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성동구 성수1가 2동 가운데서도 도심 속 녹지 공원인 서울숲과 맞닿은 골목. 층높이가 낮은 옛 건물들이 다수를 이뤄 시각적 편안함을 제공하는 이곳 주택가 골목이 최근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소규모 기업인 소셜 벤처(Social Venture)나 사회적 기업이 속속들이 사무실을 낸 것이다.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은 건 지난 2012년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다. 이 지역은 서울숲과 접해 있고 도심과도 가까웠으며 임대료도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2013년에는 서울숲 조성에 큰 역할을 한 비영리단체 서울그린트러스트도 이사를 오며 변화의 신호탄을 올렸다.
최근 가속화를 부추긴 건 '서울숲 프로젝트'를 추진한 사단법인 루트임팩트. 사회적기업과 사회혁신가를 지원하는 루트임팩트는 창업가들에게 사무공간과 주거공간 등을 제공하고 이들을 한곳에 모아 협업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했다. 그렇게 하나 둘 모여든 기업이나 단체가 현재 20여 개가 넘는다.
사회를 좀 더 지속가능하고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모인 사람들. 그들이 끌고 올 혁신적인 변화가 자못 기다려지지 않는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급한 마음에 성수동을 찾아 마리몬드, 소녀방앗간, 에코준컴퍼니를 만나봤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동반자 마리몬드
지난 1월 걸그룹 '미쓰에이' 멤버인 수지의 휴대전화 케이스가 이슈된 적 있다. 꽃을 눌러 제작한 압화 작품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디자인의 원작자는 다름 아닌 위안부 피해 할머니. 제작사는 제품에서 나온 수익을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기부한다고 했다. 실제 지난해까지 2년간 누적매출인 7억 원 가운데, 1억 원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기부했다. 영업이익의 거의 전부에 가까웠다. 그 회사가 바로 '마리몬드'다.
마리몬드는 나비를 뜻하는 라틴어 '마리포사(Mariposa)'와 새로운 생명과 부활, 회복의 메시지를 담은 고흐의 그림 '꽃 피는 아몬드 나무'의 '아몬드(Almond)'가 만나 탄생한 이름이다. 나비가 내려앉음으로 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디자인 제품과 콘텐츠로 존귀함의 회복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동반자가 바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다. "다들 못다 핀 꽃으로만 위안부 할머니들을 규정하는 게 안타까웠다. 못다 핀 꽃이 있다 하더라도 나비가 날아와 앉으면 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홍조 대표(29세)는 마리몬드를 통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존귀함을 회복해 드리고 싶다.
최근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규모도 커졌다. 작년 전체 매출을 올 1분기에 이미 달성하기도 했다. 그래도 변한 건 없다. 꾸준히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제품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할 뿐이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도 2013년 봄부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모두 참여하고 있다. "사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마리몬드의 활동을 잘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손자 같은 애들이라며 어여삐 여겨 주시니 늘 감사하다." 윤 대표는 수요집회 참여가 동기부여도 되고 직원들이 바깥바람을 쐬는 기회도 된다며 웃는다.
2010년 세상을 떠난, 수지의 휴대전화 케이스 디자인의 원작자 심달연 할머니는 "꽃으로 작품 만드는 것도 좋고, 그런 걸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보고 하는 게 좋다"라고 생전에 말씀하셨다. 비록 이제 작품을 직접 공유하시지는 못하지만, 오늘도 생활과 밀접한 마리몬드의 제품들을 통해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고 있다. 휴대전화 케이스부터 티셔츠, 에코백, 텀블러, 플래너 등 선택 영역도 다양하다.
제품구매 마리몬드 홈페이지(http://www.marymond.kr/)
청정 시골 재료로 요리하는 소녀방앗간
주의하시라! 이름은 '소녀방앗간'이지만, 소녀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방앗간은 더욱 아니다. 이곳은 경북 청송지역을 중심으로 현지에서 올라온 신선한 식재료를 이용해 건강한 밥상을 제공하는 밥집이다. 일반 밥집과 다른 점이라면 나물 등 식재료를 현지 생산자로부터 직접 조달할 뿐만 아니라 판매도 하며, 나아가 식당 운영의 궁극적 목표를 생산자들의 생활 안정과 지속가능한 생산활동 추구에 둔다는 점이다. 생산자 가운데서도 주목하는 건 시골의 할머니들이다.
소녀방앗간이란 이름 속 소녀는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의 설레는 마음과 함께 생산자인 할머니들의 순수함을 그린 표현이다. 방앗간은 옛날 방앗간이 참깨처럼 원재료도 팔지만, 그 참깨를 짜낸 참기름도 팔듯이 재료와 함께 요리도 판다는 의미에서 지었다.
