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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생들은 왜 '미장원·화장 자제'를 결의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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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대생들은 왜 '미장원·화장 자제'를 결의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7> 한일협정, 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1964년 들어 한일 회담에 속도가 붙는다.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설이 널리 퍼질 정도였다.

서중석 : 그해에 들어가면서 한일 회담은 급진전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국이 이 무렵부터 베트남 문제에 적극 개입하고, 1964년에는 프랑스와 중국의 수교 같은 일도 생겼다. 그러면서 로버트 케네디 미국 법무부 장관이 1964년 1월 17일 도쿄에서 이케다 하야토 총리와 만난 후 18일 한국에 온다. 1월 29일에는 딘 러스크 미국 국무부 장관이 한국에 와서 한미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2월 28일에는 딘 러스크 국무부 장관이 주미 일본 대사를 불러 한일 회담 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날 딘 러스크 국무부 장관은 주미 한국 대사도 불렀다. 두 나라 대사에게 전한 미국의 핵심 메시지는 한일 회담을 조기에 타결하라는 것이었다. <편집자>) 한마디로 1964년에 들어오면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미국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강력하게 촉구하게 된다.

한국도 1963년 12월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한일 회담에 속도를 낸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 발전 문제에 제일 신경을 썼기 때문에 그랬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면서 1964년 3월에 한일 회담이 열리게 되는데, 박 대통령은 한일 회담 타결과 관련해 김종필을 다시 일본에 보낸다. 김종필은 3월 11일 김포공항을 떠나 대만과 베트남을 거쳐 20일 도쿄로 간다.

이렇게 한일 회담이 급진전할 기세를 보이자 반대 세력들의 움직임도 바로 나타나게 된다. 3월 9일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가 결성된다. 야당과 재야 세력이 규합한 단체인데, 범국민투위라는 약칭으로 부르기로 하자. 범국민투위는 3월 15일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박정희 정권이 3억 달러로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는 주장을 한다. 여기에 청중이 아주 많이 모인다. 부산 3만 명, 마산 1만5000명, 광주 1만 명이 이 성토대회에 왔고, 마지막으로 3월 21일 서울에서 열렸을 때는 4만여 명이 모였다.

프레시안 : 3월 24일부터 학생 시위가 거세게 일어난다. 이때 학생 시위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서중석 : 한일 회담에 대한 반대 투쟁은 3월 24일 학생 시위부터 본격화한다. 이때부터 한일 회담 반대 투쟁이 전면적으로 크게 일어난다. 이날 서울대 문리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이 시위는 4월혁명으로 이야기되는 1960년 3∼4월 시위 때와도 조금 차이를 보인다. 조직적이었다. 사전에 시위에 관해 논의해 거리로 나가는 시간도 조율했다. 서울대는 1시 반, 고려대는 3시, 연세대는 4시, 이렇게 순차적으로 나오면서 시위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그전에 관련 행사를 할 때도 조직성을 보여줬다. 예컨대 서울대 문리대의 경우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가 한일 관계에 대해 23일 강연회를 연다. 민비연은 1964년 한일 회담 반대 투쟁에서 가장 유명한 단체로 등장하는데, 정치학과 학생들이 주로 모여서 만들었다. 연세대에선 24일 장준하와 함석헌의 강연을 듣고 바로 쏟아져 나왔다.

주장과 목표도 선명했고, 시위 방식도 과거보다 다양했다. 예컨대 서울대 문리대생은 이날 이완용과 이케다 하야토의 허수아비를 가지고 '제국주의자 및 민족 반역자 화형식'을 했다. 그러고 나서 거리로 뛰어나왔다. 이와 같이 다양한 형태를 갖는 건 그 후 특히 서울대 문리대에서 많이 나타나지만 다른 대학에서도 많이 보인다. 이화여대에서 경비정 모금 운동을 하는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그리고 3.24 시위에서는 은연중에 이념성을 보인다.

