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개혁.' 박근혜 정부가 집권 후반기 최우선 과제로 추진하는 내용이다. 8월 6일 대통령 담화문에도 맨 첫머리에 등장한다. 청년 고용 절벽을 해소하자! 좋다, 이 주장을 반대할 이가 과연 어디 있을까. 그런데 왜 그 방식이 취업 규칙·일반 해고 가이드라인 도입이어야 하는가? 게다가 그 근거로 사용되는 각종 수치와 논리도 매우 의심스럽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고 했던가.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는 디테일 속에 숨은 악마를 추적해 보기로 했다.
디테일에 숨어 있는 악마를 찾아라!
법이 개정되면 바뀐 조항이 언제부터 효력을 발생하는지, 그리고 시행할 때에 쟁점이 될 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부칙을 달아 명시하게 된다. 그렇다면 아래 근로기준법 부칙은 언제 어떤 조항을 개정하면서 만든 것일까?
▲ 근로기준법 부칙 제4조 (임금보전 및 단체협약의 변경 등)
① 사용자는 이 법 시행으로 인하여 기존의 임금수준 및 시간당 통상임금이 저하되지 아니하도록 하여야 한다.
② 근로자·노동조합 및 사용자는 이 법 시행과 관련하여 단체협약 유효기간의 만료 여부를 불문하고 가능한 빠른 시일 이내에 단체협약, 취업규칙 등에 임금보전방안 및 이 법 개정사항이 반영되도록 하여야 한다.
③ 제1항 및 제2항을 적용함에 있어 임금항목 또는 임금 조정방법은 단체협약, 취업규칙 등을 통하여 근로자·노동조합 및 사용자가 자율적으로 정한다.
흠…. 이 법의 개정으로 임금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빠른 시일 내에 노사 간 단체협약이나 노사협의를 통해 조정하라고 하는 내용이 핵심인 것 같다. 그렇다면 요즘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임금 피크제 문제, 즉 정년연장 관련 법 개정에 대한 부칙일까?
2003년과 2013년
땡~! 틀렸다. 이 부칙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그러니까 올해와 같은 양의 해인 2003년 9월 15일에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근로기준법의 어떤 조항이 개정되었을까? 노무현 정부 집권 1년 차인 그해, 종전까지 주 44시간이던 법정 노동시간을 주 40시간으로 단축하는 법 개정이 이뤄졌다.
법정 노동시간이 단축되었는데 왜 임금보전·임금조정 관련 노사협의를 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을 부칙에 포함시켰을까? 그건 순전히 '토요일' 때문이다. 보통 주 44시간이라면 평일 8시간에다 토요일 4시간을 일하는 시스템이다. 토요일 4시간을 일하지만 8시간 임금을 지급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주 40시간으로 변경되면서 토요일 4시간은 일하지 않게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토요일 임금은 어떻게 되는 걸까? 본래 '노동시간 단축'의 의미를 살리려면 그냥 토요일 4시간 노동을 줄여주는 대신 8시간 임금을 모두 보장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2003년 근로기준법 개정은 이 문제를 그냥 '노사 자율교섭'의 영역으로 넘겨버렸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은 당연히 단체 교섭이 새롭게 시작되었고, 자본 측은 '토요일 무급'을 주장하면서 쟁점이 형성되었다. 그 때문에 일부 사업장에서는 힘에 밀려 토요일 무급이 관철되기도 했지만, 조직력을 갖춘 사업장에서는 토요일 8시간 유급을 관철한 바 있다. 하지만 반대로 노동조합이 없는 사업장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토요일 무급'이 시행되고 말았다. 노동시간은 4시간 줄었지만 임금은 8시간이 줄어들고 만 것이다.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2013년 5월 22일,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는 법률 개정이 이뤄진다. 그런데 이건 근로기준법을 개정한 게 아니라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으로 나타났다. 당시 개정으로 신설된 조항 19조의2는 이렇게 되어 있다.
▲ 고령자고용촉진법 제19조의2 (정년연장에 따른 임금체계 개편 등)
① 제19조 제1항에 따라 정년을 연장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의 사업주와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를 말한다)은 그 사업 또는 사업장의 여건에 따라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② 고용노동부 장관은 제1항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한 사업 또는 사업장의 사업주나 근로자에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고용지원금 등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
③ 고용노동부 장관은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연장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의 사업주 또는 근로자에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임금체계 개편 등을 위한 컨설팅 등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
임금 보전과 임금 체계 개편, 뭐가 더 구체적일까?
정부와 새누리당은 위 조항을 근거로 사실상 '임금피크제'를 의무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 조항의 어디를 들여다봐도 임금피크제나 임금 삭감 얘기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사업 또는 사업장의 여건에 따라 임금체계 개편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는 추상적인 말뿐이다.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추상적인 문구에 비해 2003년 근로기준법 개정에 따른 부칙 조항은 훨씬 구체적이다. 아예 "임금보전방안 및 이 법 개정사항이 반영되도록" 노사협의를 의무화해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임금보전'이란 말은 당연히 법 개정에 따라 토요일이 무급이 될지도 모르니 이 부분을 보전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라는 뜻이다.
