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는 지금 폭풍전야다. 지난 25일 전체법관 2900명 중 507명이 응답한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사상 처음으로 현행 법관인사제도가 사법독립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법관들의 속마음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법관독립을 강화하기 위해 현행 법관인사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이 물경 96.6%에 달했다. 인사 분야와 직무평가 분야를 고쳐야 한다는 데 각각 89%, 72%가 동의했다. 현재의 시스템 아래서는 인사 권한과 사법행정권한을 가진 소속법원장의 눈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 무려 91.6%가 공감했다.
법관의 74.9%는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법관전보인사가 법원자율성을 저해하고 사법관료화를 부채질한다는 데 동의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에 대해서도 재논의 없이 '당장' 폐지 방침을 이행해야 한다는 입장이 54.6%에 달했다. 만약 폐지 방침에 대한 재논의 여부를 묻지 않고 찬성 여부를 다시 물었다면 찬성 의견이 90% 넘게 나왔을 게 틀림없다. 승진 탈락과 함께 옷을 벗어야하는 상황에 내몰며 법관의 평생 신분 보장을 무색하게 만든 주범이기 때문이다. 법관의 71.6%는 실질적으로 대법원장의 뜻이 관철되는 현재의 대법관 제청 절차도 잘못되었다고 믿는다.
반면 법원장의 인사전횡이나 부당행정을 제어할 유일한 법적 장치인 법원별 판사회의가 기능부전에 빠졌다는 판단을 무려 86.2%가 공유했다. 현행 시스템에는 대법원장과 법원장의 권한행사를 제어할 수 있는 어떤 견제장치도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현직법관들은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법관인사권 탓에 법관독립이 내부로부터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믿는다. 언론의 보도를 집중적으로 탄 소신파 법관 관련 설문응답 결과는 이런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낸다. (☞관련 기사 : 대법원장은 치명적인 법관 설문 조사 결과에 응답하라, 사법 독립 위협하는 대법원장의 법관 인사권 독점)
법관 인사 제도, 모든 측면에 대해 압도적으로 부정적 평가
놀라지 마시라. 법관의 88.2%는 지금의 인사제도 아래서는 대법원장이나 소속법원장의 권한 행사를 공개 비판한 소신파 법관에게 인사 불이익이 따를 것으로 예상한다. 47%는 주요사건에서 대법원 판례에 도전한 소신파 판사도 인사 불이익을 볼 것으로 예상하며 45.3%는 주요사건에서 정권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판결을 내려도 인사 불이익이 기다릴 것으로 전망한다. 평정/평판에 따른 이익/불이익성 전보인사를 폐지하자는 개선방안에 법관의 85.2%가 지지를 보낸 이유다.
한마디로 충격과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조사 결과다. 500명도 넘는 법관들은 현행 인사제도의 '모든' 측면에 대해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쯤되면 우리나라 사법부는 아이들 말로 '폭망'했다고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설문조사 결과는 다름 아닌 법관들 스스로가 우리사법부를 인사 불이익을 앞세워 소신파 법관을 길들이고 솎아내는 '참 나쁜 사법부'로 파악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참담한 설문조사 결과 앞에 양승태 대법원장과 각급법원장, 법원행정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눈치 안 보는 재판' 위한 최소 조건, 국회는 왜 조용한가?
법관들은 문제의 원천을 알기에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 문제의 해법도 정확하게 제시한다. 최소한 65%가 넘는 절대다수의 법관들이 다음과 같이 바꾸자는 데 동의한다.
첫째, 대법관 제청 과정에서 대법원장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구성의 다양성을 높인다. 둘째, 법원장은 임명제에서 호선제로 바꾸고 사무분담과 사건배당은 판사회의에서운영위를 선출해서 맡긴다. 셋째, 지법부장에서 고법부장으로 승진제도를 폐지해서 정년까지 법관신분을 보장한다. 넷째, 정기전보 제도도 전보 기준을 세밀하게 정해서 보복성, 특혜성 전보 인사를 없애고 한 법원에서 장기 근무를 독려한다. 다섯째,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을 보좌해온 중앙집권적 관료기구인 법원행정처를 대폭 축소한다.