(경비정 모금 운동은 평화선을 지킬 경비정을 마련할 기금을 모으자는 운동이었다. 실력으로 평화선을 지키자는 취지였다. 운동을 시작한 건 이화여대 학생들이었다. 이화여대생들은 1964년 3월 26일 평화선 수호를 위한 경비정 모금 운동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튿날에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도 결정했다. 전교생 7000명이 한 달간 미장원 출입을 삼가고 루주를 비롯한 화장을 하지 않는 등의 검소한 생활을 통해 절약한 돈을 모으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곧 널리 퍼졌다. 예컨대 중앙여중·여고 학생 2400명이 헌 신문지 800관을 모아 성금 4만5015원을 마련하고 혜화국민학교의 한 5학년 학생이 5년간 푼푼이 모은 3013원을 아낌없이 낸 사례 등을 이 시기 <동아일보> 등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 평화선이 많은 국민들에게 얼마나 민감한 문제였는지를 알 수 있다. <편집자>)

이런 것들은 그 이후 학생 운동에서 대체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3월 24일에 일어난 학생 운동은 규모 면에서도 컸지만, 학생 운동이 이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1960년 3∼4월 시위에서도 학생 운동이 많이 나타났지만, 그 후 거의 30년간 계속된다고 볼 수 있는 학생 운동과 형태상 비슷한 것은 3.24에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3.24에서 학생 운동이 새로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3월 24일 터져 나온 학생 시위…기름 부은 검은돈·괴소포·사찰 등 의혹들

프레시안 : 시위 학생들이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

서중석 : 3월 24일 세 대학에서 들고나온 것들엔 비슷한 게 있었다. 우선 매국노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건 김종필을 가리키는 건데 그 사람과 관련된 구호도 다 나온다. 서울대 문리대에서 이날 채택한 결의문의 첫 번째 항이 "민족 반역적 한일 회담을 즉각 중지하고 동경 체재 매국 정상배는 일로(一路) 귀국하라"였다. 김종필에 대한 강한 불신은 박 대통령에 대한 불신으로 연결되는 건데, 그게 여기서도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연세대의 경우 "제2의 이완용을 즉시 소환하라"로 표현되고 고려대에서는 "한일 회담을 즉각 중지하라", "조국은 너희 1인의 것이 아님을 알라", 이렇게 나왔다. 직접적인 표현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직접적인 표현인데, "너희 1인"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걸 통해서 알 수가 있다.

또 세 대학 다 평화선 문제를 들고나왔다. 서울대의 경우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은 해군력을 동원하여 격침하라", 고려대는 "평화선은 생명선이다", 연세대에서는 "삼천만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더해 세 대학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한 것이 경제 문제다. 서울대의 경우 "한국에 상륙한 일본 독점 자본의 척후병을 즉시 축출하라", "친일 주구의 국내 매판 자본가를 타살하라"는 강한 표현을 썼다. 고려대생들은 "한국에 있는 일본 상사를 즉각 철수시켜라"라고 주장했다. 연세대생들은 "악덕 재벌 타도하고 민족 자본 이룩하자"고 외쳤다.

민족 반역자 규탄 및 한일 회담 즉각 중지 요구, 평화선 문제, 경제 문제, 이 세 가지가 세 대학의 요구 사항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이와 달리 반미 구호(로 여겨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신중하게 나오는 걸 볼 수 있다. 서울대에서만 "미국은 한일 회담에 관여치 말라", 이런 주장을 내놨다. 그와 함께 서울대생들은 "우리의 결의와 행동이 '신제국주의자'에 대한 반대 투쟁의 기점임을 만천하에 공포한다"고 했다. 신제국주의라는 이념 문제를 들고나온다. 이후 학생 운동이 민족 자주성을 강조하고, 민족 해방 또는 신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같은 것들이 학생 운동에서 중요한 이념적 구호로 등장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3월 24일 불붙은 시위는 점점 규모가 커진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고등학생도 거리에 선다.

서중석 : 시위는 3월 25일 더 확대됐다. 서울 3만여 명, 지방 5000여 명 해서 약 4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시위로 확대된다. 26일엔 시위가 더 커졌다. 전국 11개 도시, 6만여 명으로 확산됐다. 여기에는 수원, 온양, 원주, 익산, 여수 같은 소도시도 들어 있다. 여기에다 서울에 있는 경기고, 배재고, 중동고 같은 데서도 들고일어났는데 경기고 시위가 특히 주목을 받았다. 경기고 학생들은 뉴코리아호텔 앞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면서 "국내 매국 상인을 규탄한다", "잔악한 일본의 경제 침략을 분쇄하자"라고 하고, 박 정권에 대해 "이게 민족적 민주주의더냐"라고 하면서 이념 문제를 제기했다.

