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전 총장은 여성과 동성애자 등 성적 소수자 인권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진보적인 시각을 보였지만, 막상 전통적인 인권 분야에서는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 자국 정부로부터 탄압받는 이들의 권리, 특히 정치사회적 기본권에 대해 반 전 총장은 강력한 '옹호자'가 돼 주지 못했다.
예를 들어, 반 전 총장에게 상처가 될 이름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류샤오보, 아웅산 수치, 달라이 라마, 줄리언 어산지, 브래들리 매닝.
반 전 총장은 2010년 10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중국의 반체제 작가 류샤오보(劉曉波)가 선정되자, 아무 축하 메시지도 발표하지 않았다. 매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행보였다. 특히 그는 그해 11월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주석과 회담을 했지만, 가택연금 중이던 류샤오보를 풀어주라는 말은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이는 언론들에 의해 두고두고 비판의 소재가 됐다. <포린폴리시>는 "당시 반기문은 재선을 위해 중국의 지지가 필요했던 시기였다"고 비꼬았다.
아웅산 수치에 대해 말하자면, 반 전 총장은 임기 내내 버마 상황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성명을 냈고, 아웅산 수치의 정치 참여가 이뤄지는 등 버마 민주화가 실제로 성과를 이룬 것도 그의 임기 내에 있었던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은 유엔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2015년 총선에서 수치가 이끈 민족민주동맹(NLD)을 다수당으로 만든 버마 유권자들의 승리라고 평가하는 게 더 무리 없는 해석일 것이다.
특히 반 전 총장이 2009년 7월 버마를 방문했을 때 아웅산 수치 면담을 요구해 놓고도 당시 미얀마 군사정부가 '수치는 지금 재판 중'이라며 불허하자 그냥 돌아온 것도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다. 모나 율 전 유엔 주재 노르웨이 대사는, 아웅산 수치 가택연금에 대해 반 전 총장을 "수동적인 옵저버(관찰자)"라고 비난하는 내용의 메모를 자국 정부에 보냈다가 이 메모가 언론에 유출되기도 했다.
반 전 총장은 3년 후인 2012년 다시 버마를 찾아 결국 수치를 면담했고, 2015년 총선에서 수치가 이끈 민족민주동맹(NLD)이 승리를 거두자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미얀마가 지금까지의 민주화를 이루는 데 있어, 유엔이 기여한 게 정확히 뭐였는지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이브라힘 감바리 특사를 파견하거나 반 전 총장이 직접 미얀마 군사정부 지도자들을 만나 민주화를 촉구하는 등의 노력을 하기는 했지만, 이는 좋게 말하자면 '점진적 해법'이었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는 비판도 들을 법하다.
달라이 라마, 줄리언 어산지, 브래들리 매닝에 대해서는, 마치 <가디언>의 공격을 되치기라도 하듯 오히려 반 전 총장이 이들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invisible men)'처럼 취급했다. 10년 임기 동안 이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투명인간, 또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어둠의 마왕처럼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2009년 7월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반 전 총장에게 '나바네템 필레이 인권 고위대표가 달라이 라마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는데, 이게 인권에 대한 유엔의 입장이냐'고 따져 물은 적이 있었다. 반 전 총장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 이슈를 체크해 보겠다." 그러나 이후에도 달라이 라마에 대한 그의 후속 언급은 없었다.
어산지에 대해서는 기자들의 질문이 있었을 때 유엔 대변인이 "전에 우리가 낸 성명을 참조해 달라"는 식으로만 언급하고, 또 유엔 실무기구(워킹 그룹)에서 어산지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관련해 몇 번 성명을 냈을 뿐 반 전 총장 본인은 그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다.
2011년 봄, 브래들리 매닝에 대한 고문 의혹이 일면서, 유엔의 조사단이 수감 중인 매닝의 면회를 요청했다가 미국 정부로부터 거부당하는 일이 있었다. 한 기자는 유엔 대변인에게 '반기문 사무총장이 미국 정부에 면담 허용을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유엔 대변인의 답은 이랬다. "조사위원은 독립적 전문기구이고, 그들의 특정 활동에 대해 우리가 코멘트하거나 특정한 입장을 제시하지 않겠다." 2012년 3월, 유엔 특별조사관인 후안 멘데즈는 '미국 정부가 매닝에게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처사를 했다'고 공식 비난했지만, 그냥 그게 다였다.
아동 인권에 대해 반 전 총장은 임기 10년 동안 여러 기여를 했지만, 불행히도 아동 인권 이슈와 관련해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일은 '블랙리스트 파문'이다. 2016년 6월, 예멘 내전에 개입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 연합군은 '아동 인권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가 1주일만에 빠졌다. 반 전 총장은 사우디가 빠진 이유에 대해 '사우디의 압력 때문'이라며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것 중 가장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솔직히 밝혔다.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의 공과(功過)' 시리즈로 이어집니다. (☞시리즈 목록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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