분에 노동조합운동은 1917년에 41개 조합, 조합원 2만9000명이던 것이 1920년에는 113개 조합, 조합원 6만4000명으로 급성장했다.
노동권도 급신장했다. 당시 세계 노동운동의 숙원이던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됐다. 청소년의 경우는 노동시간이 6시간으로 제한됐다. 연장 노동은 특별한 경우에만 허용됐고, 통상 임금의 2배를 수당으로 지급해야 했다. 아동 노동은 금지됐다. 여성과 청소년의 야간 노동 또한 금지됐다. 또한 우리의 4대 보험에 해당하는 사회보험이 신설됐다. 서유럽에서 복지국가가 수립되기 한참 전에 조지아는 그 뼈대를 구축하고 있었다.
조지아 민주공화국은 여러 모로 동시대 소비에트연방과 대비되지만, 그 중에서도 확연히 다른 것은 정치 체제였다. 볼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의 연립정부가 깨진 뒤에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가 들어선 소련과 달리 조지아에서는 정당 활동의 자유가 보장됐고 자유선거가 실시됐다. 1919년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약 60%의 유권자가 참여한 가운데, 총 130석 중 109석을 멘셰비키가 차지했고 사회주의혁명당을 포함한 다른 사회주의 세력들이 13석을 얻었다. 부르주아 정당인 민족민주당도 8석을 획득했다. (공산당은 1920년 소련-조지아 평화조약 체결 후 합법화됐다.)
제헌의회는 2년여의 논의 끝에 조지아 민주공화국 헌법을 기초했다. 헌법학자들은 흔히 사회권을 인권의 중요한 내용으로 명시한 최초의 사례가 독일 바이마르 헌법이라고 하지만, 조지아 민주공화국 헌법도 바이마르 헌법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아니, 조지아 헌법이 훨씬 더 철저했다.
1921년 헌법은 모든 아동의 무상 초등교육을 못 박았을 뿐만 아니라 교복과 급식, 학용품도 무상 지급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국가가 모든 시민의 고용과 사회보험을 보장해야 한다고도 했다. 노동시간은 주당 48시간으로 제한됐다. 여성과 청년은 작업장에서 특별한 보호를 받게 했다. 반면 재산권은 엄격히 제약됐고, 유상 매수를 전제로 한 강제 수용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헌법은 실현되지 못했다. 제대로 실현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조지아 민주공화국의 독창적 사회주의 실험은 1921년 2월 외세의 침입으로 돌연 중단되고 말았다. 외세? 신생 터키공화국? 아니면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던 연합군? 아니다. 내전에 승리하고 나서 한 숨 돌린 소련 붉은 군대가 1년 전 체결한 평화조약을 짓밟으며 쳐들어왔다. 인민방위군은 격렬히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사회민주당이 이끌던 합법 정부는 망명길에 나서야 했다.
레닌은 이 작전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한다. 두 조지아 출신 볼셰비키 스탈린과 그레고리 오르조니키제의 작품이었다. 비록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지만, 이는 한 '사회주의' 국가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를 침공한 첫 번째 사례였다.
볼셰비키가 가지 않은 길, 조지아의 민주적 사회주의
그렇다고 러시아 혁명은 다 악이었고 조지아 혁명은 다 선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조지아 혁명도 혁명인 바에는 어두운 그늘이 없지 않았다. 숱한 민족이 섞여 사는 카프카스 지역이기에 조지아 민주공화국에도 소수민족 문제가 있었다. 조지아 정부가 소수민족들을 다룬 방식은 대러시아주의자들의 처신보다 우월했다고 하기 힘들다.
또한 조지아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려고 외국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차 대전 종전 직전에는 독일군 주둔을 받아들였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영국군에 기댔다. 그러나 영국은 볼셰비키 정부가 내전에서 좀처럼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조지아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강대국 군대 주둔은 소련군 침입의 빌미가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조지아 혁명도 교과서는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짧은 실험은 러시아 혁명이 가야 했고 어쩌면 갈 수 있었으나 가지 않은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훌륭한 거울임에 분명하다. 다당제와 자유선거, 자유권과 사회권을 철저히 보장하는 헌법, 자주적인 노동조합, 공기업-협동조합-민간 기업이 어우러진 경제 등, 조지아 민주공화국이 보여준 '민주적 사회주의'의 맹아에서 우리는 20세기에 막혔던 길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다. 이 길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100년 전 민중이 감히 내딛었던 걸음을 '더 낫게' 다시 밀어붙일 출발이 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조지아의 슬픈 역사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좌파조차 역사를 논하면서 주로 꺼내는 이야깃거리가 러시아 혁명 아니면 중국 혁명이다. 모두 대국의 사례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국이 아니다. 물론 절대 규모로는 한국과 조지아가 비교가 안 되지만, 너무도 커다란 나라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는 점에서는 동병상련 신세다.
그런 까닭에라도 우리는 이제 러시아만이 아니라 조지아 혁명을 알아야겠다. 프랑스 혁명과 독일 사회민주당만이 아니라 오스트리아나 북유럽 여러 나라의 여러 시도에서 배울 바를 찾아야겠다. 작아만 보였던 한 나라가 어떤 주변 강대국보다 더 존엄한 존재로 우뚝 섰던 순간들을 잊지 말고 또한 우리의 역사로 만들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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