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원으로 위촉한, 존경해 마지 않는 박원순 시장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것을 기대하고 기대했다."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10일 이렇게 말했다.
이날은 서울시가 당초 인권헌장을 선포하려고 계획했던 세계인권선언의 날이기도 했다. 지난달 28일 표결로 통과된 인권헌장을 서울시가 "인정할 수 없다"고 나오지 않았다면, 안 위원장은 박 시장과 나란히 서, 총 50조에 달하는 인권헌장 선포식을 했을 것이다.
안경환 "분노 누르고 아쉬움 달래며 이 자리에 섰지만 '인권헌장'은 서울시의 귀중한 자산 될 것"
그러나 안경환 위원장이 선 자리는 서울시 청사 밖, 광장이었다. 박 시장 대신 서울시의 인권헌장 폐기에 반발해 온 시민위원 및 전문위원 77명이 안 위원장과 함께 섰다. 이들은 서울시의 인권헌장 폐기에 맞서, 자체 헌장 선포식을 가졌다. 서울시청 안에서는 성소수자단체들이 닷새째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관련 기사 보기 : "박원순 시장, 당신 곁에 지금 누가 있습니까")
안경환 위원장은 "66년 전 유사 이래 인류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약속인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이 축복받은 날 우리는 지금 애써 분노를 누르고 아쉬움을 달래며 이 자리에 모였다"고 말했다.
안 위원장은 "우리가 낭독한 이 헌장이 시대정신으로 자리잡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청사진, 귀중한 자산이 될 날이 올 것"이라며 "나아가 서울시의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 위원장은 이어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일시적 혼란과 시행창오도 보다 나은 세상, 그 누구도 인권의 높낮이가 없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시행착오로 받아들이자"고 덧붙였다.
"마음에 안 든다고 폐기할 것이었다면 왜 만든다고 했나"
안 위원장이 '시행착오'라 표현한 논란은 인권헌장 제1장 제4조에서 시작됐다. "서울시민은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출산, 가족형태·상황, 인종, 피부색, 양심과 사상,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 학력, 병력 등 헌법과 법률이 금지하는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가 그것이다.
이 긴 문장에서 단 한 가지,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이 논란의 핵심이다. 그러나 제정위원회의 통과 과정에서 있었던 진통과 이른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세력'의 물리적 반발, 또 헌장을 거부한 서울시의 이유를 모두 듣고 나서도, 남는 의문은 한 가지다.
박원순 시장은 애초에 왜 인권헌장 제정이라는 일을 시작했을까? 누가 뭐래도 이 문제의 일은 박 시장이 스스로 시작한 일이었다. 150여 명의 시민위원을 선정하기 위해, 참여 신청자를 받고, 인구 표본에 맞춰 시민위원을 뽑고, 그들에게 일일이 위촉장을 준 것도 박 시장 본인이었다.
이날 자체 선포식을 가진 시민위원회가 기자회견문에서 "서울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제멋대로 인권헌장을 폐기할 것이었다면, 도대체 시민위원은 왜 뽑았으며 인권헌장은 왜 만든다고 했냐"고 되물은 까닭이다.
인권중심 '사람'의 소장이기도 한 박래군 전문위원은 "서울시는 당초 지난해 12월 10일, 인권헌장을 선포하려고 했었다"고 말했다. 박 시장이 재선 전부터 인권헌장 제정에 관심이 있었단 얘기다. 그러나 의견수렴 시간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이 작업은 미뤄졌고, 박 시장은 지난 6월 재선에 성공했다.
박래군 전문위원은 "재선 이후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고, 시민참여형으로 헌장을 만들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문위원은 "다른 곳처럼 인권위 차원에서 만들었다면 조용히 이미 제정해 선포하고 끝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도대체 어떤 법률과 정책이 만장일치로 결정되나"
그렇다면 박 시장은 왜 망설이는 것일까? 사실 문제의 시작은 '시민참여형' 그 자체가 아니라 외부의 힘에 있었다. 오히려 제정위원회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찬성표"를 문제의 조항에 던졌다.
시민위원 및 전문위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강남북 토론회에서부터 시작된 '성소수자 혐오세력'의 물리력 동원 이후 서울시의 입장이 이상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지난달 28일 마지막 회의에서는 "서울시 인권담당관이 회의 진행을 방해했고, 심지어 표결로 통과된 이후에 직접 마이크를 잡고 '이 표결은 인정할 수 없으며 통과는 무산된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한 전문위원은 "강남북 토론회와 공청회 즈음에 교회 등 보수세력을 중심으로 서울시에 항의 전화 등 엄청난 압박이 있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결국 "만장일치가 아니라 인정할 수 없다"는 서울시의 입장은 이같은 압박으로 인한 것이었던 셈이다.
이날 자체 선포식을 가진 시민위원회는 "도대체 어떤 정책과 법률이 만장일치로 이뤄지냐"며 "UN이 제정한 세계인권선언도 당사국 모두의 만장일치로 의결되진 않았고, 역사 속에서 인권을 한 걸음 진전시켜온 다양한 법률도 입법 당시에는 다수결을 통해서 제정됐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인권 조항을 '만장일치'로 결정하라는 서울시의 주문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한 명의 반대자라도 있으면 누군가의 인권이 침해되어도 상관없다는 반인권적인 처사이기까지 하다"고 덧붙였다.
"서울시의 인권헌장 선포"를 촉구하고 나선 이날 기자회견에는 150명의 시민위원 가운데 48명, 30명의 전문위원 가운데 29명이 이름을 올렸다. 시민위원 관계자는 "전체 연락처는 서울시만 가지고 있어, 연락이 되는 시민위원을 중심으로 참여자를 추렸다"고 설명했다.
한편,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날 오후 5시 20분부터 청사 1층에서 농성 중인 농성단과 면담을 갖고 있다. 지난 1일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 이후, 이 문제와 관련해 침묵을 지켜왔던 박 시장이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관심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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