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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한국 이름을 갖게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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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한국 이름을 갖게 됐나

[해외입양인, 말걸기] 입양인이 '두 문화의 다리'라고?

아기는 친모를 기억한다

오빠와 함께 아버지 묘지에 가서 예를 올렸지만, 나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잘 실감할 수 없었다. 그 후 어머니가 화장된 곳을 갔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고,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내가 친부모님을 처음 봤을 때 난 한 살도 안 된 유아였고,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마침내 친부모님을 발견했을 때 두 분은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었다. 난 나에게 DNA를 주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두 분을 만날 수 없다는 점이 너무 슬펐다. 누군가로부터 속았다는 절망감마저 들었다. 내 친부모님들께서는 돌아가셨고, 난 그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전혀 모른다. 그분들이 돌아가신 후 회상할 추억거리도 하나 없다. 너무나 큰 공허감을 느꼈다.

내가 순진하게 페이스북에 친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썼을 때 어떤 입양인들은 나를 버린 친부모가 죽어서 기쁘다고 썼고 또 어떤 입양인들은 내게 전화를 하며 기쁘다고 하였다.

이것은 많은 해외입양인들이, 친가족들에 대한 반응이 어떠한가에 대한 하나의 예다. 우리 해외입양인들에게 친가족들은 '타자화'되어있고 해외 입양인들의 삶에서 거리감이 있다. 또 해외 입양들은 친가족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조건 없는 우월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 해외입양인의 친부모들은 첫 부모이고, 원부모이며, 생물학적 부모이고, 어떤 명칭으로 불리건 우리 입양인들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한 근본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가장 친밀한 방법으로 친부모와 연결되어있고, DNA를 공유하며, 우리가 친모의 자궁으로부터 분리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친모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생애 처음 9개월간을 친모의 몸속에서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친모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한 인간 생애의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다.

나는 아기가 태어나기 전 엄마 자궁 내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에 대한 가장 놀라운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아기들은 자궁에 있을 때부터 친모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언어의 리듬을 안다. 그래서 프랑스인의 신생아는 고음에 반응을 보이고, 독일인의 신생아는 저음에 반응을 보인다. 친모가 섭취하는 음식에 따라 아기들은 태어날 나라의 음식 맛을 알고 친숙해진다. 아니스(미나리과의 1년 초)열매 음료수로 신생아에게 한 반응실험을 보면 아니스 음료를 즐겨 마신 엄마의 신생아는 생후 아니스 음료에 대한 거부반응이 없었던 반면, 엄마가 아니스 음료를 마시지 않은 경우 신생아는 아니스 음료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였다. 다른 실험 결과 신생아는 엄마의 목소리와 체취를 아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학 작가 애니 머피 폴은 새 연구를 통해 인간이 자궁 속에서도 모국어의 억양부터 조만간 자기가 좋아할 음식 같은 것까지 얼마나 많이 배우게 되는지 실험을 통해 보여 준 바 있다.
(링크참조☞ 클릭하세요)

이렇게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는 아기에게 안정된 닻과도 같다. 엄마는 생명과 자궁 사이에 아기를 이어주는 닻과 같고 아기가 태어나는 장소와 문화적으로 이어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기를 마치 백지상태라고 여긴다. 그래서 아기가 태어나면 친모로부터 분리해서 다른 문화, 입맛, 소리, 체취로 아기를 이식시켜도 아기가 아무 문제 없이 잘 받아들일 것 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인간은 큰 상처 없이 환경에 적응 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급격하게 변화된 환경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를 병자취급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반응성 애착장애라는 표현이 있다.

어떤 입양부모들은 입양아의 삶에 대해 자신들이 최우선권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사회도 이러한 입양부모의 소위 최우선권을 지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입양인 중에 부모가 바뀐 새로운 환경에 따르는 사람들을 "잘 적응한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입양인(특히 해외입양인)들은 일반인과 비교해 높은 비율의 정신병, 약물 및 술중독과 자살률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지 오래다. 한국계 스웨덴 입양인 토비아스 박사는 '스웨덴의 해외입양인과 그 다중부담'이란 논문에서 스웨덴 일반인과 해외입양인의 약물중독, 자살률 등의 차이를 이렇게 비교하여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아동이 불가피하게 친부모가 아닌 타인이나 가족의 다른 구성원에 의해 양육 될 경우가 있다는 것을 나는 물론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친부모의 자녀 양육을 가장 큰 우선권으로 두지 않거나 아동최우선의 원칙으로 두지 않는 제도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또한 아이들이 탄생한 원문화와 원나라에서 분리시켜 국내외로 입양 보내는 것은 전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외입양이 서구인들에게는 마치 선하고 아름다운 일인 듯 권장되고 있다. 해외입양인들의 자살률이 북미와 오세아니아 지역의 식민지화 된 원주민의 자살률과 거의 같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해외입양이 과연 아동을 구출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전제에 나는 그래서 동의하기 어렵다.

