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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부정 선거 몰랐다? 신문도 안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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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통령은 부정 선거 몰랐다? 신문도 안 봤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33> 4월혁명, 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4월혁명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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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은 3.15 부정 선거를 몰랐다'고 주장한다.

서중석 : 그런 주장은 그 시기에도 있었다. 특히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일부 시민까지 '그런 심한 부정 선거를 대통령이 알았다면 가만뒀겠느냐'(는 식이다). 상당히 소시민적인 발상이라고 할까. 황제는 잘못이 없는데 그 밑의 신하들이 나쁜 놈들이라는 사고하고 연결돼 있는 것 같다. 하여튼 뉴라이트 일각에서 또 그런 주장을 하지 않나 싶다. 사료나 구체적인 사실을 가지고 그 시기를 살피는 연구가 드물었기 때문에, 또 그런 연구가 있더라도 그걸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유당 간부들이나 장관들, 경찰 최고위 간부들, 이자들은 장면 정권 때도 재판을 받았고 5.16 군부 쿠데타 이후에도 재판을 받았다. (3.15 부정 선거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최인규, 이 사람은 나중에 처형되는데, 이 한 사람을 빼놓고 전부 '난 모른다'고 했다. '어디선가 내려온 명령대로만 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서로 책임을 미뤘다. '우리 책임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누구 하나 없더라. 그래서 '그래도 최인규가 남자다', 그런 이야기조차 그 시기에 나왔다. '저런 나쁜 놈들이 있느냐. 자기들이 다 저질러놓고도 누구 하나 그걸 인정하지 않고 발뺌만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러니까 또 이 대통령이 '난 관여한 게 없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3.15 마산의거만 없었더라면 모든 게 잘됐을 텐데, 그 사건 때문에 일이 헝클어졌다'. 자유당 간부들이나 경찰 책임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본다. 3.15 마산의거 후부터 이 대통령이 그저 역정을 부르르 낸다든가 신경질적인 말씀을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국무회의록이나 여러 가지 글을 보면 꽤 나온다. 그러면서도 역시 노회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너희들 잘못'이라는 식으로 장관이나 자유당 간부들 쪽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발언들도 나온다. 3.15 의거 이후 사태가 달라지니 서로 태도도 좀 차이가 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3.15 부정 선거를 몰랐다? 삼척동자도 다 알던 일이다. 선거에 임한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꼬맹이들조차 이 시기에 어른들이 하는 짓, 그 분위기를 보면 알 수가 있었다. 또 신문에 부정 선거 이야기가 매일, 그것도 조그맣게 나는 게 아니라 크게 났다.

프레시안 : 주요 일간지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도했나.

서중석 : <동아일보>에는 여러 면에 걸쳐 나올 때도 많았다. 아주 큰 사건으로 계속 뽑아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동아일보>뿐만 아니라, <서울신문>을 제외하고 주요 일간지가 다 그랬다. 4대 일간지 중에서 <경향신문>은 폐간됐으니까 빼고 3대 일간지(<동아>, <한국>, <조선>)를 보면 '하루가 멀다' 정도가 아니(라 부정 선거 기사가 계속 나왔)다. (정부 기관지 역할을 하던 서울신문사는 4월혁명 때 불길에 휩싸였다. 이와 달리, <경향신문>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한 다음 날인 1960년 4월 27일 복간됐다. <편집자>)

'이 대통령은 국내 신문은 안 본다', 이런 말까지 일부에서는 하지만, 아무리 신문을 안 본다고 하더라도 그 중요한 상황에서 하루치만 신문을 봐도 '이럴 수가 있어?' 할 정도(였는데 그걸 몰랐다?). 특히 1960년 3월 3일자에,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선거 부정을 저지르려고 하는가를 민주당에서 폭로한 게 있다. 이것을 <동아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는 몇 면에 걸쳐서, 지면을 거의 이걸로 메우다시피 할 정도로 상세하게 썼다. 이렇게 부정 선거의 구체적인 내용이 자세하게, 또 그렇게 크게 났는데 그것도 몰랐다?