3월 26일 아침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 담화를 발표했는데, 추호도 변동 없이 지금 하는 일을 수행하겠다면서 한일 회담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였다. 이것이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6일에도 시위가 이렇게 커지니까 박 대통령은 27일 김종필 소환을 발표했다. 김종필이 28일 귀국함으로써 상황은 일단락됐다. 3월 30일 박 대통령은 서울 시내 11개 종합 대학 대표들을 면담했다. 학생들이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공개하라고 요구하자, 박 대통령은 이를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다음 날 38개 대학 학생 대표 57명에게 김종필-오히라 메모의 내용이 비공식적으로 공개됐다고 알려졌다.

이 무렵, 그러니까 3월 26일 야당의 김준연 의원이 '박 정권이 일본으로부터 1억3000만 달러를 받았다'면서 하야를 요구해 상당히 큰 파문을 일으켰다. 사실 이 부분은 나중에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되는데, 이때 김준연 의원이 구체적인 사실까지 적시하면서 이걸 발표한 건 아니었다. (그런 의혹에 대해) 어디서 상당히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또 이즈음 사직공원 부근 국유지 부정 불하 사건 등 부정 사건이 터지면서 계속 박정희 정권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것들도 당시 시위에 영향을 줬다.

(김준연은 4월 2일에도 '박정희-김종필 라인이 일본으로부터 약 2000만 달러를 받았다'는 등 13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김준연을 허위 사실 유포 및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고발했다. 김준연은 4월 25일 구속됐다. 사직공원 부근 국유지 부정 불하 사건은 4월 초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정치 쟁점이 됐다. 이 사건으로 5월 11일 황종률 전 재무부 장관 등 15명이 구속 기소, 8명이 불구속 기소됐다. 한편 김준연 구속 과정에서 한 정치인이 유명 인사로 떠올랐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김대중이다. 1964년 4월 20일 여당이 김준연 구속 동의안을 국회에 상정하자, 김대중은 5시간 19분 동안 의사 진행 발언을 하며 이 동의안 처리를 막았다. <편집자>)

프레시안 : 4월 들어 이상한 소포 사건 등도 터진다.

서중석 : 이때 학생들이건 일반 사회인이건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정부 쪽에서 저지르면서 시위가 계속 이어지는 모습이 나타난다. 4월 5일 야당의 조재천 의원한테, 4월 8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시위를 주도한 김중태와 현승일한테, 그리고 4월 9일에는 고려대와 연세대 학생에게 괴소포가 배달됐다. 소포에는 "당신의 영웅적 행동을 찬양한다. 계속 박 정권 타도에 힘써 달라", 이런 내용의 편지와 함께 100달러가 들어 있었다. 이걸 받은 사람들은 바로 '이건 모 기관에서 공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했다. (괴소포를 받은 학생 중 한 명은 훗날 중앙정보부 요원으로부터 이 사건은 자신들의 공작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편집자>)

이승만 정권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54년 11월에 사사오입 개헌이 이뤄지면서 야당은 새롭게 대동단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때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이 괴문서를 야당 의원들한테 보내는 유명한 올가미 문서 사건이 터졌다. 그야말로 반공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는 쇼라고도 이야기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에도 국민의 큰 반발을 샀는데, 1964년에도 이런 불필요한 짓들을 저지름으로써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로부터도 반발을 사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학원 사찰 문제를 제기했다. 4월 17일 서울대에서 학원 사찰을 중지하라는 시위가 벌어지면서 YTP 문제가 거론됐다. YTP는 Young Thought Party의 약자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청사회(靑思會)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그 당시엔 대개 YTP라고 불렸다.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 또는 모 기관과 밀착된 극우 청년 학생 단체였는데, 이게 학원 사찰에 나서면서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당장은 큰 문제가 안 됐지만, 5.20 사건이 일어나면서 YTP 문제는 큰 사건으로 번진다.

4월혁명 4주년인 4월 19일에 일부 대학에서 시위가 있긴 했지만, 그렇게 큰 시위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20일과 21일에도 학원 사찰을 중지하라는 데모가 일어났고 23일에도 학원 사찰 중지와 한일 회담 반대를 주장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는 했다. 23일에는 서울대 문리대에서 '학원 사찰 및 학원 분열에 대한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성토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YTP 의혹 사건을 폭로하고 다른 사찰 문제도 제기했다. (이 보고서에는 중앙정보부가 학생들을 포섭해 대학가 정보를 수집하고 이들에게 돈을 줬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편집자>) 그렇지만 5월 20일까지 큰 학생 시위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 한일 회담 반대 시위 소식을 전한 <경향신문> 1면(1964년 3월 24일 자). ⓒ<경향신문> 화면 갈무리


