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법원 국제인권법연구회가 법관 독립성에 관한 법관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법관들의 셀프 진단 결과는 참담했다. 현직 법관이 대법원장이나 소속 법원장의 사법행정을 공개 비판할 경우 인사 불이익을 당할 것으로 예상하는 법관이 무려 88.2%에 달했다. 한국 사법부와 수뇌부가 도무지 법조인과 국민, 국제사회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치스러운 조사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현재의 법관 인사 제도가 법관 독립에 미치는 악영향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법관 인사 제도에 대한 판사들의 문제 의식 역시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비판적이었다.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권이 문제의 근원
설문 조사 결과가 발표된 학술대회 자리에선 일탈과 반항을 모르는 범생이 '공신' 법관들이 단단히 뿔이 난 게 한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어도 침묵하던 법관들이었다. 대법원장과 지법원장에 대한 국정원의 사찰 문건이 공개돼도, 법원과 재판에 대한 통상적 사찰 활동을 국정원장이 시인해도, 그냥 넘어가던 법관들이었다. 그러나 소장법관들이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모여서 문제의 근원을 탐구하며 말없이 칼을 갈고 있었다. 드디어 출정 준비를 마친 법관들이 최대한 사려 깊고 점잖게 할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방송사 카메라들은 때를 놓칠세라 녹화 영상을 찍어대고 신문사 기자들은 노트북으로 기사를 작성하느라 바빴다. 법학 교수들과 법조인, 법원 노조 관계자 등으로 가득 찬 공개된 장소에서 법관들이 열정적으로 발표하고 토론하는 모습은 낯선 만큼이나 신선했다.
조직에 어떤 문제가 있고 대안이 있는지, 어떤 걸림돌이 있고 디딤돌이 있는지는 현장에 가까운 내부자들이 제일 잘 안다. 개혁이 내부로부터 개혁, 아래로부터 개혁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지난 3월25일 법관 인사 제도 학술 대회 자리에서 법관들의 발제와 토론을 들으면서 새삼 이런 사실을 절감했다. 사법부라고 다르지 않았다. 연구회 소속 법관 480여 명의 집단지성이 만들어낸 현실 진단과 처방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명쾌했다. 설문 조사 응답 법관들도 입을 모아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권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지적하며 법관 인사 제도의 발본 개혁을 주문했다. 일차적으로는 대법원장이 책임 있는 반응을 보여야 하지만 입법 사항이 다수 있다는 점에서 국회와 정당은 물론 일반시민들도 현직 법관들의 요구를 뒷받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직 법관들은 현 법관 인사시스템을 법관들의 굴종을 강요하고 법관 독립을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게 틀림없다. 어떤 환자가 몸 안의 암 덩어리를 수술하지 않고 마냥 끼고 살겠는가. 당연히 설문 조사 결과도 법관들의 사법 관료화 자기고백으로 시작해서 결연한 법관 독립 선언으로 치닫는다. 법관들의 개혁 비전은 분명하다.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 권한을 제한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해서 선진국 수준의 법관 독립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응답법관 507명 중 96.6%가 한목소리로 법관 인사 시스템의 과감한 재설계를 주문했다. 이번 조사 결과가 대법원장도 저항 못할 핵폭탄급 위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는 이유다.
법관 열 중 아홉은 대법원장에게, 둘 중 하나는 대법원 판례와 정권에 겁먹고 있다
법원행정처 고위직 판사들은 지난 2월 1일 설문 조사 내용을 받아보고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예상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약화와 와해를 노리는 일련의 무리수를 뒀을 리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어리석은 짓이자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법원행정처 판사들도 현행 법관인사제도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접했을 터다. 법관 독립의 관점에서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며 어떤 악영향을 끼쳐왔는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에겐 영광이, 조직에는 타락이 기다리는 그 길에서 안주할 뿐 뜯어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료 법관들 사이에서 개혁 여론이 이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꼼수 동원을 서슴지 않았다. 나쁜 시스템이 만들어낸 악의 평범성을 판사 엘리트 집단에서도 발견하는 건 몹시 씁쓸한 일이다.
양승태 대법원장도 이번 설문 조사 결과를 마냥 외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응답 법관 열 명 중 아홉은 인사 불이익을 각오하지 않고는 대법원장의 정책 방침에 딴죽을 걸 수 없다고 믿는다. 게다가 '주요사건에서' 대법원 판례에 도전하거나 정권에 반대하는 판결을 내린 법관도 다르지 않다고 예상한 동료 법관들이 각각 47%, 45.3%에 달했다. 법관 열 중 아홉은 대법원장에게, 둘 중 하나는 대법원 판례와 정권에 겁먹고 있다는 뜻이다.
