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은 이 연재는 <낮은 한의학>(사이언스북스 펴냄) 책으로도 묶여, 시민과 소통하려는 한의사 사이에서는 필독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관련 기사 : 정조 독살은 헛소리! 홍삼의 불편한 진실!) 이상곤 원장은 '낮은 한의학' 시즌 2에서는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출 예정입니다.
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조선 중흥의 상징인 영조입니다. 비천한 무수리의 자식으로 태어난 왕,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인 왕으로 기록되는 영조는 조선의 최장수 왕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영화나 드라마 속 영조는 기골이 장대한 건강 체질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영조는 평생 약을 달고 산 허약 체질이었습니다. 그의 건강 비법은 무엇이었을까요? <편집자>
☞관련 기사 : 영조의 건강학 ① : 원조 '국민 약골' 영조, "○○ 없인 못 살아!" 영조의 건강학 ② : 원조 '국민 약골' 영조, "오줌발이 약해서…" |
소화기 냉증 치료하려 배꼽 뜸질
회충에 의한 상충(上衝·위로 치밀어 오름)감과 구역감을 '회기'라고 하는데 이 증상은 영조 20년에서 41년까지 이어진다. 회충을 치료하는 약물은 모두 매운 약이다. 위장의 온기를 올려 회충이 살 조건을 사라지게 하겠다는 처방이었다. 또 어의들은 위장의 온기를 보태기 위해 한편으로는 뜸 치료를 적극적으로 권했다.
영조도 자신의 건강상 약점이 소화기 냉증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연제법(煉臍法)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애썼다. 연제법은 배꼽을 뜸질하는 것인데, 방식은 직접구가 아닌 간접구에 가깝다. 쑥뜸과 피부 표면 사이에 소금이나 약재를 넣어 열기가 피부에 직접 닿아 상처를 내거나 고통을 주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인체를 보는 지혜가 동서양에서 일치하는 것은 배꼽이다. 왜 배꼽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도는 의학과 예술의 융합점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인체도는 다빈치의 역작이지만, 그 속에 있는 사각형과 원을 통한 비례는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인체 비례에 대한 생각을 구현한 것이다.
"자연이 낸 인체의 중심은 배꼽이다. 등을 대고 누워서 팔 다리를 뻗은 다음 중심을 배꼽에 맞추고 원을 돌리면 두 팔의 손가락 끝과 두 발의 발가락 끝이 몸에 닿는다."
손발을 뻗은 인체의 중심이 배꼽이라는 생각은 <동의보감>에도 유사하게 기록돼 있다. <동의보감> '배꼽' 편은 "팔을 위로 올리고 땅을 디디고 서서 줄로 재보면 중심이 바로 배꼽에 해당된다"라고 했다. 손을 들어 올린 모습에서 배꼽이 인체의 중심이라는 데는 동서양이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배꼽이라는 순수한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월인석보>에선 배꼽을 '빗복'으로 적고 있는데 배의 한복판이라는 뜻으로, 이곳이 인체의 중심이라는 표현이다. <구약성경> '욥기' 40장 16절은 "이제 보라. 그의 기력은 그의 허리에 있고 그의 힘은 그의 배꼽에 있느니라"고 했다. <동의보감>은 더욱 구체적으로 배꼽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치료 효능까지 덤으로 적었다.
"배꼽 줄은 마치 과일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을 때 양분이 과실꼭지를 통하는 것과 같다. 배꼽에 더운 김을 쏘여주어 꼭지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풀과 나무에 물을 주고 흙을 북돋워주면 잘 자라는 것과 같다."
뜸을 뜨고 더운 김을 쏘이는 것은 배꼽이 차갑다는 뜻이다. 이런 인식엔 한의학 고유의 음양론이 뿌리내리고 있다. 배꼽은 자궁 속 태아 상태에서 영양분을 받는 유일한 통로다. 어머니는 배꼽을 통해 태아의 음형을 기르는 물질적 기초를 공급한다. 출생 후 닫혀 있어도 배꼽은 인체의 정혈이라는 음기가 모이는 축이다.
<동의보감>은 배꼽을 데우는 방법으로 몇 가지를 제시했다. 소금이나 회화나무 껍질로 배꼽을 덮고 난 뒤 배꼽에 쑥뜸을 뜨는 방법, 부자를 비롯한 따뜻한 약으로 고약을 만들어 붙이는 방법, 배꼽을 약쑥으로 덮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배꼽을 데우면 "냉대하와 월경이 고르지 못해 임신하지 못하는 것을 치료한다"라고 적기도 했다.