처음에는 상품판매와 식재료 조달 정도만 생각했었는데, 이제 식당에서 필요한 김치 같은 것도 현지 할머니들이 담근다. 꽃다운 나이 스물다섯, 소녀방앗간의 진짜 소녀 김민영 대표는 "우리에게는 김치 담그는 게 엄청 어려운 일인데, 할머니들은 쓱쓱 잘하신다. 할머니들의 전문성도 인정해 드리고 그게 저희에겐 큰 가치가 되니까 할머니들도 '이렇게 힘든 걸 또 왜 시켜'라고 하시면서도 엄청 열심히 잘해주신다"라며 배시시 웃는다.
이렇게 할머니들과 청년들의 정성으로 완성되는 건강한 밥상. 처음에는 웰빙에 관심이 많은 20~30대 여성이 많이 찾았으나 최근에는 다양한 연령층이 이용하고 있다. 그래도 장사가 쉽지만은 않을 터, 어려운 날도 많지만 큰 힘이 되는 건 만족해 주시는 고객의 한마디다. "지난번에는 어떤 어머님 아이와 함께 오시더니 '우리 아이 첫 된장이었다'라고 말씀해 주셔서 가슴이 뭉클했다." 이렇게 응원해 주시는 고객들과 생산지 할머니들을 위해서 초심을 잃지 않고 더욱 단단해지겠다고 다짐하는 김 대표다.
평일 오후 4시를 전후로 가게에서 진행된 인터뷰 중간 중간에도 손님들이 찾아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쉬는 시간이라 발길을 돌려야 했다. 소녀방앗간은 점심 오전 11시~오후 3시, 저녁은 오후 5시~오후 9시까지 제공된다. 메뉴는 산나물비빔밥을 기본으로 요일에 따라 제육볶음, 시골 된장찌개, 명란 비빔밥 등이 있다.
위치: 서울시 성동구 왕십리로 5길 9-16 1층 (성수1가2동 주민센터 뒤편) / 02-6268-0778
그린디자인 제품 개발하는 에코준컴퍼니
에코준컴퍼니는 국내 1호 그린디자이너 윤호섭 국민대 교수의 제자인 이준서 대표(38세)가 세운 회사다. 이 대표는 3년간 연구조교 생활을 하다가 디자이너로서 더욱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에코준컴퍼니'를 설립했다.
처음 선보인 제품은 커피 전문점에서 제공하는 테이크아웃 종이컵 모양의 '오리지널 그린 컵'. 옥수수 전분을 소재로 한 친환경 생분해 플라스틱으로 제작한 이 컵은 티백 음료를 마실 때 티백이 컵 안으로 빠지지 않도록 V홈을 낸 것이 특징이다. 이 대표는 오리지널 그린 컵으로 세계 3대 디자인상을 모두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일회용 종이컵 쓰지 말고 휴대용 컵을 갖고 다니라는 캠페인을 많이 한다. 그런데 안 갖고 다니는 원인이 무얼까, 불편함이 무엇일까 분석을 하고 편리성을 아이디어와 디자인으로 승화시키며 제품을 만들었다." 이 대표는 불편함을 넘어선 소비자들의 자연스러운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많은 고민과 조사를 한다. 단순하면서도 섬세함이 돋보이는 V홈도 그렇게 탄생했다.
이 대표의 그린디자인은 제품 자체의 친환경적 가치에서 끝나지 않는다. 에코준컴퍼니는 오리지널 그린 컵 판매 수익으로 에티오피아 식수 개선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에티오피아 주민들은 친환경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가뭄과 가난을 부추기는 건 바로 우리의 편리성 추구다." 이 대표는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이후 개발한 물병인 '퍼블릭 캡슐'은 기부에 좀 더 관점을 둔 제품이다. 생분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건 기본이고, 캡슐 모양의 디자인은 말라리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한 약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말라리아의 경우 어린이 기준으로 약값 3000원이면 치료할 수 있다. 그게 없어서 아이도 죽고 부모도 슬픔으로 고통 받는다. 퍼블릭 캡슐은 이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나온 제품이다." 알약 모양의 퍼블릭 캡슐이 하나 판매되면 실제 말라리아 치료약이 에티오피아로 기부된다니 신통한 발상이다.
수백 년 동안 썩지 않는 플라스틱 대신 땅에 묻어도 자연 분해되고 아프리카의 식수를 개선할 뿐만 아니라 한 아이의 생명까지 살릴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제품이 어디 있을까?
제품구매: 에코준컴퍼니 홈페이지(http://www.ecojun.com/)
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 바로가기 : <함께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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