재미난 것은 당시 이 문제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자유당 내각에서 대단한 관심을 보였는데, 최인규가 (민주당 주장에 대해) '그건 사실과 다르다'고는 했지만 고소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과 다른 주장을, 그것도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이 했다면 민주당을 고소해야 하는 것 아닌가. (민주당에서 거짓말을 한 거라면) 나쁜 짓을 해도 보통 나쁜 짓을 한 게 아닌데.

또 1958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을 개정한 제일 큰 이유가 언론 탄압이었다. '허위 사실' 보도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게 개정안의 핵심 내용이었다. 그에 따라 언론과 민주당을 다 고소해야 하는 건데, 최인규는 '사실이 아니다. 그건 명백히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고소는 안 했다. 모든 게 탄로 났다는 걸 안 거다. 실제로 3.15 부정 선거는 3월 3일자에 나온 것하고 대동소이하다. 거의 똑같이 치러진다. (이승만 정권은 1958년 12월 24일 야당 의원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2.4파동으로 불린다. 국가보안법 개정안의 주요 표적은 언론과 혁신계였다. 언론에 물린 대표적인 재갈은, 사실을 왜곡해 보도하면 엄벌에 처한다는 이른바 '인심 혹란죄'였다. '인심 혹란죄'는 4월혁명 후 폐지된다. <편집자>)

그리고 그전에 이 대통령이 조기 선거를 치르자고 하면서 신문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도 신문을 안 봤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만약 신문에 부정 선거 이야기가 그렇게 났는데 이 대통령은 이게 사실이 아니라고 봤다면, 그 신문을 가만두면 안 되는 거였다. 허위 사실을 보도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프레시안(최형락)

대통령은 아무것도 몰랐다? 이승만을 얕잡아보지 말라

프레시안 :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 언론이 아니라 외신을 중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중석 : 이 대통령은 외신을 중요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때는 부정 선거가 워낙 심했기 때문에 외신이 상당한 관심을 갖고 여러 차례, 아주 구체적인 내용까지 보도했다. 그런데도 모른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도대체가 국내 정치에서 제일 중요한 사안을 모른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을?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하겠다(는 건 말이 되는 건가)? 그런 분이 계속 대통령을 하겠다며 후보로 나오고 자유당은 그분을 꼭 대통령으로 모시겠다고 한 건데, 이건 말이 안 되는 것 아니냐. 또 뉴라이트 일각에서 그런 사람을 훌륭한 분이라고 한다면, 그건 문제 있는 것 아닌가. 이승만 대통령이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여기는 건, 이 대통령을 너무 얕잡아보는 거다. 그런 분이 아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이 다른 건 몰라도 개표 결과는 봤을 것 아닌가. 그 결과를 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프레시안 :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대통령이 단일 후보이기 때문에 88퍼센트 넘게 득표했다? 이건 그럴싸하기도 하다. 문제는 부통령이다.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79퍼센트, 833만 표나 얻고 현직 부통령이던 민주당 후보 장면은 184만 표밖에 못 얻은 걸로 돼 있다. 아무리 천치 바보라고 하더라도 이기붕과 장면의 표가 이렇게 큰 차이가 난다는 걸 누가 믿을 수 있겠나.

더더군다나 서울에서 이기붕이 무려 50만 표 넘게 차지하고 장면은 37만 표밖에 못 얻은 걸로 돼 있다. 그런데 1956년 선거 때는 자유당이 부정 선거를 많이 저질렀어도 장면과 이기붕의 전체 표차는 21만 표였다. 장면 401만 표, 이기붕 380만 표로 아슬아슬한 차이였다. 결과 발표로만 보면 그렇고, 실제로는 그보다 더 큰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그때 서울에서 어땠느냐. 장면이 45만 표, 이기붕이 9만 표를 얻은 걸로 돼 있다. (이기붕은 장면의) 5분의 1밖에 못 얻은 거다.

그렇게 서울에서는 이기붕이든 이승만이든 인기가 없었다. 1956년 선거 이후에 자유당과 이승만, 이기붕에 대한 원성이 더 높아졌다. 무능이 더 입증됐고. 이건 세상이 다 아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기붕이 79퍼센트를 얻었다? 이런 걸 믿는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가 있었다고 하면 이건 정말 우습지 않나. 한 50만 표나 30만 표 차이라고 하면 애교로 받아들일는지 모르겠는데, 이건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누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프레시안 : 이승만 대통령은 개표 결과에 어떤 반응을 보였나.

