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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원형(原形)의 섬’ 진도와 ‘섬들의 고향(故鄕)’ 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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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봄날! ‘원형(原形)의 섬’ 진도와 ‘섬들의 고향(故鄕)’ 조도

2017년 5월 섬학교 <2박3일 연휴특집>

토종견인 진돗개와 <진도아리랑>으로 대표되는 진도(珍島). 진도는 ‘원형(原形)의 섬’입니다. 진도가 외래문명의 유입으로부터 섬 고유의 독자성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육지와 격리되어 있으면서도 자급자족할 만큼 농토가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진도 덕분에 우리는 우리 문화와 잃어버린 고향의 원형을 간직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섬들의 고향’ 조도(鳥島)는 면 단위로 섬이 가장 많은 진도군 조도면에 속합니다. 조도면 섬들은 179개 섬들이 새떼처럼 무리를 이루어 조도군도라고도 합니다. 수많은 섬들이 만들어내는 경관이 너무도 빼어나 일명 ‘한국의 하롱베이‘라고도 불립니다.

▲섬들의 고향, 조도군도 풍경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진도군

봄날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59강은 5월초 연휴를 맞아 2017년 5월 5(금)∼7(일)일까지 2박3일 일정으로 진도 본섬과 조도를 함께 답사하는 <진도·조도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진도 본섬 남종화의 산실인 운림산방, 항몽유적지 남도석성, 서해안 최고의 일몰을 볼 수 있는 세방낙조, 여전히 성시를 이루는 진도 최고의 오일장인 조금시장 등을 탐방하고 진도민속음악의 성지인 향토문화회관 민속공연도 감상합니다.

조도에선 산 능선에 우뚝 솟아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손가락바위를 찾아 돈대산(231m)도 등반하고, 1816년 영국함대 리라호 선장 바실 헐이 올라 “가슴이 벅차오르고 경치는 황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고 감탄했던 도리산전망대에서 황홀한 다도해 풍경도 감상합니다. ‘여권 없는 해외여행’인 진도·조도 섬 여행에 초대합니다. 5월 섬학교는 교통 혼잡을 피하기 위해 심야인 5일 오전 0시30분 출발합니다.
▶4월 섬학교는 <비진도>입니다.


▲잃어버린 고향으로 가는 통로처럼 아련한 조도 돈대산 오솔길Ⓒ섬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5월 답사지인 <진도> <조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워매 워매 놈의 그늘에서도 요케 크냐, 징한 놈의 풀아!"

진도 팽목항 부근에 남도석성이 있다. (지금은 성 안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이 이주 당해 마을이 사라지고 없다. 이 글은 아직 마을이 남아 있을 때의 기록이다.)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남도석성은 고려 원종 때 배중손 휘하의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고군과 전쟁을 치를 때 해안 방어를 위해 쌓은 성이다. 하지만 삼별초 이전에도 성의 원형은 있었다.

삼국시대 진도가 백제의 강역일 때 이 마을에 관아와 성이 존재했다고 전한다. 지금 남아 있는 성은 조선 세종 때 다시 쌓은 것이다. 성 안에는 누대에 걸쳐 사람들이 살아온 마을이 있다. 마을 안길 담장에는 능소화가 흐드러졌다. 임시로 복원된 관아 건물 옆 집 마당의 텃밭에서 할머니는 들깨 사이에 돋아난 풀을 뽑고 있다.

"옛날에는 호랭이가 얼마나 많았든지 사람도 물어가고 개도 물어가고 그랬다 해요."
진도는 예부터 호랑이가 많은 섬으로 유명했다. 호랑이도 사람도 벗어날 곳 없는 섬이었으니 호환에 대한 공포는 또 얼마나 컸겠는가. 한국판 모세의 기적, 신비의 바닷길로 알려진 고군면 회동마을과 의신면 모도 사이 바다가 갈라지는 현상도 호환과 관련이 깊다. 호랑이 등살에 살 수 없었던 회동마을 사람들이 모도로 집단 피신을 가면서 뽕 할머니만 남기고 떠났다. 혼자 남겨진 뽕 할머니는 바닷길이 열리게 해달라고 용왕님께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용왕님은 할머니의 소원을 듣고 바다를 열어줬다. 하지만 바닷길을 건넌 뽕 할머니는 기진해 숨을 거두었다. 뽕 할머니의 기도 덕분에 그 바닷길은 지금도 해마다 열린다.

