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창조 경제' 원조 발리, 에이즈 덮친 사연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창조 경제' 원조 발리, 에이즈 덮친 사연은?

[서남 동아시아 통신] 발리의 빛과 그림자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10월 6일부터 13일까지 동남아에 계속 머물며 다자·세일즈 외교를 펼쳤다.

박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21차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 회의 첫 세션에서 '다자 무역 체제 강화를 위한 APEC의 역할'을 발제하였고, APEC 최고 경영자 회의(CEO Summit) 기조 연설에서는 "한국 정부는 혁신을 통한 새로운 경제 개발 패러다임으로 창조 경제를 추진하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박 대통령은 "창조 경제는 경제 주체들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과학기술과 정보기술(IT)을 접목하고 산업과 산업, 산업과 문화의 융합을 촉진해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인도네시아에서도 인기가 높은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과 기존 서커스에 다양한 스토리와 음악, 조명 등 기술을 더한 새로운 형태의 공연 상품으로 재탄생시킨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를 창조 경제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제시하였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창조 경제에 대한 관심은 한국보다 먼저 시작되었는데, 2011년 10월 단행된 정부 조직 개편을 통해 기존 문화관광부를 '관광·창조경제부(Ministry of Tourism and Creative Economy)'로 바꾸고 창조 경제 업무를 총괄했던 여성 관료, 마리(Mari Elka Pangestu)를 초대 장관으로 임명할 정도이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 MPI 연구소가 발표한 2010년 세계 창의성 지수(Global Creativity Index) 국가 순위에서 스웨덴이 1위를 계속 고수하는 가운데 인도네시아가 82개국 중 81위에 그친 참담한 현실에 충격을 받은 인도네시아 지도자들이 자국의 관광·문화 산업 진흥을 위해 내린 특단의 조치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에서 창조 경제에 대한 열기가 뜨거운 가운데, 발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하고 예외적인 섬이다. 무슬림 문화가 강한 인도네시아에서 발리 섬은 힌두교도가 주민의 90%를 차지하여 독특한 문화적, 종교적 특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경제 수준도 인도네시아 어느 지역보다 높아, 많은 사람들이 발리가 인도네시아에 속한다는 사실조차 잘 인식하지 못할 정도이다.

APEC 정상 회담과 같은 굵직한 국제 회의가 연중 끊이지 않고 개최되는 등 국제 관광 및 문화 산업의 중심지로서 발리의 명성은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오는 여행객에게 발리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고급 휴양지, 현대 사회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영혼을 소생시키는 '영적 치유 중심지(spiritual healing centre)'로 자리매김했다.

발리 사람은 전통 조각품으로 장식된 오래된 종교 사원이나 집 앞의 제단에 매일 아침 꽃과 음식을 제물로 바치고 나비 장식물을 걸어 놓고 향을 피운다. 음악, 미술, 공연이 융합된 의식과 제례가 발달한 발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자연스럽게 수준 높은 문화 예술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다.

20세기 초부터 발리 섬에는 창조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자유로운 영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고, 발리의 독특한 자연 인문 환경에 매료된 찰리 채플린, 발터 스피스, 미겔 코바루비아스, 콜린 맥피, 마거릿 미드 등 세계 각국에서 온 작가, 예술가, 문화인이 꽃과 나비의 섬, 발리를 자발적으로 홍보하였다.

<남태평양> 등 할리우드 영화와 팝 음악의 배경지로 발리가 자주 등장하고, 경치가 빼어난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발리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발리를 찾는 관광객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 발리의 전통 문화와 융합된 다양한 수공예품. ⓒ김이재

▲ 발리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공연 예술. ⓒ김이재

특히 제1,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새로운 영감과 뮤즈를 찾는 서구의 예술가들, 전쟁의 고통을 피하고 싶은 히피들,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고 싶은 학자들,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는 동성애자에게 발리는 '마지막 천국(last paradise)'이 되었다.

머리에 히잡을 두르고 신체 노출을 최소화하는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들과 달리 힌두교와 혼합된 토착 신앙을 믿는 발리의 여성들은 자유롭게 머리카락과 가슴을 드러내며 매력을 발산하였다. 발리의 남성들 또한 화려한 색채의 옷을 입고 머리를 기르는 등 여성들 못지않게 성적인 매력을 가꾸는데 적극적이었고,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도 거의 없었다.

발리의 우붓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예술가 공동체가 형성되고 음악 미술 공예 등 전통 문화를 접목시킨 다양한 예술 작품이 만들어지고 춤 노래 연극 스토리가 융합된 다채로운 공연 문화가 관광 산업과 연계되어 발달하였으니, 어쩌면 발리는 '창조 경제' 이론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창조 경제를 실현해 버린 원조 '창조 경제 중심지'라고도 볼 수 있다.

