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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 버린 이승만, 돌아와서는 사죄 대신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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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 버린 이승만, 돌아와서는 사죄 대신 '학살'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51> 북한군의 '철도복구대'

인민군의 저돌적인 남진과 달리 하늘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북한의 도시는 미(美) 극동 공군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북한의 수도 평양을 비롯해 남포, 해주, 함흥 등 군사적, 산업적 주요 도시는 미 공군의 공습을 전쟁 내내 감수해야 했다. 이런 도시 중에서도 원산은 가장 끔찍한 공격을 받은 도시였다. 원산은 북한 동부 최대의 철도 기지인 원산조차장을 갖고 있는 한국 3대 간선 철도 노선의 중심점이었다. 원산 기관차 공장은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큰 기관차 수리·제작 공장으로 1000명의 노동자들이 근무했다. 또한 한반도 최대의 정유공장을 갖고 있었고 항구에 인접한 조선소에서도 많은 노동자가 배를 만들었다. 이런 조건의 원산은 당연히 미 공군의 가장 중요한 전략 폭격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1950년 7월 6일과 7일, 각각 9대와 11대의 B-29 중폭격기 편대가 원산의 정유공장과 항만시설을 공습했다. 김일성은 바로 다음 날 "미제국주의자들의 무차별 폭격"에 대한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평양의 북한 수뇌부는 손을 쓸 수 없는 공간에서 다가오는 엄청난 무력을 겪고 난 뒤 깊은 좌절감에 빠졌을 것이다.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사위원회 회의에서 미 공군의 철도 및 도로 차단 작전에 대응한 '전시철도복구연대' 조직을 명령했다. 전쟁의 승패가 미 공군이 파괴한 철도 시설 등을 복구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김일성과 북한군 수뇌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미 극동 공군의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미 본토의 제22폭격전대와 제92폭격전대가 7월 13일 오키나와에 전개됐다. 이들 부대의 B-29 폭격기가, 배치된 당일 출동한 곳은 원산이었다. 무려 56대의 폭격기가 동해를 건너 원산의 철도역과 철도차량기지, 항만시설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미 공군이 찍은 폭격 전후의 원산 시가 사진을 보면 복잡한 시가지가 마치 쓰나미에 쓸려간 것처럼 보인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원산은 반복되는 폭격으로 도시의 모습이 사라지고 폐허로 변했다. 포탄으로 만들어진 구덩이들로 달 표면처럼 변한 원산에선 생명체의 온기를 찾을 수 없었다. 원산폭격이 얼마나 심했으면, '원산폭격'이 원산과 관계가 없는 남한의 군부대와 경찰서, 중고등학교에서까지 군기잡기 가혹행위인 "대가리 박기"의 다른 이름으로 수십 년간 차용됐을까.

미 공군의 공습은 북한에 새로운 생활과 문화를 만들어냈다. 주간의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다. 주로 주간에 이루어지는 공습을 피해 밤낮의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바꾸게 된 것이다. 미군에 의해 수거되어 미국립문서보관소가 소장하고 있는, 평양 중앙 우체국 소인이 찍힌 전달되지 못한 편지 속에서도 이런 정황을 알 수 있다.

"오는 중에 택시가 다리에서 굴러서 죽을 것을 죽음은 면하고 다시 떠나오다 적기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큰일 났댔어. 우리 앞에서 가던 차 한 대는 폭격당해서 사람 4명과 차가 박살하고 불이 붙었어. 그것을 본 우리들은 정신없이 뛰었으나 다행히 우리 자동차는 보지 못하였는지 일 없어서 그다음 우리는 밤에만 오기 시작하고 낮에는 쉬었어. 평양에 도착되니 건물들이 형편없었어."

1950년 9월 25일 평양에 도착한 언니가 한 달 후 다시 만나자면서 서울 혜화동의 동생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에는 폭격으로 무너진 평양, 그리고 공습을 피해 밤에만 이동한 사실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전선의 북한군과 주민들은 낮에는 공습을 피해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움직이는 올빼미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북쪽 지역 주민들이 마음 놓고 낮잠을 잘 수 있는 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일기가 안 좋아 비행기 이륙이 불가능한 날은 하늘이 목숨을 하루 연장해주는 날이었다. 장마철은 연휴와도 같았다.

북한군과 주민들이 흐리고 비 오는 날을 고대했다면, 미 공군 덕분에 제공권에 절대적 우위를 가졌던 남한은 그 반대였다.

"오늘도 비행기는 출격하지 못했다. 찌푸린 하늘만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날씨가 계속 이렇다면 큰 낭패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의 일기 한 대목이다. 맑은 날이면 하늘이 남한을 돕는 것이고 흐린 날이면 북한을 돕는 셈이었다.

