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성군' 세종입니다. 세종은 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전 근대 왕조 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훌륭한 지도자로 꼽힙니다. 하지만 그는 피가 튀기는 '왕자의 난'을 통해서 아버지가 왕이 되는 모습을 지켜봤고, 권력을 위해서라면 형제나 처자식도 경계하는 아버지와 끊임없이 심적으로 갈등했습니다.
즉위한 뒤에도 조선 초기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사대부의 견제에 시달렸죠. 이런 안팎의 갈등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세종을 압박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세종은 조선 왕 중에서도 특히 몸이 허약했습니다. 이런 허약한 몸을 그는 어떻게 다스렸을까요? 그리고 그런 시도는 효과가 있었을까요?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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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을 평생을 두고 괴롭힌 건 안질이었다. 세종 23년 4월 실록은 그가 안질을 얻은 원인을 이렇게 기록했다.
"당시에 임금이 모든 일에 부지런하였고, 또한 글과 전적을 밤낮으로 놓지 않고 보기를 즐겨 하였으므로 드디어 안질을 얻었다. 증상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픈 통증이 있었다. 재위 21년에도 지난봄 강무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眼膜)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이내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다."
세종의 안질에서 공통점은 안구에 통증과 건조한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안과 질환 중 통증이 있는 질환은 많지 않다. 건조감이 있는 건 눈물이 마르거나 결막염을 앓았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며 소갈의 후유증으로 생기는 신생혈관증과는 구별된다. 23년의 기록에 안질을 얻은 지 10여 년이 됐다고 한 점으로 추산하면 안질을 얻은 시기는 35세 전후이고 42세에 더욱 심해져 시력이 매우 나빠졌음을 알 수 있다. 세종 24년엔 안질로 인해 세자에게 정사를 위임하고자 결심한 것을 보면 고통이 아주 심했던 듯하다.
세종은 역시 과학자적 실험 정신이 강했다. 눈병을 고치려고 여러 온천의 물을 길어와 무게를 측정했다. 실록은 경기도 이천의 갈산 온천물이 가장 무거운 것을 알아내고 세종이 행차했는데 효험이 컸다고 기록했다. 세종은 평산, 온양, 이천 등지의 온천을 열심히 다니면서 지병인 허리와 어깨의 강직을 치료했다. 온천행을 너무 자주 하다 보니 지나친 비용과 민폐 때문에 가까운 경기도 주변 온천을 찾는 데 공을 들였다.
못 말리는 '온천 마니아'
부평에 온천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몇 번이나 확인했다.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부평 주민들이 자신의 행차에 따른 번거로움으로 이른바 님비(NIMBY) 현상이 생겨서 숨겼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분노한 세종은 부평부를 현으로 강등했다. 반면 온양은 왕비가 중풍 요양차 들렀다가 완쾌하자 온양현에서 온양군으로 승격시켰다.
온천 마니아 세종은 재위 20년 경기도의 온천을 찾기 위해 특단의 유인책을 내놓는다. 경기 지역의 온천을 신고한 자에겐 후한 상을 내리고, 직위가 있는 자는 3등급을 올려주며, 백신(탕건을 쓰지 못했다는 뜻으로, 지체는 높으나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일 경우 7품직을 주고, 신고자가 주변인의 핍박을 받을 경우 타향으로 이주시키며 비옥한 토지를 주고 부역을 면제해 완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지봉유설>은 우리나라 온천 중 온양, 이천, 평산, 연안, 고성, 동래의 온천이 가장 유명하다고 기록했다.
여러 차례의 온천행 이후 안질이 악화하자 다시 찾은 곳은 초수(椒水)였다. 초수는 맛이 떫고 찬 물을 말한다. 물 밑에 백반이 있어서 차다고 하는데 화가 속으로 몰리면서 오한이 나거나 편두통이 있을 때 사용한다. 호초(후추)처럼 매운맛이 있다고 하며, 지금으로 말하면 탄산수 느낌이다. 물 밑의 백반 주성분은 알루미나이트다. 위궤양 치료제의 원료와 같으며 단백질을 강력하게 침전시킨다. <본경소증>은 이를 이렇게 분석한다.