이렇게만 바꿔도 법관들이 인사권자 대법원장과 평정권자 법원장의 눈치 보기에서 벗어나 소신껏 재판에 임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소신파 법관들도 지금처럼 움츠려들 필요가 없다. 소장법관들이 좀 더 안전하게 소수의견 개발에 열심을 낼 수 있고 정권 관련 사안에서도 대법원장의 의중이나 정권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법과 원칙에 따라 재판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정도의 변화는 개헌 없이 법원조직법과 대법원 규칙만 개정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국회만 움직이면 지금 당장에라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국회와 정치권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일부 율사 출신 의원들이 조사 결과를 거론하며 사법개혁 의지를 피력하고 있으나 조사 결과가 발표된 지 열흘이 지나도록 국회는 법사위조차 소집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는 유력 대선주자들도 경선과정에 온 신경을 곤두세울 뿐 특별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대법원장의 입장도 현재로선 안개 속이다. 법관들은 일단 사법개혁 저지 의혹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활동을 숨죽여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위원회의 조사 대상과 조사일정은 비공개다. 특히 양승태 대법원장을 조사할지, 조사한다면 언제쯤 조사할지는 전혀 알려진 게 없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수상한 침묵
양승태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설문조사 결과발표 이후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침묵을 지키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는 물론 판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물론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안으로는 수습책 마련에 몹시 분주할 게 틀림없다. 지난주에는 박근혜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와 발부, 각 정당의 대선후보 경선 일정 등이 겹쳐 언론의 조명을 받지 않고 넘어갔지만 앞으로도 어영부영 넘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혹시라도 설문조사 결과의 엄중성을 모르기 때문에 가만있는 것이라면 더 큰일이다. 안심이 안 되는 구석이 없진 않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고영한 법원행정처장은 지난달에 이미 국회개헌특위에서 법관인사권과 사법행정권을 행사할 별도의 헌법기관을 만드는 방안에 대해 반대 의견을 냈다. "대법원장의 인사권이 법관을 관료화하고 예속화시킨다는 외부의 비판이 있는 것은 잘 알지만 (과거에) 정치적으로 악용한 사례 때문에 대법원장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산물"이라고 주장하며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사법부'의 독립이 '사법=법관' 독립에 역행하는 지금의 모순을 바로잡을 좋은 기회를 걷어 차버린 셈이다.
혹여 법관들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설문조사 결과가 나온 지금도 법관의 관료화나 예속화 우려를 "'외부'의 비판"으로 치부하며 똑같은 입장을 견지한다면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기대할 게 전혀 없을 것이다. 큰 권력에 주어진 특권 중에 하나는 큰 잘못을 알아채서 바로잡을 경우 과거의 잘잘못으로 평가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으로서는 지금의 위기가 역대 대법원장 누구도 못했던 법관 독립 강화 개혁에 나선 대법원장으로 기억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법관들의 절대다수가 불신임한 현행 제도를 붙잡고 앉아있을 이유가 도무지 없지 않은가.
제왕적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 사망 선고 받았다
현실적으로도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과 지위는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그 순간 사망 선고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설문조사 결과의 압도적인 통계수치 앞에서 현행 법관인사시스템의 정당성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법관인사제도의 근본적인 재설계는 불가피하다. 선택은 오직 양승태 대법원장이 앞장서서 이 역사적 과업을 수행할 것인지, 아니면 시간을 끌며 사실상 방해할 것인지 정도다. 나아가서 기성체제의 기득권자, 법원행정처를 끝까지 끼고 돌 것인지, 아니면 연구회 소속판사들을 믿고 개혁 주체로 세울 것인지 정도다.
이미 사법개혁의 신호탄은 올라갔고 이제 사법개혁은 시간문제다. 지금 촛불시민들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말없는 공범, 제왕적 대법원장이 이끄는 관료적 사법부를 벼르고 있다. 작년 총선 때 스마트한 투표로 입법부를 재편한 데 이어 이번 촛불평화혁명으로 행정부 교체까지 앞둔 국민들의 관심은 이번 조사 결과로 사법부를 향할 게 틀림없다. 이제 사법부 차례다. 특히 사법개혁의 칼끝은 이번에 곧바로 제왕적 대법원장과 그의 분신, 법원행정처를 겨냥한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사법독립의 주적으로 주로 외부권력을 떠올렸지만 설문조사 결과는 내부권력, 즉, 대법원장과 법원장이 더 위험하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일반법관들이 윗분들의 사법행정권 행사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윗분들의 정치적 성향을 의식하지 않고 주요사건을 소신껏 처리할 때, 또는 화석화된 대법원 판례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인 법해석을 시도할 경우 불이익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는 법관이 무려 88.2%, 45.3%, 47%에 달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법관들의 주관적 인식이 그렇다는 점이 중요하다.