심지어 부칙 4조의 1항에서는 "기존의 임금수준 및 시간당 통상임금이 저하되지 아니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못을 박아놓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 임금 삭감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데, 과연 당시에 정부나 여·야는 이런 부칙 조항을 실현시키기 위해 도대체 무슨 일을 했던가? 자본가들이 토요일 무급을 관철시키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지 않았던가!
그래놓고 올해 노사정 야합이 벌어진 것을 두고서는 "노동조합이 조직 노동자만이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도 대변해야 한다"며 훈수를 두고 앉아 있다. 그런 얘기를 쏟아내기 전에 미조직 노동자들이 2003년 토요일 임금을 강탈당할 때 당신들은 뭐 하고 있었는지부터 공개해 보시라.
'자본의 이익'이라는 기준을 들이대야만 말이 되는 이율배반
2003년 근로기준법 개정 당시의 여당은 민주당, 즉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 세력이었다. 2013년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과 이번 노사정 야합에서의 여당은 새누리당이다. 사실상 2개의 정당 모두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2003년 근로기준법 개정 당시 미조직 노동자들의 임금 보전을 명시한 부칙을 만들어 놓고도, 아무도 이 조항을 근거로 자본 측에게 임금을 보전하라고 촉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3년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과 최근 노사정 야합 국면에서는 '임금체계 개편'이라는 추상적인 문구를 놓고 이게 임금피크제를 명시한 것이라고 우겨댄다.
훨씬 구체적이고 분명한 표현이 있었던 2003년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추상적인 문구가 담긴 2013년 개정 내용에 대해서는 난리법석을 피운다. 이 기막힌 이율배반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어떤 게 자본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가.' 새누리당이건 새정치민주연합이건 모두 이 잣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말이다.
더 악랄해지는 수법
노사정 야합 이후 새누리당이 입법 발의한 내용 중에는 노동시간에 대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포함되어 있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1주일은 5일(월~금)이다"라고 억지를 부려왔으나, 대법원이 "1주일은 7일(월~일)이다"라는 상식을 회복(!)해주는 판결을 내리면서 자본가들이 난리를 벌인 탓이다.
근로기준법은 주 40시간제에다 연장근로 한도가 12시간으로 정해져 있으므로 1주일에 아무리 많아도 52시간 이상 노동을 시킬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노동부는 이게 월~금, 5일을 기준으로 하는 거라고 30년 동안 우겨왔다. 그러니까 평일을 기준으로 52시간을 초과하면 안 되는 것일 뿐, 휴일노동은 하루 8시간씩 시켜도 되니까 총 68시간 노동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이 상식을 회복해주자 이제 아예 근로기준법을 바꾸려는 것이다. 1주일은 7일을 기준으로 계산하되, 52시간 한도가 아니라 여기에 8시간을 초과해서 60시간까지 가능하도록 법을 개악시키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2003년 주 40시간제 근로기준법 개정 관련 부칙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것일까? 아예 휴일에 근무할 경우 가산임금을 50%로 삭감하는 개악 안도 같이 내놓았다. 일반적으로 노동자에게 휴일 근무를 시킨다는 것은, 대부분 주 40시간을 초과해서 일을 시키는 경우이므로 '연장근로'에 해당하여 50% 가산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휴일 근무에 대해서도 50% 가산임금이 적용되므로 본래 100%(50%+50%) 중복할증을 적용하는 것이 옳다. 대법원 역시 동일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러니 휴일 근무에 대한 가산임금 논란이 될까 봐 아예 근로기준법에 가산임금 삭감을 명시하려는 것이다. 이 내용은 노사정 야합에도 없는 항목으로, 그야말로 악랄한 수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새누리당이 지난달 16일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중 근로시간 관련 변경 내용
① 휴일근로를 연장근로에 포함하되, 기업규모별로 4단계 시행, 노사합의 시 휴일에 한해 1주 8시간까지 특별연장근로 허용(~'23년)
② 휴일근로 시 가산수당은 8시간 이내는 50%, 8시간 초과 시 100%로 명시(현행 행정해석 기준)
어떻게 맞설 것인가?
정부·여당이 이 정도로 밀어붙인다는 것은, 1996년처럼 연말에 날치기를 해서라도 노동법 개악을 강행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충분히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태세 또한 달라야 한다. "국회 선진화법이 있으니 어쩌진 못할 거야"라는 안이한 생각을 갖고 있다간 뒤통수를 맞을 상황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노동법 개악에 여야가 따로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특히 이번 공세는 조직된 노동자들, 특히 대기업 사업장을 먹잇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 사업장은 단체협약이 있으니 걱정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다가 발레오만도, 유성기업, KEC, 만도 등의 중견사업장들에 줄줄이 파상 공세가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제 바야흐로 현대차, 기아차, 철도 등 대규모 사업장에 임금 피크제 시행, 성과연봉제(성과 차등임금제) 공격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다. '노동개혁 = 청년 일자리'라는 프레임으로 저들이 실제 노리는 것은, 대규모 사업장에 조직되어 있는 민주노조 파괴이다.
이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를 떠나 96~97 총파업에 버금가는 투쟁을 결의하는 것부터 출발해도 거기에 그쳐서는 막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기만적이긴 하지만 저들이 공세를 취하는 대목, 즉 미조직노동자의 이해관계까지 함께 들고 나갈 때만 전체 노동자를 단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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