▲원산폭격 당시 미군이 찍은 자료 사진. ⓒ미해군 홈페이지

서울시민 버린 이승만, 돌아와서는 사죄 대신 '학살'

1951년 이후 북한군과 중국군은 사리원 남쪽 전투지역에 60여 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각 사단은 하루 약 40톤의 보급품이 필요했다. 공산군 부대 전체에 하루 2400톤의 보급이 이루어져야만 전쟁 수행이 가능했다. 이런 조건에서 주력으로 쓰인 군용 수송트럭 한 대의 적재량은 2.5톤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 화차 1량의 적재 능력은 20톤에 달했고 10량 정도의 화차를 연결하는 화물열차 1편성을 운용하면 200톤을 수송할 수 있게 된다. 하루 필요 보급품 2400톤은 화차 120량, 즉 화물열차 12편을 조성해서 해결할 수 있는 양이었다. 미군이 북한의 철도망 파괴에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분명했다.

주 보급망인 철도를 두고 미 공군과 북한의 대결은 38선 부근의 영토탈환전인 고지전만큼 격렬했다. 미공군은 1951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른바 질식작전으로 부르는 스트랭글작전(Operation Strangle)과 1952년 3월부터 5월까지 집중폭격작전으로 불린 쌔처레이트작전(Operation Saturate)을 시행했다. 이는 북한의 철도를 차단하기 위한 미공군의 사활을 건 작전이었다(<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343쪽, 김태우, 창비). 이미 2차대전 당시 연합군과 독일은 숨바꼭질하듯 철도에 대한 공습과 복구를 반복하며 싸웠다. 이 같은 일이 한국전쟁 시기에도 벌어졌다.

세계 최강 미 공군의 철도 공습에 맞선 북한의 대응책은 인력이었다. 북한 철도복구대와 동원된 주민이 그 주인공들이다. 김일성이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한 각 정당의 과업을 밝히는 내용에서 천명한 "적기의 폭격으로 철도와 도로가 파괴될 경우 인민들을 동원, 제때에 복구하여 군수품과 후방물자 수송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교시는, 북한 철도 복구 사업의 방침이었다. 북한의 철도복구대원들은 철도노선을 따라 일정한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폭격으로 선로와 노반이 붕괴되면 야음을 틈타 복구에 돌입했다.

▲ 원산의 북한군 수송로를 폭격하는 미군 ⓒ미해군 홈페이지

미 공군 정보보고서는 북한의 철도 복구 양상을 정확히 파악했다.

"적은 그들의 복구 작업에 방대한 인적 자원을 계속 투입했다. 꽤나 정확한 정보에 의하면, 적은 주요 복구 사업을 해질녘에 시작하며, 통상 6~8시간 내에 파괴된 철도 수리를 마친다."

항미원조에 나선 중국군은 1950년 11월 철도노동자들로 구성된 철도원조지원대를 만들어 북한의 철도복구사업에 힘을 보탰다. 철도복구사업에는 포로로 잡힌 국군도 동원되었다. 국군포로 박진홍은 도하작업대에 편성되어 수용소 근처 철교 옆에 설치된 통나무 다리를 통해 강 건너로 화물을 옮겼다. 증언을 들어보자.

"한밤중이 되면 기관차와 화차가 도착했다. 철교는 이미 파괴되어 기차가 통과할 수 없었고, 통나무 다리는 약해서 기관차 등이 통과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수작업만으로 하역작업을 해야 했다. 선로보수차 같은 운반차에 물건을 옮겨 싣고, 대여섯 명이 통나무 다리 위에서 맞은편으로 운반차를 밀고 갔다. 맞은편에 도착하면 다시 대기하고 있던 화차에 옮겨 실었다. 그리고 다시 화차를 약 300미터 떨어진 터널로 운반했다. 우리는 밤에는 일을 하고 낮에는 자면서 매일 이 작업을 반복했다."