설문 조사 결과를 접한 법관들도 내가 이러려고 법관 됐나 자괴감이 들겠지만 국민들 입장에서도 이게 법원이냐는 장탄식이 절로 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선진국에서는 현직법관의 90%, 50%는 고사하고 단10%가 내외의 권력에 겁먹고 눈치 본다는 조사결과가 나와도 사법부와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힐 게 틀림없다. 당장 의회 법사위가 열리고 본격적인 조사청문회가 조직될 것이며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이 책임지고 사퇴하지 않을 수 없을 터다. 촛불시민혁명으로 간신히 되찾은 대한민국의 국격이 이번 조사 결과로 다시 한 번 곤두박질치게 생겼다. 생각할수록 소름 돋는 조사 결과다.
양승태 대법원장, 선택의 기로에 섰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도 이번에는 타성에서 벗어나 문제의 심각성에 눈뜨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국제인권법연구회 탄압에 앞장섰던 법원행정처 차장이 바로 사표를 내고 물러난 상황이다. 그만큼 법관들의 동요가 심상치 않다. 향후 2, 3주 동안은 이인복 전 대법관을 중심으로 7인의 진상조사위원회가 연구회 관련 의혹을 본격 조사할 예정이다. 더욱이 조사 결과 발표로 제왕적 대법원장이 이끄는 한국 사법의 부끄러운 민낯과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 공공의 관심에 불을 질렀다.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감안할 때 누구라도 이번 법관 독립 선언 사태를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덮고 지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오는 9월 임기가 끝날 때까지 미적지근한 회피와 미봉으로 일관하며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키울 것인가, 아니면,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잔을 적극적으로 받아들고 단호하게 정도를 걸을 것인가? 만약 후자의 길을 선택한다면 대법원장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 모든 법원에 당장 문을 걸어 닫고 법관회의를 열어, 설문 조사 결과를 놓고 끝장 토론을 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또한 법관의 건강한 소신과 양심을 지켜줄 획기적인 법관인사제도 개혁안을 만들어내겠다고 약속하고 태스크 포스를 구성하되 전적으로 법관회의에서 법원별, 직급별로 뽑은 법관 대표들로 구성하라고 지시해야 한다.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권 및 비대한 법원행정처가 빚어낸 사법관료화 문화에 누구보다도 젖어있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본격적인 사법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대략 난감한' 역설적 상황에 처한 셈이다. 누군가는 이를 일컬어 역사의 교지라고 이름 붙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런 중대하고 비상한 국면에서도 양승태 대법원장이 임기 말 타령을 늘어놓으며 꾸물거릴 경우 강력한 내부 반발과 외부 질타에 시달리다 불행한 국면을 맞이할 가능성이 100%다. 이럴 때는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더라도 앞장서며 길을 열어줘야만 최소한의 명예를 건지고 임기를 보전할 수 있다. 만약 사심을 버리고 신속하고 단호하게 소장법관들과 함께 움직일 경우 오히려 역사적 사명을 수행한 대법원장으로 평가받으며 위기를 기회로 역전시킬 가능성도 남아있다. 지금은 촛불시민혁명의 힘으로 국정 농단을 일삼은 대통령과 참모들, 장차관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세우고 있는 시점이다. 말없이 공범 역할을 해온 사법부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사법개혁의 최적기다. 달포 안에 정권 교체가 예정돼있고 대법원장 임기도 몇 달 남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홀가분하게 역사와 대화하며 발본적인 사법 개혁을 추진하기 딱 좋은 때다.
김영훈 판사의 뼈아픈 내부 고발
이번 사법 농단 사태의 진상규명위원장을 맡은 이인복 전 대법관도 서너 가지 연구회 탄압 의혹에 대한 사실관계의 규명을 넘어 그 배후와 뿌리에 도사린 대법원장의 법관 인사권 독점 폐단 및 법원행정처 구성 운영 방식에 대한 진단과 개선책을 조사보고서에 담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설문조사의 어떤 내용이 무슨 이유로 사단을 일으켰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야만 연구회가 내놓은 법관인사제도 개혁안을 참고하여 유사 사태의 재발 방지책을 제시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관련 당사자들이 무슨 발언과 행동을 했는지를 캐묻고 보고하는 미시적 진상규명에 그쳐서는 지금의 엄중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설문 조사에 관해서 한 가지 밝혀둘 게 있다. 이날 설문 조사 결과를 발제한 김영훈 판사는 "본인이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인 것은 틀림없지만 설문 조사 계획과 설문 내용 작성, 설문 배포 범위 결정 등은 국제인권법연구회와 무관하게 전적으로 혼자 진행했으며 따라서 연구회가 아닌 자신의 책임"이라고 학술대회에서 고백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거론하는 글을 발표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걱정해주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그것이 바로 법원의 관료화를 보여주는 것 아니겠냐고 지적한 후 마음먹고 이렇게 이어나갔다.
