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이게 국가냐?'라는 질문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 야유성 질문은 인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 국가의 본질적인 역할이라는 믿음을 깔고 있다. 국가의 태생과 성장을 들여다보면 그런 믿음과는 정반대의 비밀이 드러난다. 국가는 구성원들에게 적과의 싸움에 언제든지 목숨을 내놓으라고 명령하는 '전쟁 국가'로 시작했고, 소수의 지배를 공공연히 선포하고 정당화하는 '계급국가'로 성장했다.
복지국가처럼 국가가 다수 인민의 안녕을 실제로 일정하게 책임지고, 또 국가에 그런 기대를 갖는 것이 당연시되는 과정은 인민주권의 원리에 입각한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사라고 할 수 있다.
6.10 항쟁 이전까지 일제와 군부독재의 긴 시간을 지나온 우리에게 국가는 일종의 신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신앙은 끈질기게 이어져 지금도 우리의 앙상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이게 국가냐?' 라는 질문이 광범하게 제기됐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심각하게 제기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질문만으로도 진보다. 존립의 이유가 의문시되고 도전받는 존재는 더 이상 신이 아닐 것이고, 자유의 가능성은 국가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만큼 커질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의문시되고 도전받는 국가의 신성
그러나 국가만큼, 어쩌면 국가보다 참사에 더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다른 하나의 차원은 충분히 의문시되지도, 도전을 받지도 않는 듯하다. 이 차원은 '경제'다.
참사가 24일째로 접어든 지난 9일 아침, 세월호 유가족들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 주민센터 앞에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전날 밤부터 이어진 연좌농성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긴급민생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세월호 사고 여파로 소비심리 위축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며 "이런 징후에 선제적으로 대응을 하지 못하면 소비 심리가 얼어붙고 어렵게 살린 경기회복의 불씨까지도 꺼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세상의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극한에 서 있는 사람들의 간절한 면담 요청을 나 몰라라 하면서 국가 최고 수장이 한 발언은 유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비탄에 잠긴 국민들에게도 모멸감을 주는 것이었다. 대체 이런 국가적 참상을 맞아 소비 심리가 조금 위축된다고 한들 무에 그리 대수란 말인가.
대통령 개인의 인품을 따져보기 위해 이 상황을 재론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비심리가 위축될 징후만 가지고 그 시간 그 상황에서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한 배경이다. 대통령은 우리의 관심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비극적 구조에서 당장 먹고 사는 차원, 즉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차원으로 돌려진다면 정치적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왜 그렇게 믿었을까? 그것은 경제에 관한 우리의 관념이 대다수 인민의 이익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소비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소비 심리를 고취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 자체를 늘리는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케인스는 경기 침체기에는 지폐로 가득 채운 낡은 병들을 폐광에 묻고 민간 기업이 그 병들을 채굴하도록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이 비유는 복지국가의 경제학적 기초가 됐던 자신의 이론을 해학적으로 압축한 것이다.
복지국가처럼 국가가 다수 인민의 안녕을 실제로 일정하게 책임지고, 또 국가에 그런 기대를 갖는 것이 당연시되는 과정은 인민주권의 원리에 입각한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사라고 할 수 있다.
6.10 항쟁 이전까지 일제와 군부독재의 긴 시간을 지나온 우리에게 국가는 일종의 신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신앙은 끈질기게 이어져 지금도 우리의 앙상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이게 국가냐?' 라는 질문이 광범하게 제기됐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 심각하게 제기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질문만으로도 진보다. 존립의 이유가 의문시되고 도전받는 존재는 더 이상 신이 아닐 것이고, 자유의 가능성은 국가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만큼 커질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의문시되고 도전받는 국가의 신성
그러나 국가만큼, 어쩌면 국가보다 참사에 더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다른 하나의 차원은 충분히 의문시되지도, 도전을 받지도 않는 듯하다. 이 차원은 '경제'다.
참사가 24일째로 접어든 지난 9일 아침, 세월호 유가족들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 주민센터 앞에서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전날 밤부터 이어진 연좌농성을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긴급민생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던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세월호 사고 여파로 소비심리 위축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며 "이런 징후에 선제적으로 대응을 하지 못하면 소비 심리가 얼어붙고 어렵게 살린 경기회복의 불씨까지도 꺼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세상의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극한에 서 있는 사람들의 간절한 면담 요청을 나 몰라라 하면서 국가 최고 수장이 한 발언은 유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비탄에 잠긴 국민들에게도 모멸감을 주는 것이었다. 대체 이런 국가적 참상을 맞아 소비 심리가 조금 위축된다고 한들 무에 그리 대수란 말인가.