"하도 오래 산 게 존 세상도 보고. 너무 너무 존 세상인디. 하도 명이 긴 세상이라."
할머니는 길쌈을 못하면 옷도 못 입고 다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연신 세상이 좋아졌다고 찬탄이다. 그러나 명이 길어서 탈이라는 그 말씀에서는 생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할머니는 텃밭 한 귀퉁이에 약초도 심었다. 진도의 산야에는 약초가 널렸다. 진도뿐이랴. 실상 우리의 산야에서 나는 풀이나 나물 치고 약초 아닌 것이 있던가. 특히 홍주 만드는데 쓰는 지초는 진도에서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애들이 체하면 지초라고, 그놈 갔다 놋그릇에 넣고 화로 불에 올려 참기름하고 우려서 애기 떠먹이면 났고, 엄마가 의사였지라."

과거에는 길러먹는 채소에 기생충이 많았다. 이 또한 '엄마 의사'가 퇴치시켰다.
"배추를 생으로 쌈 싸 먹고 체독에 걸리면 그 벌레가 사람 피를 빨아먹어. 그냥 두면 죽어라우. 한디 옥수수 수염 대려 먹으면 나섰어."
병이 있으면 병을 낫게 해주는 약도 곁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옛날에는 약만 먹고 살았어. 도라지랑 더덕이랑 맨날 노물(나물)로 먹고 살았제."

할머니는 그런 약초들을 캐다 팔아 자식들을 키우고 교육시켰다.
"잘 사나 못 사나 부자로는 못 살지만 못 된 일 안하고 사는 것만도 고맙지. 팔십 묵은 노인, 두 늙은이 사는데 이제 나가게 된다우."
이 오래된 마을도 곧 철거될 예정이다. 정부는 남도 석성의 주민들을 이주 시키고 성 안의 여러 관청들을 복원해 관광지로 만들 계획이다.
"정부에 팔렸어라우. 관광객 오면 구경하라고 한다요. 나가라고 할 때까지 이런 거 해먹고 살라고 남아 있소."

▲어느 거인의 손가락일까! 조도 돈대산 손가락바위Ⓒ섬학교

음유시인, 할머니

할머니는 집 없이 사는 민달팽이가 뜯어먹은 깻잎을 들추며 혀를 찬다.
"벌게(벌레)가 요케 부애나게 하요. 민달팽이라고 공산당 넋이라고 한디. 공산당보다 더 징해."
지금은 민달팽이가 보이지 않는다. 땡볕을 피해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띠걸때 나오면 죽으께 지가 못 나와라우. 밤에만 나와라우. 농약 뿌래도 안죽어라우. 그라께 공산당 넋이라 하제."
낮에는 어디 숨어 있다 밤에만 출몰한다 해서 민달팽이를 빨치산, 공산당 넋이라 부르는 듯하다. 게릴라전의 명수, 민달팽이.

"애기맨치로 재워 놓고. 할애비는 재 놓고 나는 풀을 뽑소."
할아버지는 낮잠을 주무시고 할머니는 풀을 뽑는 남도의 한낮. 평생을 그리 살아왔을 터.
"내가 풀을 매서 든내빌면, 매번 또 돗는디 머하러 또 뽑소 그랍니다. 안 매고 놔두면, 풀이 덮어 불면 열매가 안 여는 줄도 모르고 그라요. 열분 백분이나 매도, 얘기만 하고 있어도 이놈이 커 갔고 깨 못 열게 하는디 안 매면 쓰것소."

할머니는 팔순이 넘어서도 속없는 할아버지를 미워하지 않는 눈치다. 그저 징글징글한 풀과 벌레가 야속할 뿐이다. 풀을 나무라던 할머니가 다시 더위를 피해 낮잠을 자고 있을 달팽이를 나무란다. "에라이 징한 놈의 짐승아. 민달팽이, 고동달팽이, 깨밭은 민달팽이 그것이 원수여라우. 원순을 싹뚝 짤라 불고. 부애가 나것소? 안 나것소?"