서중석 : 여기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는 얘기를 한 게 나오지를 않는다. 그것만이 아니다. 보통 '틀림없이 누가 당선됐다' 하면 당선 인사를 하지 않나. 이 선거에선 3월 15일 밤늦게 이미 이승만, 이기붕 후보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식으로 발표됐다. 빠르면 그때 당선 인사 비슷한 걸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적어도 3월 16일에는 모든 게 판명된 걸로 발표된다. 그러면 '이렇게 나를 찍어준 사람이 많아서 감격했고 고맙다'든가 하는 당선 인사를 바로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양반들, 이승만 후보건 이기붕 후보건 너무 미안했던 것 같다. 내가 신문을 열심히 찾아보니까 3월 19일에야 이승만 대통령 후보의 당선 인사가 나온다. 이것도 앞부분은 3.15 마산의거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마산에서 일어난 난동에는 철없는 어린아이들을 앞장세워", 이건 민주당이 그랬다는 뜻 아니겠나. "두 번 다시 이러한 난동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며 법대로 다스려야 한다고 으름장을 딱 놨다. 이렇게 3.15 의거를 난동으로 딱 규정하고 나서 끄트머리에 간단한 당선 인사를 몇 마디 했다. 이럴 수 없는 것 아닌가. 늦었더라도 당선 인사를 맨 앞부분에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기붕은 더 미안했던 것 같다. 3월 20일에야 당선 인사를 하는 걸 볼 수가 있다.

국민 저버린 문제 인사들, 감싸는 데 앞장선 대통령

프레시안 : 유례를 찾기 어려운 당선 인사다.

서중석 : 최인규 장관 경질을 보더라도, 이 대통령이 3.15 부정 선거가 얼마나 지독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 아니냐고 난 보고 있다. 뭐냐 하면 최인규가 3월 18일에 사임서를 제출한다. 수리는 3월 23일에 됐는데, 그건 뜸을 들이는 기간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거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그렇게 국회에서 또 여론이 '이 사람을 경질해야 한다'고 거세게 비판해도 그런 것에 아주 초연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54년 말 원용덕 헌병 총사령관 쪽에서 야당 의원들 집에 불온 문서를 투입한 적이 있다. '불온 문서 투입 사건', '올가미 사건'으로 불리는 유명한 사건인데. 원용덕이 이걸 시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의 태도를 알기 위해) 그런 것을 하는 게 헌병 총사령관의 임무다', 이런 식으로 딱 얘기했다. 야당뿐 아니라 온 국민과 언론이 분노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러면서 원용덕을 끝까지 두둔하는 걸 볼 수 있다. 사실 헌병 총사령관이라는 것도 재미난 직제다. 이승만이 임의로 만들었다고 얘기한다. 하여간 법에는 없는 것이다. (이승만이 총애한 정치군인 원용덕은 '올가미 사건' 때 자신과 같은 특수 군인은 정치에 관여할 수 있다고 강변했다. <편집자>)

또 '낙루(落淚) 장관'으로 유명한 신성모가 국방부 장관일 때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고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크게 터졌다는 얘기를 전에 하지 않았나. 그때도 누구나 '신성모 장관이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아주 강하게, 그 물러나라는 소리를 비판한다. '그럴 수가 있느냐. 외신 같은 데 우리나라를 나쁘게 얘기하는 기사가 나도록 하는 게 잘하는 짓이냐', 이런 식으로 나무라면서 신성모를 상당히 오랫동안 두둔한다. 나중에 하도 문제가 심각해지고 조병옥 내무부 장관 같은 사람들이 그만두겠다고 하고 그전에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는 상황이 되니까 그때서야 경질했지만, 또 (요직인) 주일 대사로 보내지 않나.

이익흥 내무부 장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에 경찰이 깊이 관여한 게 드러나면서 이익흥도 의심을 사게 된다. 그때 야당이 '이익흥이 물러나야 한다'며 불신임 제안을 했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이익흥을 물러나게 할 수 없다며 "수만 명 경찰이 있는 중에 그 몇 사람 부하의 잘못으로 내무 장관이 책임을 지면 장관 할 사람이 없을 것", 이렇게 얘기한다.