체질에 맞는 식습관 실천
이렇듯 영조는 연제법으로 위장의 냉증을 없애는 한편으로 탕약을 적극적으로 복용해 체내의 온기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위장의 온기를 북돋우기 위해 인삼과 계지, 건강 등이 들어간 이중탕을 복용했는데 한번 먹어본 후 효과가 확실하자 자신에게 가장 맞는 처방으로 확신했다. 이후엔 이중탕에 녹용과 우슬, 부자를 넣어 건공탕이라고 불렀다. 건공탕은 나라를 건국한 공로와 같은 처방이라는 뜻이다.
영조는 그만큼 이중탕을 사랑했다. 그는 이중탕을 자신이 가장 아끼던 만능 기술자 최천약의 신기에 가까운 기술과 같다며 상복하면서 건강 지킴이로 삼았다. 영조 41년 12월 29일 제조들이 "건공탕의 효과로 얼굴이 화창해졌다"고 하자 영조 스스로 "인삼의 정기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한 해 인삼 20근을 소비할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 모두가 영조가 매일 한약을 복용할 정도로 건강을 챙긴 덕분이었다.
영조가 기름진 음식이나 음주를 멀리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금주령을 철저히 지킨 탓인지 처방에 술이 들어가지 않아 효과가 떨어진다고 신하들이 건의할 정도였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은 영조가 감선이나 철선(撤膳·국상이 났거나 나라에 재앙이 들 때 임금이 근신하기 위해 육선(肉膳)을 들지 않던 일)을 하면서 철저히 검약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 4가지를 꼽는 모습은 전혀 달랐다. 송이버섯, 생전복 새끼, 꿩고기, 고초장(苦草醬·고추장)이 그것이다.
영조가 사족을 못 쓸 만큼 좋아한 것은 사슴꼬리였다. 79세에 이르러서도 "반찬 중에서 사슴꼬리만 손을 댈 수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가 특히 즐긴 것 중 하나는 죽은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이 준비해준 밤이었다. 반면 그가 싫어한 것은 생선회나 기름진 음식 등 자신의 소화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자신의 체질에 맞게 잘 먹은 것이 건강 관리의 포인트였던 셈이다.
조선 시대까지 약차는 기호 음료처럼 먹는 요즘과 달리 치료의 보조 수단으로 쓰였다. 하나의 처방이었다. 영조가 다리 힘이 모자라면서 즐겨 먹은 것이 송절차다. <승정원일기>는 송절에 대해 "송절은 솔뿌리를 가리키는데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하고 어혈을 없애는 약재다. 황토에서 자란 어린 소나무의 동쪽으로 난 뿌리를 주재료로 오가피 우슬을 넣어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연구자 중엔 "송절차를 마시고 술에 취했다"는 실록 문구를 근거로 송절차가 금주령을 피하기 위한 영조의 눈속임 술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영조가 술을 즐긴 적이 없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이는 억측에 가깝다. 영조는 송절차의 효험을 많이 본 탓인지 5년 동안 음용한 후 복용을 중지했다.
▲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이산>의 영조(이순재). 드라마와는 달리 영조는 평생 약을 끼고 산 허약 체질이었다. ⓒMBC |
'앎'으로 극복한 허약 체질
어깨 통증도 영조를 오랫동안 괴롭힌 질병이었다. 침 요법은 물론 고약 종류를 직접 붙이거나 다른 보조 요법도 사용했다. 솔잎을 쪄서 따뜻하게 감싸는 방법, 누에고치를 볶아서 붙이는 것, 천초를 술과 달여서 팔에 수건으로 감싸는 방법 등이 동원됐다. 영조의 체질에 맞게 탕약도 복용했는데, 특기할 점은 아침에 일어나 팔을 전후로 흔들고 난 뒤 갑자기 좋아졌다며 운동 치료의 효험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영조는 허약한 '저질 체력'임이 분명했다. 평생 산증으로 인한 복통과 설사, 소변 장애 증상으로 고통 받았다. 특히 즉위 초기엔 산증과 소화 불량으로 힘들어했으며 중년기엔 어깨 통증과 회충으로 인한 소화 불량을 호소했다. 말년엔 극심한 피로와 하지무력감, 건망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가 조선 왕들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장수에 성공한 왕이 된 비법은 평범했다. 그는 자신의 체질을 알고 질병에 대비하며 스스로 건강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정치적, 태생적으로 가해지는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도 건강 비결이 자기를 바로 알고 약점과 단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실천하는 평범한 것임을 증명한 유일한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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