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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여성 과학자, '독일의 예카테리나'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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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여성 과학자, '독일의 예카테리나'를 꿈꾸다

[유라시아 견문] 메르켈 : 베를린의 목자

1. 인격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그녀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그 어떤 '페미'보다 여성의 역할 증진에 크게 공헌했다. 유럽의 최강대국 독일의 첫 번째 여성총리가 되었다. 전후 최연소 총리이기도 했다. 4연임에 성공함으로써 최장수 총리까지 등극했다. 2015년 <타임>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연합뉴스

▲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이병한

2. 유라시아 : 동방정책 2.0

정치 초년병 시절 메르켈의 옷차림을 히피에 빗대고는 했다. 히피가 여피가 되어간 서독과는 달리 여전히 히피 그대로 박제된 것처럼 간주된 것이다. 그러나 애당초 68혁명의 경험부터 전혀 달랐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것이 1961년이다. 1968년이면 14살, 메르켈은 서방세계와 멀찍했다. 동구와 훨씬 가까웠다. 동구의 68혁명 '프라하의 봄'이 진압되고 있을 때, 메르켈 가족은 체코에서 휴가 중이었다. 서독 또래들이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할 때, 그녀는 반대편으로 유라시아의 사회주의 형제국을 돌아다녔다. 비틀즈 앨범을 처음 구입한 장소 또한 모스크바였다. 학창시절 러시아어 대회에서 1등을 해서 상품으로 소련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스크바만 다녀온 것도 아니다. 소련의 남부지역, 오늘의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도 구경했다. 배낭여행으로 동유럽의 비잔티움세계, 동로마세계와 이슬람세계와 일찍이 조우했던 것이다.

▲ 베를린 장벽.ⓒ이병한

▲브라덴부르크(Brandenburg) 개선문. ⓒ이병한

4. 재생 : 에너지 전환

메르켈은 여성/청년부 다음으로는 환경부 장관을 역임했다. 당시에도 탈이 많았다. 동독의 물리학자 출신 장관과 68혁명 이래 서독의 생태주의자들 사이 옥신각신했다. 메르켈은 본인의 전공 분야이기도 한 핵발전소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서독의 68세대 특유의 반핵 정서가 덜했다. 핵발전소와 핵무기와 NATO를 등치시켰던 서독의 사회운동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과학과 환경의 조화를 학습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적 반대파들과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해 가는 협상력을 키울 수도 있었다. 결정적인 전환은 유라시아의 최동단 일본 열도에서 비롯되었다. 2011년 3월 11일, 대지진과 쓰나미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를 초래하였다. 물리학자 출신의 국가 수장으로서 만일(萬一)을,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감하게 녹색당의 주장을 전격 수용한다. 원전 마피아의 기득권을 뚫고 핵발전소 전면 폐쇄를 결단했다. 역설적으로 3.11 사태에 가장 창조적으로 대응한 나라가 독일이 된 것이다.

▲ 포츠담 플라자, 유럽의 금융 중심가. ⓒ이병한

5. 부활 : 기독교 민주주의

'하느님, 저를 도와주세요.' 2005년 메르켈이 헌법에 선서하면서, 마지막에 나지막이 보탠 말이다. 그녀는 동독에서 무척 드문 기독교도였다. 1989년 당시 동독 인구의 불과 3%에 그쳤다. 사회주의 경험 반세기도 되지 않아 프로테스탄트의 거점이었던 동독지역이 무신론 사회로 바뀐 것이다. 가히 '혁명'에 준하는 변화였다. 물리학자가 정치가로 변신한 계기에도 정당이 아니라 성당이 있었다. 1989년 동독의 종교 활동가들의 모임(Demokratischer Aufbruch)에 참여한다. 다시금 동유럽 민주화의 근저가 좌/우 투쟁이 아니라 성/속의 길항이었음을 확인케 되는 대목이다. 그곳에서 신학자들과 독일의 장래에 대하여 토론했다. 헌법 개정과 생태 재생, 유럽 평화 등을 추구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해체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원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수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소망했다.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무렵에는 이미 만 명이 넘는 회원을 확보한다.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정치에 입문했기에 메르켈은 세속주의적 사회민주당이 아니라 기독교민주당과 결합해 갔던 것이다.

▲ 메르켈의 아버지가 목사로 있었던 템플린 교회. ⓒ이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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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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