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국가체육지도위원장,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3인을 중심으로 김영훈 체육상, 맹경일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등이 10월 4일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차 남한에 왔다. 이는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놀라움과 흥분을 주었다. 남북관계가 이제 개선되려나. 정말 그러면 좋겠다고.
북한의 고위급 인사들이 폐막식에 참석하기로 한 것은 일차적으로 북한팀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큰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북한은 1970~80년대에는 아시안게임에서 종합순위 4~5위를 했다. 그러다가 2002년(부산)에 9위로 떨어지더니 2006년(도하), 2010년(광저우) 대회에서 모두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런데 이번 2014년 인천에서 금메달 11개로 종합순위 제7위를 차지하면서, 10여년 만에 다시 톱10에 진입한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포츠인 축구에서 여성팀은 우승, 남성팀은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이 김정은 제1위원장이 새 지도자로 들어서서 '체육강국 건설'을 강조한 다음에 나타난 성과여서 북한지도부로서는 이를 크게 자축하고 이 분위기를 김정은시대를 여는 데서 북한주민의 사기 진작에 십분 이용하는 정치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국내정치적 목적이 중요했다하더라도, 이처럼 고위층이 세 명이나 한꺼번에 폐막식에 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국가체육을 담당하고 있는 최룡해 국가체육지도위원장과 김영훈 체육상만 와도 될 일이었다. 10월 5일자 <조선신보>는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황병서를 보낸 것은 "파격적인 조치"로서 이는 "최고영도자의 결단"이라고 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들의 방문이 향후 남북관계에 대해 갖는 함의이다.
첫째, 이번에 김정은 제1위원장은 꽉 막힌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누가 보더라도 매우 극적이고 강력하게 보여줌으로써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모습이다. 북한정부와 김정은 자신이 이미 이번 인천대회 참가를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혔고, 이번에 북측 방문단은 우리가 요구해온 제2차 남북고위급 회담을 10월 말~11월 초에 남측이 원하는 날짜에 재개하자고 동의했다. 황병서는 "소통을 좀 더 잘하고, 이번에 좁은 오솔길을 냈는데 앞으로 대통로로 열어가자"고 했다.
둘째, 남북관계가 상대방이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남측이 어떻게 반응하느냐, 또 그 다음에 북측이 남측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나오느냐가 향후 남북관계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위의 10월 5일자 <조선신보>의 해설기사는 "평양에서 민족화해의 사절들이 내려와 북남관계 개선의 단초가 만들어진 것인 만큼 이제 공은 서울의 청와대에 넘어갔다"고 했다.
이에 대해 박근혜 대동령은 10월 6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통해 "이번 고위급 접촉이 단발성 대화에 그치지 않고 남북대화의 정례화를 이뤄 평화통일의 길을 닦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면서 "북한도 이번 방한시에 언급한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진정성있는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이는 향후 남북 고위급 접촉이 재개된다 해도, 남북대화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셋째, 이명박 정부 이래 여태까지의 남북관계는 당장 어떤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어려운 대결상황에 빠져 있었고 그것이 일종의 구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양측은 이제 그간의 대결구조를 깨뜨리고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야 하는 엄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그동안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제1위원장 간의 불신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황이었는데, 양측 지도자들이 상대방에 대해 보인 불신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어서 김정은 제1위원장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인물, 진정성이 없는 인물, 북한 주민은 굶주리고 있는데 핵과 미사일 개발에 돈을 쓰는 인물, 무력도발을 일삼는 인물, 박 대통령 자신에게 입에 담지 못할 인신 모독적인 언어폭력을 가하는 인물로 자리 잡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김정은 제1위원장에게 있어서 박근혜 대통령은 워싱턴, 베이징, 유엔 어디에 가든지 온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데서 꼭 북한을 비판하는 인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신뢰 쌓기보다는 국내정치용으로 통일대박론과 통일준비론을 사용하면서 북한을 흡수통일하려고 하는 인물, 미국과의 동맹협력이라는 이름하에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을 예외 없이 지지하면서 거드는 인물로 투영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불신이 상호간에 자리 잡고 있는 한 향후 남북관계가 크게 달라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대화를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만나고 일관성있게 민족화해와 남북관계 개선의 이해관계를 키워가는 과정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생각과 판단을 조정하면서 하나씩하나씩 상호 신뢰를 쌓는 수밖에 다른 뾰족한 수는 없다.
넷째, 그동안 남측의 대북정책은 한미동맹협력을 강조하면서 기본적으로 미국의 동북아정책 속에서 작동해왔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미국의 동북아정책과 한미동맹협력이 남북관계 개선에 우호적이며, 한반도에서 평화 증진적이며 문제해결적인 것이 되도록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강대국으로서 강대국정치를 하는 나라이고, 미국의 동북아정책과 한반도정책은 기본적으로 중국과의 협력과 경쟁 속에서 미국의 이익을 확보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한미양국의 연례 합동군사훈련은 미국 태평양사령부의 작전계획에 따라서 이뤄지며, 우리 군은 전시작전권을 아직 미군으로부터 환수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미연합사령관의 지휘에 따라 작전에 나선다.
지난해 봄 키리졸브·독수리훈련 시 미국이 북한에 대해 '공개적'으로 '핵무기 사용 위협'을 했을 때, 한국은 그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기 보다는 한반도에서 '핵전쟁' 위협이라는 금기가 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미국과 합동훈련을 강화하면서 미국을 도왔다. 선제공격 개념이 들어가 있어서 '핵선제 타격전략'이라고 북한이 반발하는 '맞춤형 억제전략'도 한미양국의 대북 공동전략이다.