▲ 발리의 신들에게 바치는 꽃과 제물들, 힌두교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목욕 시설. ⓒ김이재

또 발리는 관광지로 개발되기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이다. 태풍 등 자연재해가 거의 없고 화산재로 비옥한 발리의 토양에서는 쌀, 커피, 과일, 사탕수수 등 뭐든 심으면 다 잘 자란다. 또 음식에 대한 금기도 거의 없어 (발리의 힌두교도들은 인도의 힌두교도와는 달리 쇠고기도 먹는다) 무슬림들이 혐오하는 돼지고기로 만든 지역 특산물인 바비 굴링 음식점, 미낭카바우 사람들이 운영하는 파당 음식점, 서구의 패스트푸드 식당이 공존하여 발리를 찾는 관광객들은 다양한 음식 문화를 즐길 수 있다.

특히 경제 발전을 최우선시한 수하르토 정권 하에서 응우라 국제공항이 건설되고 국제 자본이 활발하게 유입되면서 발리는 국제적인 관광지로 개발이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물 부족 현상과 교통 체증이 심해지고, 물가가 상승하고 환경이 파괴되는 등 부작용도 점점 심해지는 상황이었다.

▲ 발리의 전통 가옥과 조화를 이루는 우붓 지역 스타벅스 카페. ⓒ김이재

한편, 보수적인 인도네시아 무슬림들에게 발리는 향락의 섬, 악의 근원으로 비춰졌고, 급진적인 무슬림 단체의 소행으로 보이는 2002년 발리 폭탄 테러는 발리의 관광 산업을 초토화시켰다. 발리를 찾는 외국 관광객이 급감하여 숙박 관광 업소의 고통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한국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은 침체된 발리 관광 산업에 단비가 되었다. 2003년 제작된 이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 관광객들이 발리를 더 많이 찾기 시작했고, 한국 드라마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다양한 부가 가치를 창출하여 창조 경제의 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최근 뉴욕을 비롯하여 서구 대도시의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에게 인도네시아의 발리는 '힐링 여행의 성지'로 부상 중이다. 세계적으로 7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자전적 소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노진선 옮김, 솟을북 펴냄)의 영향이다.

완벽한 조건의 남성과 결혼하여 뉴욕에서 화려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던 한 커리어우먼이 이혼의 위기를 겪으면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공허한 내면을 채우기 위해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로 여행을 떠난다는 줄거리인데, 주인공인 저자가 실제로 소울 메이트를 만나고 사랑을 시작하는 곳이 바로 발리인 것이다.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면서 영화의 배경지이기도 한 발리의 우붓 지역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여주인공의 생활을 그대로 따라해 보고 싶은 여성 여행자가 몰려들자 요가 요리 명상 그림 수업이 활성화되었고 숙박업소에는 장기 투숙자가 늘어나는 등 발리의 관광 문화 산업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또 발리에서 특별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하는 국내외 커플들이 늘어나면서 숙박 이벤트 케이터링 서비스 등 다양한 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웨딩 사업도 급속도로 확장 중이다.

▲ 발리의 호텔의 정원에서 브런치 웨딩을 마치고 사진 촬영하는 신혼 부부. ⓒ김이재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발리의 쿠타 해변에는 외국 여성들을 상대로 서핑 수업을 해주는 현지 남성들이 많은데, '쿠타 카우보이'로 불리는 이들은 부업으로 성매매도 마다하지 않는 제비족이 많아 에이즈 확산의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에 의하면 발리에서 매달 100명의 에이즈 환자가 새로 발생하는 등 에이즈 발병과 HIV 감염 건수가 급증하고 있으며 성매매 산업 종사자 5명 가운데 1명이 에이즈 바이러스 HIV 보균자로 밝혀졌다. 현지 언론은 에이즈대책위원회 조사 자료를 인용, 발리의 주도, 덴파사르의 집창촌 여성 1500명 중 약 20%가 HIV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보도하였다.

발리를 찾는 관광객이 많은 호주(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호주 서부 보건 당국은 최근 에이즈에 걸린 것으로 판명된 호주 환자가 발리에서 문신을 새기던 중 감염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고 문신뿐 아니라 바디 피어싱을 하는 과정에서도 에이즈와 B형, C형 간염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발리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주의를 당부하였다. 이에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영연방 국가들은 인도네시아 측에 대응책 마련을 즉각 요청하고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는 자국민들에게 위험 경보 발령을 준비하는 등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마지막 천국(last paradise)'으로 불리던 '신들의 섬', 발리는 인간들의 세속적 욕망이 흘러넘치는 하수구가 되어가는 상황을 맞고 있다. 교통 혼잡, 환경오염, 물가 상승, 강력 범죄, 테러 위협, 에이즈 확산, 카우보이 제비족의 활약 등 창조 경제에 기반을 둔 관광 산업의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창조 경제의 전도사, 리처드 플로리다는 창조 경제에는 3T, 즉 창조적 인재(Talent), 기술(Technology)와 더불어 '관용성(Tolerance)'을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창조 경제를 제대로 실현하려면 다양성에 대한 관용을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떤 민주주의를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도 함께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프레시안>은 동아시아를 깊고 넓게 보는 시각으로 유명한 서남재단의 <서남포럼 뉴스레터>에 실린 칼럼 등을 매주 두 차례 동시 게재합니다. 문화지리학자 김이재 경인교육대학교 교수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99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