"법관이 법원의 문제점에 대해 (…) 글을 발표한다[고], 또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서 (…)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을 포함시켰다[고], 그 자신과 주변 사람에 대한 불이익을 걱정해야 한다면, 그러한 법원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기관이 아니라 사회적 수요에 반응하지 않는 독재의 기관에 불과할 것이다."
김영훈 판사의 설문 조사와 발표문은 현직 법관이 양심과 울분으로 쓴 사법 현실 고발장이자 이성과 열정으로 쓴 법관 독립 강화책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김 판사의 뼈아픈 내부 고발과 개혁 제안에 온 정성을 다해 응답할 엄중한 법적, 도덕적 책무가 있다.
대법원장의 권한 분산을 위한 5대 개혁 과제
다행히 학술대회에서 발표와 토론을 맡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법관들은 실용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누구도 이상주의나 급진주의를 설파하지 않았다.
다만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내려온 일본식 관료 사법 체계를 극복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와 선진사법체계로 바꾸자고 호소했다. 실현 가능성을 생각해서 개헌이 아니라 입법으로 가능한 개혁안을 내놨다. 김영훈 판사가 설계한 설문 조사에서도 개헌 필요 사항은 선택지에서 아예 배제됐다. 대안을 묻는 문항들은 예외 없이 법률이나 대법원 규칙, 법원 내규 개정으로 가능한 처방전만을 선택지로 제시했다.
토론자로 나온 차성안 판사도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 분산을 위한 5대 개혁 과제를 제시하며 모두 법원조직법만 개정하면 되는 사항들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5대 입법 과제는 첫째, 상근판사 중심의 현 법원행정처 해체 및 재구성; 둘째, 사법정책 최고결정기관으로서 전국법관대표회의 신설; 셋째, 법원장 호선제 도입; 넷째, 각 법원 판사회의의 운영위 선출 및 사무분담권한 부여; 다섯째, 고법부장 승진폐지를 위한 지법·고법 이원화의 명문화다. 모두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권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여 법관의 관료화를 결정적으로 줄일 수 있는 획기적 방안이지만 법원조직법 개정만으로도 충분히 실현가능한 게 특징이다.
차성안 판사의 5대 제안은 지금 당장, 법원별로 법관회의를 열어서 집중논의하면 대체로 의견일치가 이뤄질 수 있는 법관 인사 개혁의 골간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법정책의 최고의결기구를 법관대표로만 구성하자는 차 판사의 둘째 제안에 대해서는 좀 더 토론이 필요하다. 사법정책 최고결정기구의 민주적 정당성을 위해 법관 대표 외의 법률가 직역 대표는 물론 대통령과 의회 등 민주적 정치권력의 대표를 포함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진행 중인 촛불시민혁명과 임박한 정권 교체가 만들어낼 향후의 개혁친화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위의 5대 제도개혁만 이뤄내도 한국사법은 급속도로 선진국 수준의 법관독립을 성취하고 그 힘으로 공정한 선진사법을 향해 성큼 나아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피해 보는 건 국민이다
끝으로 한마디. 우리 법원이 참 나쁜 법원임을 드러낸 지난 25일의 설문 조사 결과로 법관들만 부글부글 끓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국민들도 함께 설문 조사 결과로 드러난 사법 현실에 속을 끓이며 분통을 삭히고 있다. 잘못된 법관 인사 시스템 아래 소신파 법관들의 설자리가 없어지는 작금의 사법 현실에서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힘없고 선량한 국민들이다. 소신파 법관들을 격려하기는커녕 인사권행사로 통제해온 양승태 대법원장은 국제인권법연구회 탄압 사태와 설문 조사 결과에 대해 당연히 국민들에게 정중하게 사죄해야 한다. 또한 법관들이 중지를 모아 법관독립 강화책을 제시하면 신속하고 단호하게 시행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인권의 최후 보루 역할을 제대로 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엄숙하게 약속해야 한다. 동의하시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지난 25일 발표와 토론에 나선 연구회 법관들부터 정중하게 초청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고 이들의 아우성을 직접 경청해야 한다. 바른 길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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