"돼지 창자를 백반으로 문지르면 끈적한 액체가 없어지며, 상추를 절일 때도 백반을 넣으면 점액이 없어진다. 조직 속의 물을 없애 단단하게 강화한다."
재위 26년 세종은 충북 청주의 초수리를 지목해 행궁을 세우고 두 달에 걸쳐 치료한다. 과연 세종은 나았을까. 31년 기록은 안질이 이미 나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초수 덕분인지, 후일의 치료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풍질, 풍습으로도 고통
풍질, 풍습도 세종이 고통을 호소한 질환이다. 풍질은 중풍과 관련 있어 보이지만 세종 24년 기록에 따르면 건습(蹇濕)으로 표현했다. '건'은 절름발이, '습'은 관절염 증후를 가리킨다. 일종의 고관절염에 가깝다. <동의보감>에서 풍습은 "뼈마디가 안타깝게 아프거나 오그라들면서 어루만지면 몹시 아프다"고 정의했는데, 류머티스 관절염과 유사하다.
세종은 재위 13년 8월 18일 김종서를 불러들여 자신의 풍질에 대해 설명한다.
"내가 풍질을 앓은 까닭을 경은 알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경복궁에 있을 적에 이층 창문 앞에서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 아팠다. 이튿날 다시 회복되었다가 4, 5일을 지나서 또 찌르는 듯이 아프고 지금까지 끊이지 아니하여 드디어 묵은 병이 되었다. 그 아픔으로 30세 전에 매던 띠가 모두 헐거워졌다."
세종 17년엔 중국에서 온 사신의 전별연에 불참하며 다시 한 번 증상을 호소한다.
"내가 궁중에 있을 때는 조금 불편하기는 하나 예(禮)는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은 등이 굳고 꼿꼿하여 굽혔다 폈다 하기가 어렵다."
세종 21년엔 "내가 비록 앓는 병은 없으나 젊을 때부터 근력이 미약하고 또 풍질로 인한 질환으로 서무를 보기 힘들다"고 토로한다. 재위 24년엔 "나의 병은 만약 몸을 움직이고 말을 하면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심하므로 2, 3일 동안 말을 않고 조리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런 증상은 근막통증증후군처럼 다른 조직의 움직임에 통증을 유발하는 특이한 질환이다.
세종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처럼 많은 병에 시달렸다. 이런 증상을 종합해 분석하면 지금의 강직성 척추염 증상과 유사하다. 강직성 척추염은 척추 관절 뼈의 인대와 건(힘줄)이 유연성을 잃고 딱딱해지면서 운동성이 제한된다고 해서 붙여진 병명이다. 류머티스 관절염과 유사하며 보통 청년기 남성에게 발병하는 자가 면역성 질환이다. 인체의 조직과 기관, 조직과 조직 사이를 이어주는 결합조직에 잘 생기는 전신성 염증 질환이다.
주로 척추 관절을 중심으로 질환이 나타나지만 다른 결합 조직에도 침범한다. 눈에 공막염, 포도막염, 홍채염을 유발하고, 이밖에도 근막통증증후군, 천장관절염(고관절염과 유사)도 생긴다. 드물지만 강직성 척추염 말기엔 마미증후군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 저림과 무력증, 요실금 등을 호소하기도 한다.
직접적 사인은 중풍
세종이 불행한 가족에게서 얻은 슬픔과 괴로움을 위대한 영혼으로 승화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신체는 정확히 질병으로 보여준 것이다.
세종은 숨을 거두던 32년 "말이 잘 나오지 않는 증세도 조금 가벼워졌다. 그러나 기거할 때면 부축하여야 하고,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말이 떠오르지 않고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두근거린다"고 했다. 이는 언어 건삽증(혀가 굳어 말을 못하는 증상)과 심허(心虛) 증상으로 볼 수 있는데 심혈관계 질환에 의한 중풍 전조증에 가깝다. 이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점으로 미뤄보면 세종의 직접적 사인은 중풍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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