미군의 폭격은 북한의 주요 도시와 산업시설을 폐허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철도를 둘러싼 첨단 기술의 미군, 그리고 인력의 북한 싸움에서 승자는 북한이었다. 미군의 집중폭격작전은 그 엄청난 물량 동원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규정되었다. 철도를 유지한 북한은 장기전으로 변한 한국전쟁 기간 내내 한반도 허리에서 공방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낙동강까지 밀렸던 미군과 국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양상을 바꿔버렸다. 9월 28일에는 서울 광화문의 옛 조선총독부 건물 중앙청에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9월 29일 김포비행장에는 맥아더와 이승만이 도착했다. 국회의사당에서 중앙청까지 시가행진에 참여한 이승만은 서울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환영하는 서울 시민들은 공산군 치하에서 빨갛게 물든, 사상이 불순할 가능성이 높은 의심스런 시민들이었다. 거짓말로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 이승만은 서울 도착 후 시민들에게 엎드려 사죄했어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을 되찾은 뒤에 벌어진 일들은 부역자 처단 작업이었다. 친일 부역자 처단에는 그토록 우유부단했던 이승만 정권은 좌익 부역 혐의를 갖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9월 28일부터 강력한 부역자 검거 열풍이 불었다.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부역자에 대한 검거와 심사를 맡았다. 각 시도 경찰국이 부역자에 대한 신고를 유도하는 등 부역자 색출과 검거에 앞장섰다. 이런 부역자 검거 광풍은 곧바로 학살로 이어졌다. 학살은 불법이었고 그런 이유로 무자비했다. 부역 혐의자들은 억류 단계에서 이미 테러에 가까운 폭력적 고문을 받고 수감되었다. 이승만은 군사적 상황과 수형 시설 부족을 이유로 공산주의자와 부역 혐의자들에 대한 재판과 처형을 신속히 집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제적 비난이 빗발치고 여론의 반발이 일어났다. 주미대사 무초가 나서서 이승만의 자중을 요청하는 등 진화에 나서야만 했다. 정의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건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자행되는 집단 학살은 곤혹스런 일이었다.

1950년 12월 세계 언론은 유엔에 보고된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해 보도했다. 세계 언론들은 이승만 정권의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반(反)문명 행위로 고발했다. 이승만에 대한 세계의 평가는, 돌발적이고 예측을 불허하는 독재자에 불과했다. 현재 북한 지도자에 대한 세간의 인식과 다를 바 없었다.

유엔에 보고된 학살 사건은 당시 고양군 홍제리(지금의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에 주둔해 있던 영국군 29여단 캠프 근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1950년 12월 15일, 병사들이 포승줄에 묶인 재소자들을 트럭에서 내려놓고는 무릎을 꿇렸다. 병사들은 마포 형무소 경비대 소속이었다. 39명의 재소자들 뒤에는 폭 1미터, 깊이 1.5미터의 구덩이가 4개 파여 있었다. 경비병은 재소자를 구덩이에 밀어넣은 뒤 소총을 난사했다. 경비병 수가 적었던 탓에 그들은 구덩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총을 쏘아댔다. 묶인 남녀는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김준연 법무장관의 발표에 의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되었지만, 사망자 중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아이 두 명이 있었다고 영국군은 증언했다. 아마도 사살된 어른들의 자식들이었을 것이다.

확인 사살까지 진행된 학살이 끝난 뒤, 경비병들은 흙으로 구덩이를 덮고 옆에 새로운 구덩이를 팠다. 다음 날의 학살을 위한 것이었다. 보다 못한 영국군은, 다음 날 아침 35명의 재소자를 데리고 온 마포 형무소 경비병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빈 구덩이를 메우게 했다. 이어 사건을 유엔에 보고했다.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는 캐나다군 화이트(White) 대령을 파견해 사건조사를 맡겼다. 학살 현장 주변 발굴 조사에서 수백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런 가운데서도 학살은 계속됐다. 마포 형무소는 홍제리 학살터로의 죄수 이송을 중단했지만, 이번에는 육군 헌병이 좌익 혐의를 덮어쓴 죄수들을 데려다 총살형을 집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육군의 사형집행은 주로 경의선이 놓여있는 수색 총살장에서 이루어졌지만 이날 따라 홍제리 학살터가 선택되었다. 유엔 감시단의 시신 발굴 작업이 마무리된 지,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긴급 출동한 영국군이 살육을 중단시켰지만 58명의 사형 집행 대상자 중 이미 20명이 학살된 뒤였다. 영국군 장교가 통역을 구하느라 지체된 시간 동안 죽은 숫자였다. 영국군은 한국군의 사형 집행 과정에 대해 잔인한 전쟁범죄라고 규탄했다. 사형 집행 병사들은 구덩이에 무릎 꿇린 사람들의 뒤통수에 대고 총을 쏘았다. 법률적 심사와 판결에 의한 형 집행이 아니었다. 보복과 응징이라는 적대적 분노의 발산일 뿐이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IS(이슬람 국가)의 참수 행태와 다를 바 없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영국군 29여단장 브로디(T. Brodie) 준장은 자신의 주둔지에서 학살 사건이 재발한다면 한국군과 형무소 경비대에 대한 무력사용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어서 학살 현장에 영국군 중대 병력을 배치해 더 이상의 살육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인민군 치하에 있었던 서울 시민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대통령과 군의 발표만 믿고 있다가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한강 다리가 끊어져 남쪽으로 갈 수 없다는 소문이 퍼져 그나마 뒤늦게 피난을 떠나려 했던 사람들도 주저앉았다. 극히 일부지만, 시민들에게 약속한 서울 사수 국회 결의를 지키겠다며 남은 반공 인사들도 있었다. 이런 마당에 버리고 간 시민들 앞에 뒤늦게 나타난 정부는 사상의 순결을 증명하라고 다그침하고 있었다. 군과 경찰, 반공 청년 단체들이 총부리를 겨누며 적성분자들을 색출해 냈고 곳곳에서 피바람이 불었다.