최인규도 내무부 장관 취임 며칠 후에 불신임안이 거론된다. 그렇지만 이 대통령은 최인규를 굳게 신임해서, 물러나게 하지 않는다. 그런 최인규가 3.15 의거 3일 만에 사임서를 썼다는 건 보통 빠른 게 아니다. (마산의거, 그리고 발포로 인한 8명 사망이라는) 엄청난 사태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국민을 저버리고 대통령에게만 충성한 문제 인사들을 중용한 건 권력욕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서중석 : 이 대통령은 1960년에 85세였다. 그 당시 85세는 지금 85세와 다르다. 환갑 넘기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환갑잔치가 중요하던 때였다. 고희는 정말 적었다. 그런데 고희보다도 훨씬 많은 85세였다. 이 양반은 생일이 3월 26일인데, 당선됐을 때가 만 85세가 될 무렵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을 하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보인다. 권력에 대한 아주 강한 집착을 보인 거다. 그것은 권력 문제에 예민했다는 걸 얘기해준다.

영구 집권과 절대 권력을 추구한 분이다. 그래서 이승만 하면 독재, 독재 그러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박정희하고 차이가 나는 점이 뭐냐 하면, 이승만은 선거를 통해 영구 독재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헌법도 쿠데타로 바꾸는 게 아니라, 형식은 국회를 통해 바꾸는 방식이다. (1954년) 사사오입은 불법이었지만 국회를 이용해 한 것이다. 그렇게 이 양반은, 미국에서 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선거라는 형식을 중요시했다. 그러니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고 3.15 선거를 치른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이분이 선거에 대해선 굉장히 예민했다는 거다. 역대 선거를 쭉 보면 이분이 선거에 초미의 관심을 보이는 걸 잘 알 수가 있다.

4월 11일에서 13일 사이에 제2차 마산의거 또는 마산 항쟁이 크게 일어난다. 그러자 이 대통령은 13일과 15일에 연이어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85세 노인으로서는 초인적인 담화를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글자 하나하나를 굉장히 신경 써서 썼다. 이분은 담화문을 비서 손에만 맡기지 않았다. 비서가 써온 것도 다 뜯어고쳤다고 하지 않나. 담화문을 읽어봐라. 이승만 특유의 문체다. 이렇게까지 4.13 담화, 4.15 담화를 하나하나 본인이 신경 써서 썼다는 건 전 과정에 대해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고 잘 알고 있었느냐, 이런 것을 얘기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3.15 부정 선거가 이뤄지는 과정을 보면 누가 총괄 기획한 것인가, 어떤 식으로 이 선거가 배치되고 진행됐는가, 이걸 한눈에 알 수가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3.15 부정 선거를 향한 진군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서중석 : 1960년 정부통령 선거는 1958년 12월 24일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지방자치법 개정안 통과에서 막이 오른다고 이야기한다. 이 부분에 이 대통령의 의사가 얼마만큼 깊이 관여됐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주는 자료는 안 나온다.

국가보안법을 개정한 제일 큰 이유는 언론을 때려잡기 위해서다. 그래서 얼마 후, 장면 부통령과 깊이 연관돼 있다며 이 대통령이 몹시 나쁘게 봤던 <경향신문>이 정간 처분을 당하고 나중에 폐간으로 가는 걸 볼 수가 있다. 선거와 관련해 더 중요한 문제는 지방자치법을 개정해 지자체장을 임명하게 한 것이다. 그전에는 선거를 했다. 그래서 대구 같은 데에서는 야당 시장이 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지방자치법이 개정되자 '공무원 선거가 치러질 것'이라는 비판이 많이 나왔다. 그다음부터는 이 대통령 의사에 의해 아주 중요한 사항들이 결정되는 걸 볼 수가 있다.

프레시안 : 어떤 결정인가.