할머니는 풀을 뽑으면서도 처음 본 나그네가 끼니 거르고 다니는 것이 걱정이다. 아들 같은 나그네에게 "어르신, 뭐 좀 잡수고 가야 할텐디" 하며 연신 미안해 하신다. 자식들은 어머니가 햇볕 뜨거운 한낮에 일하는 것이 걱정이다. 아들 셋, 딸 다섯 8남매. 휴가 때 놀러 와서도 자식들은 내내 걱정스럽게 어머니에게 당부했더란다.
"볕날 때 뜨건 데 일하지 마시오 그럽디다. 그라니까 내가 그랬소. 눈 와도 곡석이 연대. 때 맞춰 일해 줘야 열재. 즈그도 인사로 하는 말이제. 그 뜨건데 일하니께."

텃밭에는 기름 짜던 피마자도 심었다.
"씨는 안 믿진다고 여기 하나 심겨 났지."
자녀들은 매일 같이 안부 전화를 해온다.
"자석들 전화하는 것이 효자제. 이녁 자석들 킬라께 부모 건사할 수가 있어야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식과 함께 사는 노인들이 부럽기도 하다.
"부모하고 사는 메느리, 아들이 젤 복 있는 사람이제. 부모한테 불효자는 어서 복을 받을 데가 없어."

텃밭에는 또 극약인 부자도 심었다. 독초인 저건 어디다 쓰시려는 걸까.
"그냥 심어 봤소. 부자는 돼지새끼하고 과 묵는다 합니다."
나그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할머니의 손은 노는 법이 없다. 들깨 그늘의 풀포기를 뽑아낸다.
"워매 워매, 놈의 그늘에서도 요케 크냐. 징한 놈의 풀아."
들깻잎 그늘 밑에서 자라면서 들깨의 성장을 방해하는 풀을 나무라는 말씀이다. 툭툭 던지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시다. 할머니는 음유시인. 계관시인의 월계관을 쓰셔 마땅한 음유시인이시다. 진도는 그런 땅이다.

나그네는 이제 다시 길을 나선다. 할머니는 사립을 나가는 나그네에게 축원을 잊지 않으신다. "복 많이 받으시오." 할머니 마음이 길 떠나는 아들 배웅하는 어머니 마음이다.

석성마을 안길을 걷는다. 얼마 후면 사라져버릴 풍경들. 나는 수 백 년을 이어온 이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 못내 애석하다. 문화재란 무엇일까. 이미 사라져 쓸모없는 관청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 과연 문화적 가치가 있는 일일까. 저 오래된 마을과 집과 돌담과 나무들과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닐까. 그들을 쫓아내고 만드는 껍데기뿐인 건물들. 거기 어떤 생명력이 있을까. 마을을 살리고 사람살이가 이어지게 하는 유적 복원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이제 이 마을이 철거되면 나그네는 또 어디에 가서 저 오래된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봄날, 남종화의 산실 운림산방Ⓒ섬학교

진도의 한

진도는 역사상 크게 세 번 타의에 의해 참혹한 희생을 치렀다. 첫 번째 희생은 고려 말 삼별초의 난 때였다. 30년 전쟁을 종식시키고 무신정권에 빼앗겼던 왕권을 되찾기 위해 고려정부가 원나라와 강화협정을 하고 개경천도를 단행하자 무신정권의 친위대였던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통정, 배중손 등의 삼별초 지도부는 왕실 종친이었던 왕온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근거지를 옮긴다.