이런 적반하장식 강압은 인류의 역사 속에 숫하게 반복되어 왔다. 신화에도 나온다. 힌두교 신화 라마야나에서는 왕자 라마가 절세의 미인인 자신의 아내 시타를 납치해간 악마 라바나와 전쟁을 벌인다. 전쟁에서 승리한 라마는 구조한 시타의 순결을 의심하고 이에 실망한 시타는 불길 속에 뛰어든다.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자기 교만에 빠진 행위의 끔찍한 결과를, 이 신화는 보여준다. 조선시대 양반 가문에서도 벌어진 일이었다. 현재 일부 인도, 중동 지역에서도 순결을 잃은 자신의 가족을 죽이는 행위를 명예살인이라 한다. 이 명예살인의 대상은 순결을 강요받는 여성에만 국한된다. 사회적 지위와 계급적 위치, 육체적 능력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존재를 대상으로 도덕과 질서의 이름 아래 야만이 집행되었다. 명예살인의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이 한국전쟁 시기에 벌어졌다. 북한에 점령되었다 남한이 되찾은 모든 지역에서 벌어졌다. 국가적 차원의 명예살인은 힘없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자행됐다. 주인을 자처한 국가의 명령에 순진하게 따른 대가였다.

이승만에게 한국전쟁은 천금 같은 도움이 됐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이승만은 곧 정권을 내놓아야 할 위기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침공은 사면초가의 이승만을 살려놓았다. 전시비상계엄 상황에서 무소불위의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이승만에게, 전쟁은 한 줄기 빛이었다.

한국전쟁이 살려준 것은 이승만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살려준 것이 이승만뿐만은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무부장관 애치슨은 '드디어 미국이 살게 되었다'며 환호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내리막길을 준비하던 미국의 군수산업체와 군부는 전쟁 산업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한국전쟁의 군수 지원기지가 됨으로써 2차세계대전의 상처에 연고를 듬뿍 발라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한가운데로 내몰린 남북한의 평범한 사람들은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 고통은 반세기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한국전쟁이 현대사의 우여곡절 때문에 불가피했다손 치더라도, 1951년 이후의 전쟁은 무의미했다. 휴전회담을 진행하는 상황인데, 38선 언저리에서 일진일퇴의 살육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한 치의 땅이라도 북괴공산도당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거나, 미제의 괴뢰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는 수사는, 그 과정 속에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을 생각하면 허망하기 그지없다.

3년이나 계속됐던 한국전쟁은 동북아의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판문점에 협상테이블이 마련된 후 우여곡절 끝에 타결된 휴전은, 대박을 노리며 판돈을 건 도박자들이 빈털터리가 되었다가 겨우 본전을 건졌다고 자위하는 꼴로 마무리되었다. 전쟁을 잠시 중단하자는 정전협상은 불안정을 일상적인 체제로 두자는 것이었다. 이후 고착화된 남과 북, 동아시아의 긴장과 갈등 상태는 판문점체제가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냉전의 최전선이 되어버린 휴전선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상징적인 국경선이었다. 무장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의 비무장지대는 군사력이 세계에서 가장 집중된 곳이 되었다. 이 휴전선 북쪽의 북한과 중국은 미국에 의한 정치적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남한은 적절한 무장력을 확보해 북한과의 군사적 균형을 갖춰야 했다. 일본의 재무장과 경제 재건 역시 판문점체제의 유산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전개된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은 실패로 끝났다. 실패의 책임은 당연히 최고 통치자였던 김일성이 져야 했다. 그러나 민족의 태양급으로 절대화된 통치자는 무오류의 신이 되었다. 희생양이 필요했다. 항일운동을 했던 수많은 혁명 동지들을 엉뚱한 혐의를 씌워 숙청했다. 스탈린이 남긴 유산의 상속자는 김일성이었다. 북한이 이상한 전제적 독재 왕국으로 진화하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중국은 경제 건설과 문화대혁명으로, 소련은 모든 분야에 대한 미국과의 경쟁으로 정신이 없었다. 남한과 미국은 북한의 몰락을 추구하는 적대세력이었다. 이런 사정은 북한의 고립을 더욱 재촉했다.