서중석 : 1959년 3월, 1960년 선거와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6인 위원회란 게 국무위원 6명으로 구성된다. 국무위원 중에서 중요한 순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 대통령이 믿을 만하다고 본 사람들 중심으로 구성된 걸로 보인다. 6인 위원회가 바로 공무원을 선거에 동원한 데, (즉) 국무위원급에서 부정 선거에 총괄적으로 관여한 데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관련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나중에 일체 얘기하지 않아서 구체적인 걸 알기가 쉽지는 않다. (특이한 건) 교통부가 그렇게 중요한 부서가 아니었는데도, 교통부 장관이던 최인규는 들어가 있었다(는 거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6인 위원회 구성 직후) 최인규가 내무부 장관이 됐다는 거다. 언론이 깜짝 놀랐다. 내무부 장관이 바뀐다는 설은 알고 있었지만, 최인규가 된다는 건 한 신문도 쓰지 않았다. 최인규가 될 걸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왜 그런 추측을 할 수 있었느냐 하면, 최인규라는 사람을 잘 알지도 못했지만, 이 양반이 교통부 장관 된 지가 몇 달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바로 내무부 장관에 임명하느냐, 이런 생각이 작용했던 것 같다. 모든 신문이 그다음 날 '임명 발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런 식으로 써 놨다. 최인규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 하는 건 나중에 다 입증된다. '자유당이 마지막에 써먹을 총알이다', 어떤 언론에서는 이렇게 애기했다.

최인규가 보통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즉각 드러났다. 취임사에서 '모든 공무원은 이 대통령을 절대적으로 떠받들어야 한다, '이 대통령을 모시고 우리 모두 국가 중대사를 해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비판적인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졌다. '위대한 이 대통령을 모실 수 있게끔 공무원들이 선거에 관여하라', 이런 뜻이라는 것이었다. 취임 일성부터 대단한 소리를 한 거다. 그래서 야당이 불신임안을 내는 걸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중요한 다른 일은 어떤 것인가.

서중석 : 1959년 6월에 자유당 전당 대회가 있다는 건 자유당 사람들도, 언론도 다 알고 있었다. 당헌 개정 같은 걸 중심으로 당 정책 등을 다가올 선거에 맞춰 고치기 위한 것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당 대회) 그날 밤과 그다음 날 새벽에 걸쳐 자유당 간부들한테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 전당 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라'. 후보를 (조기에) 지명하라는 것이었다.

이건 1952년, 1956년에 자유당에서 정부통령 후보를 정하던 방식과도 아주 다르다. 이 명령은 한 사람밖에 내릴 수가 없다. 긴장한 자유당 간부들은,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거니까 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신문이건 자유당 간부들이건 '대체 왜 이렇게 빨리 후보를 정해야 하는 것이냐'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선거를 보통 5월에 치른 걸 생각하면, 이것은 얼마나 일찍 정한 것인가. 어째서 이런 지시가 내려왔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신문에서도 뭣 때문에 이렇게 했을 것이라는 데 대해 제대로 추측을 못 하고 있더라. 다만 '참 문제가 있다', 이런 식으로만 돼 있다.

내 생각엔 이 대통령이 아무리 기력이 좋은 분이고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하더라도 노인네니까 안심이 안 됐던 것 아닌가 싶다. 빨리 후보를 결정하면, 후보가 (당선)되도록 노력해야 할 사람이 있는 것 아니겠나. 이렇게 두 분이 결정됐으니까 이제 자유당이건 행정부건 그전 선거와 달리 두 분이 (모두 당선)되도록 노력해야 하게 된 것이다.

▲ 2012년 제헌절에 남산에 있는 자유총연맹 광장(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이승만 동상 너머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이승만 동상은 본래 1956년 남산에 세워졌으나, 1960년 4월혁명 때 시민들의 손에 철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는 자유총연맹은 2011년 남산에 다시 이승만 동상을 세웠다. ⓒ연합뉴스

느닷없는 조기 선거 방침과 야당 대통령 후보의 죽음

프레시안 : 6인 위원회, 최인규 내무부 장관 깜짝 기용, 후보 조기 지명에 이어 조기 선거 문제가 불거진다.