또 한국정부가 한국의 미사일방어체계(KAMD)가 아무리 독자적인 것이라고 주장해도 그것이 중국, 러시아, 북한을 겨냥하는 미국주도의 미사일방어체계(MD)와 "극도의 상호운용성"(extreme interoperability)을 갖는 것이라면 결국 KAMD는 미국주도 MD의 부속체계로 작동하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한국에도 '최종단계 고(高)고도미사일방어'(THAAD)를 구축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서는 대화와 협상은 하지 않고 압력과 제재를 강화하는 '전략적 인내'를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타나는 북·미 대결과 한미동맹협력은 매우 구조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전쟁문제를 해결하고 평화와 안정 그리고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관련국 모두가 힘을 합해 여태껏 존재해온 대결과 전쟁의 구조를 극복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번 북한 고위급 방문단의 남한 방문은 확실히 우리로서는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임에 틀림없다. 곧 개최될 남북 고위급회담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남북관계가 답보상태를 벗어나도록 해야 하며, 류길재 통일부장관이 밝혔듯이, 이산가족 상봉문제, 5.24조치, 금강산 관광, 북핵 문제 등 모든 주요현안을 협상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진지하게 해결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번에 이뤄진 북한 고위급 방문과 남북 고위급 접촉과 관련하여 양측이 보인 몇 가지의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인천의 한 식당에서 오찬을 할 때, 기본 식사를 끝낸 후 비공개 시간을 갖고 좀 더 허심탄회하게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어느 쪽이라도 먼저 그렇게 제안했다면 비공개회담이 이뤄지지 않았겠는가. 현장 취재기자의 전언에 의하면, 점심식사가 코스 요리라서 종업원들이 계속 음식을 나르느라 들락날락했고 식당 자체도 그 시간에 정상적으로 점심영업을 했으며 일반손님들도 많았다고 한다. 통일부 대변인은 '오찬을 겸한 회담'이라고 표현했지만, 왜 양측은 1시간 40분이라는 식사시간을 '환담'만 하고 끝냈을까. 언론 보도를 보면, 결국 오찬 환담에서는 5.24조치, 대북 전단 살포, 금강산 관광 재개, 이산가족상봉 등 현안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가 없었다고 한다.
둘째, 환담 후 통일부 대변인은 "대통령께서 북쪽 고위급대표단을 만날 용의가 있었으나 북쪽이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을 위해 와 시간 관계상 청와대 방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밝혔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친서가 없더라도 만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측이 이런 것을 굳이 밝힌 것도 퍽이나 이례적이다. 우리의 국가원수의 청이 북측의 방문단에 의해 거절당한 셈이어서 결코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도 왜 우리정부가 이를 굳이 밝혔는가.
왜 또 북한 방문단은 박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을까. 이번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북한의 고위급 대표단에게 '반드시 박대통령을 만나고 오라'는 식의 지시는 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북측은 아시안게임 이전에는 정부성명, 김정은 자신의 언명 등을 통해 이번 참가의 기회를 이용하여 남북간의 신뢰회복과 관계개선에 대해 강조했지만, 응원단 파견이 성사되지 못하고 또 아시안게임 기간에 박 대통령이 전세계가 보는 가운데 유엔총회에서 북핵문제, 북한인권문제 등을 비판하는 것을 보고 박 대통령이 남북관계 개선에 별 뜻이 없다는 식으로 판단하여 실세 3인방을 폐막식에 보냈을 때는 남측에 대해 별 기대가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미리 공식회담이 준비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북한 방문단이 평양과 소통할 수 있는 통신선이 설치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깊은 이야기는 꺼내지 말고 덕담 차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되 남측이 의미 있는 제안을 하는 경우, 3인이 현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고 왔을까. 또는 북측 방문단이 오찬 환담을 하면서 청와대를 방문한다고 해서 특별히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나. 어쨌든 필자는 남북한 양측이 시급하고 엄중한 현안이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이번 고위급 만남을 비공개 회의를 통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하는 기회로 십분 활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셋째, 그 동안의 상호불신을 감안할 때, 박 대통령이 북한의 '진정성 있는 행동'을 공개적으로 강조한 데 대해 북측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박 대통령이 그렇게 이야기한 데는 북한 방문단이 박 대통령의 청와대 초청의사를 거부한 데 대해 불편한 심기가 작용한 것일까. 최근 연속적으로 지자체, 재보선선거에서 승리하고 또 세월호참사 문제도 나름대로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는 상황에서, 여러모로 자신감이 생긴 청와대가 향후 북한에게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통일준비론과 퉁일준비정책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나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객관적으로 그리고 과거의 경험을 보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북한을 상대로 하는 대북정책이 맞지만, 통일준비론이나 통일준비정책은 그것에 대한 북한의 협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결국 대북정책이 되지 못하고 국내정치용으로 떨어지게 마련인 정책이다. 지금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신뢰프로세스와 통일준비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 양자 간에 큰 간격이 있고 서로 연결되지 않고 있는데 이를 연결해주는 다리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케 하고 혼란을 느끼게 한다.
이제 곧 재개될 남북 고위급대화를 통해 신뢰프로세스와 통일준비 간에 상충적인 면을 대폭 감소시키고 진정성있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이 양자가 '연결되는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여 신뢰프로세스가 대북정책 기조로서 다시 힘을 받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위에서 시사했듯이, 이래저래 깊어진 남북지도자들 간의 불신과 결코 유리하지만은 않은 환경구조 문제 때문에 걱정도 많다. <조선신보>의 표현처럼, 객관적으로 공은 우리 쪽에 넘어온 것은 사실이다. 우리정부가 평화증진적이고 통일지향적이며 동시에 문제해결적인 방향에서 전략적 능력을 십분 발휘해 줄 것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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