박정희 정권의 이념을 정면 부정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프레시안 : 일본에 저자세로 일관하는 것에 분개하며 3월부터 들고일어난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은 그 후 성격이 변화한다. 박정희 정권이 일본에서 검은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국유지 부정 불하 사건, 괴소포 사건, 학원 사찰 문제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은 민주주의 운동으로서 성격을 강화한다. 5월 20일,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거론되는 인상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서중석 : 5월 20일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는 게 치러진다. 그 이전에, 5월 18일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5.16 평가 강연회를 열었다. 여기에 이효상 국회의장도 나오고 고려대 김성식·이항녕 교수, 소설가 선우휘, 야당 정치인 김도연, 거기다 학생 대표도 연사로 나섰는데 거의 다 "5.16은 4.19의 계승이 아니다"라는 쪽으로 주장했다. (선우휘는 이때 <조선일보> 편집국장이었다. <편집자>)

5월 20일 드디어 학생 운동사에 한 획을 긋고 6.3사태로 달려가게 하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열린다. 이건 학생 운동사 전체로 보더라도 중요한 한 전기를 이루는 사건이다. 이날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가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학생 수천 명과 시민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대회장에는 '축 민족적 민주주의 사망'이라는 조기가 서 있었다. 이 자리에서 민족적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선언문과 '반민족적·비민주적 민족주의 장례식 조사'라는 게 읽혔다. 성토대회가 끝나자, 검은 관을 메고 곡을 하면서 시위에 들어간다. 이게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불리는데, 이 장례식과 성토대회, 시위에서는 철저하게, 정면으로 박정희 정권의 정치 이념을 부정했다. 1980∼1990년대까지 계속된 학생 운동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어떤 주장을 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언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4월항쟁의 참다운 가치성은 반외압 세력, 반매판, 반봉건에 있으며 민족 민주의 참된 길로 나아가기 위한 도정이었다. 5월 쿠데타는 이러한 민족 민주 이념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 탄압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4월항쟁의 참다운 가치성은 반외압 세력, 반매판, 반봉건에 있으며", 이건 (4월혁명 1년 후인 1961년 서울대 학생들이 발표한) 4.19 제2선언문에 있는 내용이다.

군사 정권이 독재로 기본권을 유린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말살했다는 내용도 있다. 민주주의 장례식이라는 것과 관련된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사리사욕, 부정부패가 참 심하고 "노동자, 농민의 소비 대중에게 실업, 기아 임금, 살인적 물가고를 선물하면서 매판성 반민족 자본의 비만을 후원하였다"고 돼 있다. 이것도 그 뒤 학생들 선언문에 많이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박 정권이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를 정보 정치로 비난했다. 나중에 학생들은 폭력 정치, 테러 정치, 공포 정치 같은 것으로도 박정희 정부를 비판한다. 민족적인 것과 관련된 것으로는 매판성 반민족 자본을 키워줬다는 부분 이외에도, 군사 정권이 권력으로 민족적 양심 세력의 단초적 맹아를 삭제했다는 대목이 있다. 5.16쿠데타 직후 혁신계, 학생들을 대량으로 체포해 반국가 행위자로 단죄한 걸 비판하는 대목으로 볼 수 있다. 5.16쿠데타 직후의 그런 행위가 반민족적인 것이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면서 국제 협력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 제국주의를 수입하고 있다는 식으로 비난을 퍼붓고 있다.

이날 채택한 결의문에는 "일본 예속으로 직행하는 매국의 한일 굴욕 회담을 전면 중지하라"는 요구와 함께 "군사 정부는 5.16 이래의 부정, 부패, 독선, 무능, 극악의 경제난, 민족 분열, 굴욕적 한일 회담 등 역사적 범죄를 자인하고 국민의 심판에 부쳐라"라는 대목도 나온다.

5.20 선언문은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의 민족적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 부정했다. '박정희 정권이 국가 자주나 민족 문제에서 안티 세력이다. 친일 외세 결탁 세력이다'라는 점을 강하게 얘기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자신들이야말로 민족 통일과 국가 자주를 위한 세력, 민주주의 수호자, 그리고 민족 경제를 위한 자라는 식으로 설정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도 그 이후 나타나는 학생 운동과 연결되는 측면이 많다.

