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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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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4>

의역동원(醫易同源) <2>

장경악이라고 중국 명대의 고명한 의사가 있었는데, 이런 얘기를 했다.

“조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상생(相生)함이 없어서도 안되지만, 상제(相制)함이 없어서도 안된다. 상생하지 못하면 발육될 수 없고, 상제되지 못하면 지나쳐 화를 입는다.”

의술의 핵심 이론이기도 하지만 필자가 사람의 사주팔자를 볼 때도 가감 없이 적용하는 이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이 논리가 사람의 병을 고치거나 사람의 운명을 내다보는 데에만 쓰이는 것일까?

상생함으로써 발육시키고 상제함으로써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이치는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할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이의 장점을 발전시켜 주고, 너무 버릇이 없거나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보이면 야단을 치거나 벌을 주는 것은 만고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흔히들 야단치거나 매를 들지 말라는 신식 교육 이론들이 등장하곤 하지만, 과연 세상에 아이를 벌 주거나 매 한 대 대지 않고 키울 수 있는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인가.

모든 일에는 기세나 유행이란 것이 있어서, 가만 두면 지나치게 되어 있는 법이다. 열심히 하다 보면 나중에는 지나치기 마련인 것이다. 저번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계몽 사조란 것이 결국 지나치게 옛 것을 부정한 까닭에 마침내 스스로의 정체성(identity)마저 부인하는 우를 범하는 것도 이런 이치다. 이와 관련해서 할 말이 하나 더 있다.

19 세기말, 서구 열강들이 도도하게 전 세계를 휩쓸어 가는 과정에서 위기를 느낀 한ㆍ중ㆍ일 삼국은 저마다 대책을 내놓았다. 우리는 동도서기(東道西器)란 말을 썼고,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 중국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이란 말을 썼다. 뜻을 보면 이런 말이다. 주체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 서양의 신식 기술을 적극 사용해서 나라를 부흥시켜 보자는 말이다. 그러나 그 점에서 성공을 거둔 나라는 일본 밖에 없다.

왜 실패했을까? 수없는 이론과 주장이 제시될 수 있겠지만, 핵심은 이렇다. 서양의 기술은 서양의 문화적 전통 위에서 발전되어 온 것이기에 문화적 체험 세계가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이 서양 기술을 제대로 써먹기 위해서는 서구 문화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발전적 수용 과정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문화 속에 체화(體化)되지 않으면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동아시아 문화의 인력권에서 비교적 변방에 속한 일본은 서양 기술을 도입하여 비교적 쉽게 체화하는 과정을 밟을 수 있었지만, 우리나 중국은 그렇질 못했다. 그렇기에 근대화 또는 서구화는 일본, 한국, 중국 순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근대화, 서구화란 말에는 어폐가 있다. 지금 우리나 일본, 중국이 거치고 있는 과정은 서구화도 아니고 근대화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서구 문화의 발전적 수용과정, 즉 체화 과정이라고 봐야 옳다. 하지만 한번 우리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린 마당이라, 그 과정은 엄청난 폐단을 낳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지금 대학 갈 때 보는 수능시험, 바로 수학능력시험은 미국의 SAT(Standard Achivement Test)를 그대로 번역한 말이데, 제도 도입도 거의 번역 수준을 넘어서질 못하고 있어, 그 폐단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왜 그럴까 대충 살펴보자.

미국이란 나라의 기본 사상은 모든 이에게 기회의 균등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이는 미국 헌법 조문에도 실려 있다. 따라서 대학 들어오겠다는 사람은 쓰고 읽는 기본 소양만 있으면 문호를 널리 개방해서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기에 수능 시험의 난이도는 평이하며 학생을 가르친 고등학교 선생들의 평가를 오히려 중요한 판단 자료로 쓰고 있다.

즉 싹이 틀 가능성이 있는지만을 확인한다. 그 어린 묘목들 중에서 될성부른 나무를 키워내는 것은 대학의 몫이 된다. 따라서 엄혹한 교과 과정이 수반될 수밖에. 그러나 교육이란 엘리트만 키워내는 것이 아니기에 소위 엘리트는 사립 명문 고등학교가 있고 공립을 나왔어도 명문 대학에서 철저하게 확인하고 평가한다. 그래서 명문 대학, 명문 학과를 들어가도, 어느 교수에게 배웠는지, 어느 스터디 그룹에서 공부했는지, 학점은 어떤지를 철저히 구분하고 옥석을 가려낸다. 결국 몇 학번이냐, 어느 명문 대학, 명문과, 명교수의 지도 여부, 전통있는 스터디 그룹인가에 따라 입사할 때 연봉도 천차만별이다.

기회의 균등이란 어떤 면에서 냉정하고도 철저한 평가 과정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우수한 학생이 배경이 모자라서 밀리는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정하고 철저한 일련의 평가 과정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것이다. 대학도 얼마나 우수한 학생을 키워냈느냐에 따라 해마다 점수가 주어지는 미국이다. 그러한 과정이 엄정하고 공평한 것은 미국이 기본적으로 청교도적인 윤리의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에게 ‘공정하지 않다’(unfair)는 말은 최대의 항의를 나타내는 말이다. 공정하지 못한 것에 설움과 압박을 느낀 유럽인들이 도망쳐 와서 만든 미국이기에, 그 생명력과 탄력은 한마디로 말해 공정성(fairness) 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미국이 최근 별로 공정(fair)하지 못한 행동을 대국이랍시고 버젓이 하고 있으니 정말 심상한 일이 아니다. 시쳇말로 맛이 갔다고나 할까!

수능 제도 뒤에는 이런 문화적 배경에서 연유하는 그들만의 하부 제도와 장치들이 작동되고 있다. 그것을 우리의 몇몇 고명하신 박사님들이 미국에 가서 그 제도를 보고 이 땅에다 옮겨 놓았으니 얼마나 문제점이 많겠는가 말이다. 수능을 도입해 놓고 언제까지고 미봉책만을 연발하고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아가서 비단 이런 문제점이 수능에만 그칠까.

이는 청일전쟁에서 청 해군이 일본 함대와 결전을 벌일 때, 프랑스식 대포의 작동법은 알았지만 대포를 정비하고 부품을 조달하는 하부 체제가 정비되지 않았던 탓에 제대로 쏴 보지도 못하고 괴멸한 것과 사실은 동일한 이치다. 체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어설픈 중체서용의 비극적 결말이었다. 그러기에 다른 산의 돌(他山之石)을 가져다 쓸 때는 이 쪽의 충분한 수용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자칫 우리의 차세대 전투기 사업도 청 해군 꼴이 나지 않을까 정말 두렵다.

정체성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약간 옆으로 흘렀다. 다시 한의학과 명리학의 관련에 관한 얘기로 돌아가겠다. 한의학의 소의 경전인 내경의 이론에 바탕하여 병을 치료하는 법을 더욱 발전시킨 사람으로서 장중경(張仲景)을 빼 놓을 수 없다. 장중경은 ‘상한론(傷寒論)' 이라는 저술에서 저번에 ‘우리 국운의 사이클’에서 필자가 언급한 변증논치의 사상을 제시하였다.

변증논치란 다시 얘기하지만, 병명을 진단하기에 앞서 변화되어 가는 증후의 차이에 따라 치료하는 방법을 정하는 것으로서 단순한 대증 요법이 아니라, 인체 전체에 대한 접근 방법이다. 아울러 명리학에서 사람의 운명을 예단할 때도 바로 이 변증논치의 법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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