대통령 개인의 인품을 따져보기 위해 이 상황을 재론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소비심리가 위축될 징후만 가지고 그 시간 그 상황에서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한 배경이다. 대통령은 우리의 관심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비극적 구조에서 당장 먹고 사는 차원, 즉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차원으로 돌려진다면 정치적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믿었음이 분명하다. 왜 그렇게 믿었을까? 그것은 경제에 관한 우리의 관념이 대다수 인민의 이익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소비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소비 심리를 고취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 자체를 늘리는 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케인스는 경기 침체기에는 지폐로 가득 채운 낡은 병들을 폐광에 묻고 민간 기업이 그 병들을 채굴하도록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이 비유는 복지국가의 경제학적 기초가 됐던 자신의 이론을 해학적으로 압축한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노령연금 공약을 파기한 것은 물론 세월호 참사가 진행 중인 시기에 여당을 시켜 기초연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은 단순한 공약 파기가 아니라, 장기에 걸쳐 성실하게 국민연금을 납부한 사람들에게 손해가 돌아가게 함으로써 공적연금에 대한 신뢰 자체를 허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적어도 복지를 통한 소비 진작은 대통령이 그리는 경제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참사 34일째를 맞는 5월 19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론에 밀려 나온 대통령의 대국민담화에서도 경제 정책의 기조 변화에 대한 얘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재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국가기구의 무능, 관료집단의 이해 충돌, 세월호 오너 일가의 탐욕을 방치한 기업회생제도 등을 손보겠다는 수준이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더 많은 비정규직 양산 프로그램인 시간제 일자리, 규제 완화를 통한 기업투자 활성화, 의료·철도 등 공공재의 영리상품화와 민영화, 수직 증축 허용 등을 통한 부동산 경기 부양책 등이다.
세월호를 참사로 끌고 갔던 바로 그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이다. 수백, 수천 명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데도 인간의 윤리를 감당할 수 있는 동기, 교육, 긍지로부터 소외된 대다수 비정규직 승무원들, 폐기 직전의 선박을 들여와 안전을 허무는 증·개축을 축복해준 규제 완화, 현란하리만치 다양한 편법·불법으로 탐욕을 추구했으나 기어이 이 참사를 부를 때까지 어떤 공적 제재도 받지 않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끽했던 세월호의 오너 일가들, 한시가 급한 생명들을 눈앞에 두고도 자본과의 끈끈한 이해관계를 계산하고 있었던 관료들, 국가 본연의 책임이어야 마땅했던 안전과 생명 관련 업무의 사실상 민영화….
한 번도 진지하게 도전받지 않은 경제 질서
우리에게는 4·19와 5·18, 6·10이라는, 절대국가에 맞서 싸운 민주화의 전통이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들은 IMF 구제금융 이후 한 번도 진지한 집단적 도전을 받은 적이 없다.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됨으로써 드디어 재벌과 특권층 1%를 위한 경제 질서가 정치적 의제가 되었지만, 결과는 거대한 정치 사기극으로 막을 내리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집단적 분노는 표출되지 않았고 높은 대통령 지지도는 이 사기극을 승인하였다. 지금도 그런 경제를 떠받치기 위해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들의 싸움은 바다 여기저기 둥둥 떠 있는 섬처럼 고립되고 만다.
경제가 도전받지 않는다는 것은 일상의 용어 사용에서도 드러난다. '정치 혐오'라는 말은 있어도 '경제 혐오'라는 말은 없다. 정치는 도덕성이 평균보다 떨어지는 직업 정치인과 정당의 적극적인 의지와 술수에 의해 작동하지만, 경제는 왠지 인간의 도덕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자체의 법칙에 의해 작동하는 세계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로 '이 더러운 사회'라는 말이 곧잘 터져 나오지만 '이 더러운 경제'라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압도적 1위를 자랑하는 산재 사망률, 노인 자살률, 직계 살인율 등 각종 죽음의 지표는, 그저 안타까울 뿐 어찌할 수 없는 사회 문제이지 우리가 의식 또는 무의식적으로, 적극 또는 소극적으로 승인하고 수용하고 긍정해온 참혹한 경제 질서의 산물이라는 사고로는 좀처럼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질서와 모호하게 연결되는 듯한 '탐욕'이라는 단어도 현실의 경제 질서를 정면으로 겨냥하지 않음으로써 '내 탓이오' 라는 허무한 도덕운동으로 귀결될 소지를 안고 있다. 인간을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독립해서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는 존재로 세워놓는 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도덕적 허수아비로 만든다. 그리하여 세월호를 운영했던 지위 중에서 가장 가벼운 존재였던 비정규직 직원에게 가장 무거운 도덕적 비난을 퍼붓는 기만이 자행된다. 지배자들은 기업의 악질적인 이윤추구가 기업가 개인의 인성에 달린 문제인 양 규제완화의 문제는 뒤로 감추고 세월호 오너 일가에 대한 단죄로 사회적 분노를 해소하려 하지만, 우리는 이 전략을 쉬이 간파하지 못한다.
이제 경제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재검토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머릿속에 비정규직화, 규제완화, 민영화, 자유무역협정은 우리들의 집합 의지와는 무관하게 작동하는 자연환경처럼 하나의 주어진 세계로만 사고되고 가치판단의 문제로는 사고되지 않는다. 이런 흐름은 극소수의 특권을 위해 다수 인민이 수탈을 당하는 이해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문명의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조류처럼 인식된다. 우리의 머릿속에 경제는 어렴풋하게 어쩔 수 없는 것, 어쩌려고 하면 도리어 우리의 물질적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질서로 이미지화되어 있다. 말하자면 경제는 국가를 대신해 물신화되었다.
잔인한 국가에 맞서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권리를 세우는 과정에 의식의 계몽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이 국가냐?' 라는 질문 자체가 중요한 계몽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국가라면 마땅히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 도출에는 유용하지만, 국가로 하여금 마땅히 기대되는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힘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질문은 되지 못한다. 세월호의 비극 앞에서 '이게 경제냐?'라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데 결국 실패할 것이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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