프레시안 : 이날 읽힌 '반민족적·비민주적 민족주의 장례식 조사'는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서중석 : 이 조사가 화제가 많이 됐는데, 그때까지 이름이 많이 안 알려져 있던 김지하가 "급히 쓰라"는 말을 듣고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조사를 몇 구절만 읽어보자.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 시체여! 죽어서까지도 개악과 조어(造語)와 식언과 번의와 난동과 불안과 탄압의 명수요 천재(賤才)요 거장이었다. 너 시체여! 너는 그리하여 일대의 천재요, 희대의 졸작이었다. 구악을 신악으로 개악하여 세대를 교체하고 골백번의 번의의 번의를 번의하여 권태감의 흥분으로 국민 정서를 배신하고 부정 불하, 부정 축재, 매판 자본 육성으로 '빠찡꼬'에 '새나라'에 최루탄 등등 주로 생활필수품만 수입하며 노동자의 언덕으로 알았던 '워커힐'에 퇴폐를 증산하여 민족정기를 바로잡아 국민 도의를 고취하고 경제를 재건한 철두철미 위대한 시체여! 해괴할손 민족적 민주주의여!"

여기서 천재(賤才)는 김지하가 즐겨 쓰는 문투다. 번의는 1963년 2.18 성명과 2.27 선서를 가리킨다. (이를 통해 민정 불참을 약속했던 박정희 의장은 곧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다. <편집자>) '빠찡꼬', '새나라', '워커힐' 부분은 4대 의혹 사건을 말한다. 전체적으로 김지하 특유의 문투가 드러나는 글이다.

무장 군인들의 법원 난입과 송철원 납치·고문 사건

프레시안 : 통렬한 풍자이자 노골적인 조롱이다.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사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 같다.

서중석 :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 대한 박 정권의 분노는 대단했다. 21일에 무장 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해 5.20 시위 관련자들한테 영장을 발부하라고 판사를 협박했다. 이러한 무장 군인들의 난입 사건과 함께 학생들과 국민들을 분노케 한 것이 바로 YTP 사건을 폭로한 서울대생 송철원을 납치·고문한 사건이었다. 송철원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은 사람이다. 송철원을 납치해 모처로 끌고 가 '(5.20 장례식을 주도한) 김중태 등의 거처를 대라'면서 마구 매질을 한 끝에 송철원이 쓰러지자 담뱃불로 손을 지지는 등 많은 고문을 가했다. 송철원 고문 사건이 신문에 연일 다뤄졌을 뿐만 아니라, 인권 옹호 단체들과 야당에서 막 들고일어나면서 이 사건이 커졌다. 이렇게 송철원 사건이 커지면서 5월 29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사표를 내기에 이르렀다.

(송철원은 친구 집에서 자다가 21일 0시 40분쯤 자칭 '중부서 형사'라는 괴한들에게 끌려갔다. 괴한들은 '파묻어버릴 수도 있다', '우린 경찰과 다르다'고 위협하며 송철원을 고문했다. 결국 실신한 송철원은 경찰병원 침대에서 깨어났다. 경찰은 그렇게 고문을 당한 송철원을 붙잡아두고 5.20 장례식과 관련해 조사했다. 송철원은 22일 밤 11시 무렵에야 귀가할 수 있었는데, 그 후 보름간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송철원이 고문 사실을 폭로하자 여론은 들끓었다. 수사를 회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검찰은 결국 5월 27일 수사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3일 후인 5월 30일, 중앙정보부 서울지부 제3과 수사계 요원 3명이 구속됐다. 이들은 "송 군이 말을 잘 안 들어 몇 대 때렸을 뿐"이라며 담뱃불 고문 등을 부인했다. 송철원은 가해자가 7명이라고 주장했지만, 중앙정보부 요원 3명을 구속하는 것으로 수사는 일단락됐다. 그렇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야기를 듣던 중앙정보부 요원이 이처럼 시민을 고문했다가 구속된 건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사표를 반려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폭동으로 간주한 반면, 총을 찬 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한 사건은 우국충정에서 비롯한 우발적 행동이라는 태도를 취했다. <편집자>)

5월 30일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일어나면서 6.3사태로 직행하게 된다. 이날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자유 쟁취 궐기 대회라는 걸 열었다. 여기서 학생들은 시위 주도 학생을 징계하고, 무장 군인이 법원에 난입한 것은 물론 경찰이 학원에 난입하고 교수를 구타하며, 중앙정보부가 학생을 납치·고문한 것 등을 강도 높게 규탄했다. 그리고 최루탄 박살식이라는 걸 했다. 여기서 '최루탄가'가 등장한다. 내가 대학교 초년 시절에, 술만 마시면 우리 친구들이 제일 많이 부른 노래다. 1960년대 학생 운동에서 잊을 수 없는 애창가가 이 최루탄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곡조에다가 가사를 "탄아 탄아 최루탄아 8군으로 돌아가라", 이걸로 바꾼 것이었다.