진도를 점령한 삼별초는 항몽 근거지인 용장산성과 왕궁, 남도석성 등을 건설하며 수많은 진도 섬 주민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진도 섬 주민들은 여몽연합군의 진도 공격 때는 화살받이가 되어 목숨을 잃었고 삼별초난이 진압된 뒤에는 수많은 진도 섬 주민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또 얼마 후에는 주민 전체가 영암과 해남으로 강제 이주당해 섬은 텅 비었고 주민들은 89년 동안이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디아스포라가 돼야 했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삼별초 항쟁만 가르치지 진도 섬사람들의 희생에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두 번째 희생은 정유재란 발발 후 명량해전 때였다. 사람들은 명량해전의 승리를 이순신 장군의 승리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실상 전투는 진도 섬 주민들의 희생 하에 이룩된 승리였다. 명량해전에 대한 역사는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전함(32척의 협선 포함)으로 적의 함대 200여 척 중 명량해전에 참전한 133척에 맞서 전함 31척을 파손한 대승이며 아군의 전함은 전혀 손실이 없었고 단 2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도 2명뿐인 완벽한 승리로 기록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 아니다. 명량해전 전후로 수없이 많은 진도 섬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함대는 아직 남은 170여 척의 왜군 함대가 전열을 정비해 다시 공격하기 전에 얼른 진도를 떠나 피신해야 했다. 다시 전투가 시작된다면 그야말로 승산 없는 전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이순신함대가 피신 한 뒤 그 뒷감당을 한 것은 진도군민과 이순신의 고향 아산 사람들이었다. 이순신에 대한 보복을 위해 조직된 왜군특공대는 아산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렸고 이 와중에 이순신의 셋째 아들 면도 죽임을 당했다. 그보다 더욱 즉각적인 보복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 명량해전에서 이순신함대를 도와서 싸웠던 진도 섬사람들이었다.

역사기록에는 없는 증거가 진도에 남아 있다. 진도군 고군면 도평리 일대의 정유재란 순절묘역의 무덤들이 그것이다. 이 묘역에는 진도 사람 조응량 등 232기의 전사자가 묻혀 있다. 양반들 몇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그 이름조차 없다.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진실이 묘지로 기록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명량해전을 이순신 장군의 승리로만 기억한다.

그리고 세 번째가 세월호 참사다. 세월호 참사로 꽃 같은 목숨들이 희생당했고 그 유족들은 참혹한 고통을 겪고 있다. 상주를 자처한 진도 섬사람들 또한 그에 못지않은 고통을 겪고 있다. 세월호 참사 후 고통과 직면하는 것이 싫어서 사람들은 진도를 외면하고 심지어 진도 산 수산물을 기피하기도 한다. 그렇게 또 진도는 고립된 세월을 반복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 나라는 진도의 희생에 방관만 하고 있을까. 과거에 그랬듯이 우리는 또 진도의 희생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진도의 희생 또한 잊지 말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다시 진도로 간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하여.

▲서해안 최고의 일몰로 꼽히는 진도 세방낙조Ⓒ진도군

새떼 섬 조도군도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가 있는 팽목항. 진도의 섬으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팽목항을 거쳐야 한다. 세월호 참사 후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는 세력들에 의해 팽목항은 진도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제 공식적인 지명, 팽목은 더 이상 지도에 없다. 그렇다고 팽목이 사라지고 세월호에 대한 기억이 지워질까. 아! 많은 세월이 흐른 뒤라면 지워질 수도 있겠다. 삼별초 반란와 명량해전에서 진도 섬 주민들의 희생이 지워졌듯이. 역사는 기록자들의 역사일 뿐 아닌가.

진도 섬들의 고향 조도(鳥島)로 가는 여객선도 팽목항에서 출항한다. 조도는 지금은 다리로 연결된 하조도와 상조도 두 개 섬을 통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조도면에만 무려 179개의 (유인도 37, 무인도 142) 섬들이 있다. 1개 면 단위의 섬이 옹진군(100개)이나 보령군(75개), 남해군(68개)보다 많다. 가히 ‘섬들의 고향’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새떼처럼 수많은 섬들이 무리지어 모여 있다 해서 조도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기사에 조도는 진도군(珍島郡) 조도면(鳥島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실록>에 조도란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하조도는 초도(草島), 즉 풀섬이라 했고 상조도는 맹성도라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외부자의 시선이 만든 이름일 뿐이다. 섬사람들은 그저 웃섬(상도), 아랫섬(하도)이라 부른다. 얼마나 자존감 있는 이름인가. 세계는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진도 본섬과 조도 사이에는 장죽도란 작은 섬이 있다. 이 사이 바닷길은 한국의 남해와 서해를 이어주는 물목인데 물살이 거세다. 이 수로를 통해서 남해의 배들이 서해로 가고 서해의 배들은 남해를 오간다. 그래서 이 바닷길의 이름이 ‘장죽수로(장죽수도)’다. 장죽수로 앞에 우뚝 서서 수많은 배들의 길라잡이가 되어 주는 등대가 바로 하조도등대다, 1909년 조선통감부가 조선 침략의 봉화로 세웠다. 하조도등대의 안내를 받으며 여객선이 어류포항으로 입항한다. 조도의 관문인 어류포항은 창유항이라고도 하는데 면소재지가 있는 큰 마을이 창유리다. 창유리는 자연부락인 창리와 유토리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이다.