남한에서도 합리적 이성은 실종됐다. 크고 작은 권력은 부패한 자들이 나눠먹는 전리품이 됐다. 최고권력 아래로 피라미드처럼 단계를 이루어 이권을 나눠가졌다. 재벌과 언론, 학계를 망라한 카르텔이 남한의 독재체제를 튼튼하게 받쳤다. 이런 남한을 지배한 것은 반공이었다. 각종 협회나 단체는 반공을 맨 앞에 내세워야 했다. 그래야만 말단 행정기관에서 분배하는 떡고물인 보조금이나 지원금을 챙길 수 있었다. 반대파에 대한 공격은, 상대의 등에서 식은땀이 나도록 하는 "빨갱이" 한마디로 충분했다.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체제에서 모든 것을 무력화시키는 조커 역시 반공이라는 카드였다. 반공이 강조될수록 시민들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피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도 군국주의를 벗어던질 수 있는 기회가 사라졌다. 1945년 패망 이후 전쟁의 광기를 지워야 했던 일본에게 가장 중요한 처방은 민주주의였다. 그냥 뭉뚱그려진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과거 전쟁으로 돌진했던 사회 체제를 바꿀 수 있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필요했다. 군부를 통제하고 권력을 심판할 수 있는 시민권이 확장된 체제, 노동조합과 노동권,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자본의 전횡이 공공적 질서에 의해 제어될 수 있는 그런 사회로 나아가야 했다. 그래야 주변국과 세계에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진정한 사죄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물꼬를 바꿨다. 미군정체제 아래서 민주주의를 이식받던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의 동북아 질서를 지키는 포스트가 됐다. 일본의 실질적 민주화는 중단되었다.

미군정청의 일본 점령 초기 정책은 분명했다. 일본이 두 번 다시 미국의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본의 군사적 능력을 제거하고, 태평양전쟁에 대한 징벌적인 행위를 관철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런 미국의 방침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공산주의 확산의 방파제로 삼기 위해 미국은 일본의 역할을 재조정했다.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게 하고, 군사력을 강화시켜 미국의 안전 보장에 기여하도록 육성하는 것, 그것이 미국이 제시한 일본의 나아갈 길이었다. 일본이 미국에 절대종속을 유지하면서 자유주의 진영의 행동대원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미국이 원하는 일본이었다.

한국에서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했듯, 일본에서는 전후의 군국주의 유산이 깨끗하게 소멸되지 못했다. 반공이란 이름의 괴물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냉전이란 진창에 처박아버린 결과였다.

몰락한 태평양전쟁의 주역들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쇼와시대의 요괴라 불린 기시 노부스케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5년 9월 11일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갇혀 있던 기시 노부스케는 미·소의 대립이 격화될수록 일본의 태평양전쟁 책임은 잊힐 것이라 생각했다.

"냉전은 스가모에 있던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미·소관계가 악화되기만 하면 처형당하지 않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시 노부스케의 옥중서신에 들어있던 말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예측대로 냉전이 격화되자 전범들에 대한 심판은 힘을 잃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석방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전범과 전범기업은 부활하게 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한국전쟁이 끝나는 해인 1953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1955년 출범한 자민당의 주축 세력이 된다. 결국 1957년 총리가 되는데 이로서 A급 전범으로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자가 전후 일본 최대 권력자가 되는 반전이 일어난다. 이것은 일본육사 출신 만주군 장교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과거사의 실타래가 꼬이는 것을 의미했다.

전쟁이 만들 수밖에 없는 불투명한 여러 가지 것들은, 여름날 습기와 고온 속에 놓인 음식처럼 부패의 푸른 꽃을 피우게 된다. 슬그머니 전쟁 자본과 태평양전쟁의 주범이 복권된다. 자본주의는 속성상 정경유착을 바닥에 깔고 있다. 전쟁은 이런 자본과 권력의 결합을 더욱 촉진시키고, 그들은 더 큰 권력으로 진화한다. 일본이 과거사를 외면하고 평화헌법 무력화 시도를 하는 등, 우경화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전쟁을 만나게 된다. 전쟁통에 특수를 누려 성장한 자본과, 은근슬쩍 사면된 정치세력이 만들어낸 역사의 창조물이, 지금 일본의 자민당과 아베 총리 같은 전쟁 불사 세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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