학생들은 이런 행사를 치르고 나서 집단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집단 단식 농성은 학생들의 폭넓은 호응을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31일 그 규모가 더 커지고, 6월에 가면서 계속 확산돼 다른 학교로 번졌다. (집단 단식 농성 과정에서 새로운 운동 문화가 탄생하기도 했다. 예컨대 5월 31일 밤에는 '위대한 독재자'라는 풍자극이 상연됐다. 박정희를 연산군으로 풍자한 '박산군'과 김종필을 가리키는 이완용을 등장시켜 민족적 민주주의, 한일 회담, 4대 의혹 사건 등을 비판한 작품이었다. <편집자>) 그러면서 또 시위가 일어났다. 이 시위가 6월 2일에는 고려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하야하라"는 주장으로까지 나타나게 됐다. 고려대생 시위의 중요 구호 중 하나가 "주관적인 애국 충정이 객관적인 망국 행위임을 직시하고 박 정권 하야하라", 이것이었다. 전에 최장집 교수에게 물어보니 자기가 이걸 주장해서 써넣은 것이라고 하던데, 하여튼 이제 5.20 시위에서 더 나아가서 박정희 하야 요구까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최장집 교수는 이명박 전 대통령, 김덕규 전 국회 부의장 등과 함께 고려대 6.3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편집자>)

6.3운동,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에서 "박 정권 물러나라"까지

프레시안 : 3월 24일부터 본격화한 한일 회담 반대 시위는 6월 3일 정점에 이른다.

서중석 : 이렇게 대학가와 사회가 끓고 있는 상황에서 6월 3일, 6.3사태로 불리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만 1만5000여 명의 학생이 거리로 뛰쳐나와 "박 정권 물러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서울대 농대가 이날 시위를 제일 먼저 시작했다. 수원에 있던 농대생 600여 명이 아침 6시에 발대식을 한 다음에 서울까지 도보로 행진했다. "말라빠진 농민 모습 이것이 중농이냐", "자유당이 무색하다 부정부패 일소하라" 같은 구호를 수원 시내를 통과할 때도 외치고, 서울을 향해 150리가 넘는 길을 걸어오면서도 외쳤다. 또 고려대생들은 4.19정신과 민족적 이익에 역행하는 '매국' 박 정권은 하야하라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거리에 나섰다.

이날 대규모 시위의 대단원이라고 볼 수 있는 건 단식 100시간을 돌파한 때라고 하는 오후 다섯 시경, 서울대 문리대에서 단식하던 학생들이 단식을 중단하고 가두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건 전에 김지하한테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는데, 송철원을 들것에 싣고서 (단식할 때) 깔고 누웠던 가마니를 뒤집어쓴 채 태극기를 앞세우고 교문을 나섰다고 한다. 참, 보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시위가 더욱더 확산되었다.

가장 격렬한 시위는 중앙청이 있던 세종로 일대에서 벌어졌다. 세종로 시민회관과 유솜(USOM, 주한 미국 원조 협조단) 건물 앞에 경찰 제1저지선이 있었는데, 학생과 시민 1만여 명이 여기에 걸려 일단 멈췄다. 유솜 건물은 오늘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있는 쪽이다. 오후 세 시 무렵, 학생들이 철조망 한 개를 끌어내고 돌을 던졌다. 그러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이때 공수 부대 풍차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경기도청 앞 제2저지선과 중앙청 정문 앞 제3저지선을 연이어 돌파했다. 지금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옆쪽에 조그만 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그때는 그 자리에 경기도청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광화문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데가 중앙청 정문이었다.

시위대는 효자동 쪽에 있는 조달청 앞, 그게 제4저지선인데 여기까지 밀려들어 청와대를 포위하는 형국이었다. 청와대는 이날 중무장한 공수 부대가 경비하고 있었다. 오후 7∼8시경 학생 시위대는 해산했다. 시위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는 경찰 차량을 파괴하기도 했다. 일부 시민들은 거리에서 학생들을 격려했지만, 적잖은 시민들은 무표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게 그 유명한 6.3사태다. 3.24부터 6.3까지를 6.3운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예순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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