서중석 : 1959년 12월 21일, 이 대통령이 중요한 담화를 한다. 그 당시엔 이게 얼마만큼 중요한가를 잘 몰랐다. 이날 이 대통령은 끝부분에 가서 '선거는 농번기를 피해야 한다', 이렇게 얘기했다. 지금까지 선거는 농번기에 치러졌으니까 앞당겨야 한다는 거다. 이른바 조기 선거를 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 선거는 대개 5월에 치러졌다. 1948년 5.10선거, 1950년 5.30선거, 1954년 5.20선거, 1956년 5.15선거, 1958년엔 5.2선거. 다만 1952년 8.5선거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켜 발췌 개헌을 하는데, 발췌 개헌안 통과 자체가 7월 4일에 이뤄졌다. 그래서 이게 헌법상 맞느냐,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다. 대통령 임기가 언제까지냐, 여기까지 논란이 되고 그랬다. 하여튼 '적어도 8.15에는 대통령이 취임해야 한다. 8.15를 넘기면 정말 이상해진다'고 해서, 7월 4일 통과 후 7월 26일까지 입후보를 하도록 했다. 선거 운동 기간을 9일밖에 안 주고, 선거일을 8월 5일로 빨리 잡은 것이다. 이럴 수가 있는 건가 싶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긴급 시기여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고 나머지 선거는 5월에 치러졌다.

지금은 5월 중하순부터 농번기라고 볼 수 있지만, 1960년대까지는 하지 때가 농번기였다. 5월 초엔 중요한 농사일이라는 게 거의 없었다. 모내기하고는 상관없는 계절이기 때문에 아무도 농번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걸 농번기라고 한 것이다. 왜 그렇게 선거를 앞당겨서 해야 하느냐, 이것에 대해 지금까지 명확히 해답을 줄 수 있는 건 없다. 다만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들이 '5월은 농번기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펴면서 반대하고 나섰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은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조기 선거 방침을 관철한다.

서중석 : 왜 조기 선거를 해야 하는 것인지를 해석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설왕설래하며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던 차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조병옥이 중병에 걸렸다는 보도가 1960년 1월 중순 나온다. 이 양반이 정확히 언제 중병에 걸렸느냐는 건 알 수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은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건 얘기를 안 하는 거다. 병원에 가서 치료는 받고 했기 때문에, 알 사람은 알지 않았을까는 싶다. 국내에서 도저치 치료가 안 되자, 이 양반은 1960년 1월 29일 미국으로 떠났다. 그때 한국인들이 최고 병원으로 쳐준 게 월터 리드 미국 육군 병원이었는데, 거기에 입원했다. 갈 때 이런 애기를 했다. '내 등에 대고 총을 쏘는 비겁한 행위는 제발 말아줬으면 좋겠다.' 뭘 가리키는 것이겠나. 조기 선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조병옥은 "낫는 대로 지체 없이 달려오겠다"는 성명을 내고 떠났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기붕조차 조기 선거를 하더라도 '4월쯤 하지 않겠나', 이렇게 얘기한 게 신문에 꽤 크게 보도되고 그랬다. 그런데 2월 3일, 정부가 3월 15일 선거를 치른다고 공고했다. 야당, 언론 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날씨도 4월이 따뜻해서 선거하기 더 좋은데, 3월 15일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반발했다). 어느 신문 사설엔 이런 내용이 실렸다. '3월 15일 당선된 사람이 8월 15일까지 5개월이나 어떻게 기다릴 수 있나. 당선 후 한두 달 또는 두세 달 후에 취임하는 게 원칙인 거지, 어떻게 다섯 달이나 기다리는 식으로 한다는 말이냐'. 거기에는 '야당에서 당선되면 어떻게 되는 거냐', 이런 의미가 다분히 담겨 있었다.

그렇게 여론이 악화됐는데도 왜 그렇게까지 조기 선거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었는데, 그해 2월 15일 조병옥이 미국에서 죽었다. 1956년에도 선거 중간에 (민주당 대선 후보) 신익희가 죽었는데 1960년 선거에서도 죽으니 참 많은 사람이 눈물을 뿌리며 조병옥을 '민주 인사'로서 아쉬워했다. (미군정 때 친일 경찰 중용, 4.3사건 당시 강경 진압 흐름 조성 등 조병옥의 해방 후 행적은 '민주 인사'와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 후 이승만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며 적잖은 사람에게 '민주 인사'로 인식된 것 또한 사실이다. <편집자>) 그래서 개사곡이 많이 나왔다. 그때부터 유행이었다. 신익희가 죽었을 때도 개사곡이 나왔지만, 특히 조병옥이 죽고 나서 학생들이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심정으로 개사곡을 많이 부르고 그랬다.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한 걸 쭉 보면 가장 중요한 지시를 누가 내렸는가를 알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서른네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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