정권 편향 판결, 한국 법관 인사 제도의 산물
법관들이 예상하듯이 소신파 법관에게 칭찬 대신 불이익을 주는 법원조직에서 무슨 수로 법관의 양심과 소신을 기대할 수 있겠나. 이렇게 되면 (대)법원장의 사법 행정과 정책에 대한 법원 내부의 민주적 소통이 가로막힌다. 주요 사건에서 대법원판례의 추종강요도 창조적인 법리발전에 족쇄가 된다. 세인의 이목이 쏠린 주요 정치적 사안에서 정권 편향 판결은 더 큰 문제다. 정찰제 판결이니 주문코드 판결이니 하는 말이 도는 상황에서는 법원이 민주주의와 인권보장의 최후보루라는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국민의 사법신뢰도가 OECD국가 중 하위권을 달리는 이유는 소신파 법관을 멸종위기 희귀종으로 몰아내온 한국의 법관 인사 제도의 산물이다.
본래 재판에 임하는 법관에게는 상사나 부하가 있을 수 없다. 재판장도, 법원장도, 대법원장도 지시를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다. 상급심의 판례 해석도 절대적이지 않다. 오늘의 소수의견이 내일의 다수 의견이 된다. 하급심의 상급심 판례 도전이나 재해석은 대법원 판례 변경의 촉매로 작용한다. 하지만 설문조사 결과는 소수의견의 개진을 가로막는 법관인사제도 탓에 아래로부터의 대법원 판례변경을 좀체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데 주요 사건을 맡은 판사들이 정권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판결을 선고할 경우 내부로부터 인사 불이익을 걱정해야 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인사 불이익은 인사권자만이 줄 수 있는데 법관인사권자는 대법원장(과 일부권한을 위임받은 법원장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들이 주요 사건에서 정부와 여당 등 정치권력의 눈치를 본다는 뜻 아닌가. 그리고 이런 사안에서 자신의 의중과 달리 나가는 법관이 있으면 인사 불이익을 준다는 뜻이 아닌가.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런 인식이 현직 법관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것 자체가 큰 문제다.
법관 스스로도 못 믿는 재판 공정성, 역대 대법원장들의 공동업보
정의는 단순히 행해지는 것을 넘어 누구나가 행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오래된 법언이 있다. 설문조사결과는 현행 인사제도 아래서는 법관들의 인사 불이익 회피 욕구가 공정사법 실현 욕구보다도 강력할 수 있다는 점을 법관들부터 인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법관들도 스스로를 못 믿을진대 일반국민들의 사법신뢰도가 OECD국가 중 하위권을 기록해온 현상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오늘의 참담한 설문조사 결과는 제왕적 현실에 안주하며 종종 퇴행적 행태마저 보여 온 역대 대법원장들의 공동업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런 시스템에 순응하며 유일한 견제 장치인 법원별 판사회의마저 활성화시키지 못한 일반법관의 책임도 가볍지는 않다. 그러나 권력으로 유지되는 잘못된 시스템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다. 개탄스럽지만 판사도 예외가 아니다.
잘못된 법관인사 제도가 만들어낸 지금의 사법 풍토와 법관 문화는 법관과 사법정의, 일반시민과 민주주의에 두루 악영향을 끼친다. 지금의 시스템 아래서 덕을 보는 집단은 대법원장과 법원장 등 법원 수뇌부와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에 지나지 않는다. 대법원장은 제왕적 권력을 가져서 좋고 법원장 역시 그걸 나눠받아 좋다. 대법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법원행정처 판사들도 법원고위직으로 출세가 보장돼 좋다. 그렇지만 이들이 좋으라고 법관의 96.6%가 바꿔야 한다고 굳게 믿는 현행 법관인사제도를 유지해야 한단 말인가.
대법원장의 법관인사권 독점, 일제의 잔재
지난 역사에서 역대 대법원장 등 법원수뇌부와 법원행정처는 달리 행동할 수 있었고 달리 행동했어야 했다. 대법원장은 진작부터 법원 내에 자유롭고 진취적인 분위기를 고취했어야 했다. 자신의 권한을 과감하게 법원별 판사회의에 나눠주며 법원을 법관들의 민주적 자치조직으로 바꿔나갔어야 했다. 대법원 판례나 헌재 판례에 대한 내부 도전과 재해석을 오히려 격려했어야 했다. 세상의 이목이 쏠린 정치적 사안에서 부당한 정치적 압력이나 여론의 압력을 앞장서서 막아줬어야 했다. 법원행정처가 글로벌 스탠더드와 거리가 먼 일제 사법제도의 잔재라는 점을 인식하고 그 운영방식을 점진적으로라도 바꿔나갔어야 했다. 이번 참담한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역대 사법부와 구성원 전체가 커다란 책임감을 느끼고 '비정상의 정상화' 개혁을 위해 함께 뜻과 힘을 모아야 할 이유다.