조선시대 말 조도는 동아시아 진출을 노리던 영국함대에 의해 그 지정학적 가치가 먼저 발견된바 있다. 영국군이 점령했던 거문도처럼 영국이 동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 고려했던 섬 중 하나다. 1816년, 청나라 산성동 위해(威海)를 순방하고 돌아가던 영국 함대 3척이 조도에 입항하고 섬에 대한 조사활동을 했다. 3척 중 하나인 리라호 선장 바실 헐은 <한국 서해안과 유구도 탐색 항해 전말서>라는 보고서에서 “진도 조도 해역이 동양에서 항구 건설에 가장 좋은 후보지”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아마도 상조도 도리산에 올랐을 것이다. 그 기록의 일부가 당시 상황을 전한다. “산마루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섬들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섬들을 세어보려 애를 썼으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20개는 되는 듯했다. 경치는 황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을 때 서구 열강들이 먼저 조도의 가치를 알아봤었다. 2백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보다 이 나라의 섬에 대한 인식이 진보한 점이 있기는 한 것일까. 조도는 여전히 나라의 관심 밖에서 영락해 가는 섬이다. 조도면 소재지가 있는 하조도 창유리는 섬의 행정과 상업 중심이다. 작은 섬의 읍내는 조용하다. 구구다방과 초원다방은 폐업했고, 창조마트, 하나로마트도 한산하다. 남해건강약국, 조도가구, 다도해신발가게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다.

오후 세 시,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는다. 몇 개의 식당을 돌았지만 다들 반찬이 떨어져서 백반이 안 된다고 한다. 그때그때 먹을 반찬만 마련해서 팔기 때문이다. 한정된 손님만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니 음식을 무한정 많이 장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많은 섬들이 대개 사정이 비슷하다. 그래서 섬의 식당들은 밤 여덟시만 되어도 문을 닫는다. 여행자는 자신의 습관이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의 풍습을 따라야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사먹을 수 있다.

유토리 정자나무 아래 노인 한 분이 오수를 즐기고 있다. 창유리의 일부인 유토리는 상업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농촌이다. 바다를 끼고 있지 않아 어업활동도 못한다. 섬에서 바다가 없으면 열에 아홉은 빈한한 마을이기 쉽다.

인기척에 잠이 깼지만 노인은 오수를 방해한 나그네를 박대하지 않으신다. 입간판에는 보호수인 팽나무가 수령 200년이라 표시되어 있지만 노인은 그 정도가 못 됐을 것이라 짐작한다. 올해 칠순인 노인의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누군가 '짝대기'만한 것을 심었다니 많아야 100년쯤 됐을 것이란 주장이다. 속성수인 팽나무라 일찍 성장한 것인가 보다. 팽나무 옆에는 선돌이 있다. 기다란 돌을 세우는 선돌 풍습은 대게 신앙물이거나 풍수지리와 관계가 있다. 노인은 선돌이 '살기'를 방지하기 위해 마을에서 세운 것이라 한다.

마을 뒷산인 신금산보다 앞산인 돈대산이 기가 쎄고 정자나무 부근의 능선 또한 '사자등'이라 산혈이 사납다는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가 센 앞산과 사나운 맹수인 사자가 살기등등하게 압박하니 마을 사람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나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운 것이 저 선돌이다. 본래는 세 곳에 하나씩, 세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정자나무 아래 하나만 남았다. 선돌을 세우고도 별다른 효과를 못 봤던 것일까. 마을은 조도에서 가장 빈한한 축에 든다. 바다가 없어 벌어먹을 것이 없으니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지 않는다. 노인들은 대부분 텃밭 정도나 가꾸고 산다. 노인은 "칠십인데도 청년 말 듣고 산다"며 멋쩍게 웃는다.

조도대교를 건넌다. 상조도와 하조도는 이제 더 이상 두 개의 섬이 아니다. 조도대교는 마치 거인처럼 두 다리를 양 섬에 딛고 서 있다. 다리 아래에는 전복 양식장의 가두리가 길게 떠 있다. 상·하 조도 두 섬의 보호로 풍랑에도 안전한 바다 밭이다. 상조도 초입의 갯벌은 온통 진질 밭이다. 김양식장의 염산 사용으로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해초 잘피를 섬 지방에서는 진질이라 한다. 미역이나 톳처럼 양식하는 해초는 아니지만 저 진질 밭이 있어야 물고기도 터를 잡고 살 수 있다. 내륙의 산에 숲이 있어야 동물들이 살 수 있는 것처럼. 환경 오염의 지표로 삼는 깃대종이다.

섬사람들은 저 진질을 뜯어다 썩혀서 농사짓는 거름으로 썼다. 어떤 퇴비보다 양분이 많았다. 진질 밭에 살던 장어는 얼마나 맛있었던가. 진질 밭 근처 바위에는 파래도 풍성하게 자라고 있다. 바다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물이 빠진 갯벌에서는 주전자를 든 노인이 낙지를 판다.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노인은 뻘밭에서 낙지를 건저 올린다.

조도에는 산두벼가 심겨진 밭이 유난히 많다. 찰기는 떨어지지만 섬 노인들에게는 소중한 식량이다. 곳곳의 밭에서 콩과 참깨, 벼들이 나란히 자란다. 섬사람들에게는 뭍이나 바다나 뻘이나 어느 것 하나 버릴 데 없이 소중한 농토다.

▲섬들도 하나의 생명체다. 진도 세방마을 앞바다 사자섬(광대도)Ⓒ섬학교

섬등포

지금은 하조도 어류포항이 종점이지만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진도 팽목항에서 출항한 배가 이곳까지도 왔었다. 물론 아직도 상조도 섬등포를 종점으로 삼은 여객선이 있기는 하지만 드나드는 여객은 많지 않다. 신해7호. 작은 섬들만을 돌고 돌아다니는 이 배는 하루는 목포에서 섬등포, 또 하루는 섬등포에서 목포, 사이를 오고 간다. 신해7호는 그 항로에 자리한 외딴섬들에서 육지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다. 항로의 중간에는 무려 23개의 섬이 있다. 매번 다 들를 수 없어서 타고 내리는 손님이 있는 섬들만 기항한다. 그래도 섬등포에서 목포까지는 8시간 이상이 걸리는 기나긴 항로다. 오늘 목포에서 들어온 여객선은 섬등포에 정박해 있다. 선원들은 배에서 밤을 새고 내일 아침 일찍 출항할 것이다.

섬등포는 오랫동안 꽃게 파시로 흥청이던 포구였다. 지금은 진도 서망항으로 위판장이 옮겨가면서 한적한 포구가 되었지만 하조도와 라배도 등의 섬들로 둘러쌓인 천연의 항이라 바람 불면 많은 배들이 피항을 온다. 노인 한 분이 부둣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무엇 좀 잡으셨어요?"
"암 것도 안 물어. 녹조가 들어서."
"그래도 여기가 바람은 좋네요."
"시원하께 여기 앉아있지."
노인은 거동이 불편해 보인다. 말씀도 어눌하다.
"오토바이 타고 가다 6미터 되는데서 떨어졌어. 뇌수술을 받았어."