사법이용자인 국민의 관점, 특히 힘없는 국민의 관점에서도 이번 조사결과는 재앙이다. 법관의 양심과 소신에 따른 법해석과 판단이 대법원장의 사법정책이나 대법원의 판례, 정권의 중요한 이해관계 앞에서 여지없이 굴절될 수 있다고 법관들 스스로가 믿는다는 얘기 아닌가. 이렇게 되면 부당한 권력에 당한 약자들은 누굴 믿고 기대야 하나. 흔한 말로 법관도 법원도 법도 믿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소신파 법관을 체계적으로 거세하는 지금의 사법부를 개혁해야 할 이유는 일반시민의 관점에서도 차고 넘친다.
왜 이렇게 됐을까? 대법원장의 법관인사권 독점은 종주국 일본과 그 식민통치를 거친 한국과 대만에만 특유한 현상이다. 선진국에서는 법관인사권 등 사법행정권을 대법원장이 아니라 별도의 헌법기관이 보유한다. 법관의 전보도 예외적으로만 허용되며 절대다수의 법관은 한번 임용된 법원에서 정년까지 봉직한다. 법원장은 호선으로 뽑히든가 선임 순으로 돌려 맡는데 가급적 피한다. 사무분담이나 평정 등 인사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수도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반면 업무 부담은 늘기 때문이다.
법원행정처 같은 중앙집권적 사법행정조직도 상근판사를 두지 않고 소규모다. 전보인사, 승진인사, 재임용 제도가 예외적으로만 있는데다 사무분담이나 사건배당도 법원별로 법관들의 집단자치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실정법이나 법관윤리를 어겨 탄핵을 자초하지 않는 이상 법관 신분은 정년까지 보장된다. 이런 시스템 아래서는 일반법관들이 대법원장이건 소속법원장이건 눈치 볼 일이 없다. 우리나라 법관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윗분들에 대한 눈치 보기를 체질화하며 살아간다. 설문조사 결과는 이 사실을 충격적인 수치로 드러냈을 뿐이다.
법관 전체의 도덕성이 시험대에 올랐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지금은 설문조사 결과 공개로 설문조사에 감춰진 핵폭탄의 봉인이 풀린 상태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대응 여하에 따라서는 폭발해서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를 그냥 날려 보낼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다. 어떻게 보면 법관집단 전체의 집단지성과 도덕성, 역량과 책임감이 일대 시험대에 올랐다. 달리 보면, 예상되는 인사 불이익 앞에서 오랫동안 굴종과 예속의 길을 걸어왔던 법관집단이 지금까지의 무참한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일대 전기가 마련됐다고도 할 수 있다.
현행 법관인사제도가 '법관 독립=사법 독립'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정황이 설문조사결과로 드러난 현 상황은 사법부의 비상사태를 넘어 민주주의와 인권보장의 비상사태가 아닐 수 없다. 당연히 국회가 즉각 법사위를 소집해서 법원행정처장을 불러 상황과 입장을 청취하고 국회차원의 조사청문회를 결의해야 한다. 주요정당의 대선후보들도 대법원장의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입장과 대책을 밝혀야 한다. 물론 변호사들과 법학교수들, 그리고 사법감시 시민단체들도 관심을 갖고 나설 것이다. 그래도 가장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할 당사자는 뭐니 뭐니 해도 양승태 대법원장이다.
그렇다면 양승태 대법원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실제로는 별 문제가 없는데 소장법관들이 잘 모르고 불안해한다고 아랫사람을 탓하고 싶겠지만 그건 최악의 수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렇게 변명한다면 대법원장이 스스로 누워서 침 뱉는 격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처럼 물정 모르고 겁 많은 법관들 중에서 뽑히고 뽑힌 수장이 바로 대법원장 자신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장은 최소한 1년 후에는 이런 조사결과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법관인사제도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일에 즉각 착수해야 한다. 보직·평정·사무분담 등 법관인사와 사법행정 제도를 개선해서 일반법관이 모두 소신파 법관이 되도록, 다시 말해서, 쓸데없이 대법원장과 법원장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사법독립을 확보해야 할 대법원장의 법적, 도덕적 책무다.
그리하여 법관독립성 강화를 겨냥한 연구회 법관들의 통렬한 법관예속 고발을 치열한 법관독립 선언의 기회로 바꿔내야 한다. 드물게 대의를 위해 할 일과 개인의 이익을 위해 할 일이 운 좋게 만날 때가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양 대법원장이 하루바삐 모든 사심과 기득권을 내려놓고 오직 역사와 대화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를 기대한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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