노인은 섬등포에 꽃게 파시가 서던 시절 꽃게배도 부리고 꽃게를 잡아 기르던 축양장도 하고, 다방까지 해서 제법 큰 돈을 벌었다. 섬등포에만 35년째 살아온 꽃게 파시의 산증인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꽃게철이면 섬등포에는 파시가 섰다. 색시집, 다방, 식당, 철공소, 석유집, 침놓는 집까지 있었다. 파시 때면 인천, 여수, 통영 등 전국 각지 200여 척의 꽃게배들이 몰려와 북적거렸다. 그때는 앞바다에 무역선도 떴다. 여수 금창, 충무 금창 등 수출 회사의 배들이 와서 꽃게를 수집해 일본으로 수출했다. 이재에 밝은 사람들은 해변에 축양장을 만들기도 했다. 꽃게를 팔지 않고 살려 두었다가 값이 올라갔을 때 출하했다. 어느 해나 크리스마스 대목에 꽃게 값이 가장 비쌌다.

"그 때는 여기 있는 우체국이 쬐깐 했어도 진도군에서 돈이 젤로 많이 들어간다 했어. 갈쿠로 돈을 긁는다 했지."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꽃게잡이 배 선원들과 상인들로 포구가 미어터졌다. 그런 날은 색시집과 다방이 호황을 누렸다. 색시집이 네 집, 다방이 네 집이 있었는데 색시집 하나에 아가씨가 열댓 명씩 됐다. 다방 레지도 한 집에 너덧 명씩 있었으니 작은 포구에 술을 파는 아가씨들만 칠십 명이 넘었다. 일시에 선원들이 많이 몰리다보니 사고도 잦았다.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기도 했다. 술 취한 채 산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다 그대로 잠이 들면 불이 나고 그렇게 타죽은 선원도 여럿 됐다. 10여 년 전 위판장이 진도 서망으로 옮겨가면서 어선들도 떠나고 장사꾼들도 떠나면서 섬등포는 적막하고 쓸쓸한 어촌이 됐다.

두 달 전에 아내를 잃은 노인은 서울의 아들집에 가서 잠깐 살았지만 너무 답답해서 다시 조도로 내려왔다.
"서울에 아들이 다섯이나 있어. 서울은 너무 깝깝해. 아들들이 있으라 붙들었지만 나 어지간히 밥해 묵을 수 있응께 용돈이나 달달이 보내라 일르고 내려와버렸소."
노인은 혼자 몸으로 밥을 끓여 먹을 수 있는 한 여기에 살 생각이다.
"여가 있으면 좋아라우, 세상 편하제"

다리 건너 다시 어류포항으로 왔다. 조도페리호는 떠나고 섬사랑호는 들어오고, 섬은 어느 때보다 만남과 이별이 많다. 고향을 찾아왔던 자식들이 떠나고 나면 노인들은 다시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얼굴 보는 손자, 손녀들이 그립고 또 그립다. 모든 것을 다 내주고도 늘 부족해서 미안하기만 하다. 아이들이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 마음을 알기나 할까. 그렇게 고독한 섬의 세월이 간다.

섬학교 제59강 <진도> <조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5월 5일(금) 조도
밤 00:30 서울 출발(00시 2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9강 여는 모임
-진도 도착
-아침식사(섬밥상)
-팽목항 출항
-하조도 창유 도착
-하조도 걷기(하조도 돈대산 트레킹(3시간))
하조도 산행마을-손가락바위-돈대봉정상-유토마을(3.4km)
-점심식사(우럭지리)
-신전리 숙소 휴식
-상조도 도리산전망대 탐방
-섬등포 마을 탐방
-저녁식사(섬백반)
-숙소 도착. 뒤풀이(전복찜과 막걸리)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5월 6일(토) 진도
06:00 기상. 아침 산책
-아침식사(섬밥상)
-하조도등대 탐방
-하조도 출항
-팽목항 도착
-점심식사(진도읍. 간재미 무침과 탕)
-향토문화회관 토요민속공연
-운림산방 탐방
-세방낙조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선회정식)
-숙소 도착 및 취침(다인실)

5월 7일(일)
06: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꽃게탕)
-남도석성 탐방
-진도읍 조금시장 오일장 탐방 및 시장에서 각자 자유식
12:30 서울 향발. 제59강 마무리모임

▲5월의 섬학교 <진도> <조도> 답사지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접이식 우산),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미지참시 승선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진도 향토문화회관 토요민속공연Ⓒ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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