위의 토비아스 박사가 지적했듯이 해외입양의 현재 구조는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서구 백인들이 해외입양아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백인이 아닌 비서구인들은 일방적으로 입양아동을 공급해 주는 구조인 것이다.

해외입양인, '두 문화 사이의 다리'라고?

우리 해외입양인들은 북미와 오세아니아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식민화되었고 문화적으로 학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중 다수는 입양할 만했고, 결국 정체성은 지워졌다. 우리에게 주어진 새 정체성은 맞지 않았고, 우리에게 주어진 백인들의 이름은 우리 누런 피부색에 맞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경우) 우리 백인가족은 우리에게 맞지 않았고, 우리에게 주어진 백인문화는 우리 외모와 맞지 않았다. 내 경우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포괄적인 아시아인으로 인식했지만, 사실 포괄적 아시아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성인이 되어서 비로소 내 원래의 한국문화에 다시 접할 수 있었지만, 난 아무 거부감 없이 한국음식을 너무나 좋아한다. 한국에 처음 갔을 때 생애 처음으로 수많은 한국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즉각 내게 한국이 딱 맞는다고 느꼈다! 한국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내 외모가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길에서 한글 이정표를 읽으려고 눈을 찌푸리거나 더듬거리며 한국어를 말하려고 할 때 나는 단지 한국인의 외모를 한 외국인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한국에도 적응되지 못한 인간이 되고 만다.

이것이 '두 문화 사이의 다리'와도 같은 나의 역할이고 두 세계 사이에 최고의 것을 얻은 것이라고 내 스스로 말할 수 있을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유아기에, 나는 내 친가족, 내 문화, 내 나라와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비록 친모를 잃었지만 여전히 친부가 있었고 결코 고아가 아니었다. 내 친부는 교육을 많이 받은 중산층이었지만 이 시기 어려움에 처해있었고 그래서 결핵을 앓고 있는 친모의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적절한 진료를 받지 못한 친모는 돌아가실 수밖에 없었다. 친부는 나를 "포기" 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내 친모의 엄마(할머니)는 내 친모의 죽음에 친부가 책임이 있다고 분노하셨고, 그래서 내 이모님이 나를 돌보는 것에 대해 반대하셨다. 친모에 대한 할머니의 사랑이 원한으로 변한 것이다. 장녀인 내 친모의 죽음으로 인해 할머니의 분노는 극에 달하셨다. 그래서 친부는 나를 임시로 돌 볼 시설이 필요했다. 여기서 나는 임시라는 단어를 강조한다.

친부는 나를 임시로 시설에 맡기셨고 내가 잘 지내는지 확인했다. 친부는 시설에서 유모가 나를 돌보아 주는 것을 보고 기뻐하셨다. 친부가 그 후 2번째로 나를 방문했을 때 나와의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집에 데려가기 위해 3번째로 친부가 시설로 나를 방문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시설에 있지 않았다. 친부에게 알리지도 않고 시설은 나를 해외입양 보낸 것이다. 당시 정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마을에 갔을 때 마을 노인들이 내 얼굴을 보러 온 것을 난 지금도 기억한다.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그 노인들은 40년 전 사라진 어린 소녀를 보러 왔던 것이다. 노인들은 그 소녀를 기억했다.

내가 만져서 느낄 수 없는 아빠의 죽음은 언덕 위에 묻혀있다. 아빠의 죽음은 내 친 오빠에게는 아주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오빠는 아내와 딸(나)을 잃은 아빠의 깊은 고뇌와 함께 살았다. 오빠에게도 고뇌가 있었다. 오빠는 아빠의 음주 벽 과 함께 살아야 했다. 난 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항상 달고 살았다. 난 미친 가족들과 살면서 불의에 대해 분노를 느끼면서 살았다. 친가족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불신을 갖고 나는 자라왔다.

내 입양 후 첫 십 년 동안 나는 롤모델적인 입양인이었다. 난 아주 똑똑했고 순종적이었으며 인질이 범인에게 자진 협력하듯이 내 입양가족에게 스톡홀름 증후군을 갖고 있었다. 그 후 물론 나는 한계에 직면했다. 만약 내가 영리하지 않았다면 이런 문제점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입양인이 겪는 괴리감이나 충격은 더욱 커질 것이다.

입양인들이 뭔가 부적합함을 느끼고 그 후 다시 진정한 자아로 재적응을 하는 기간은 고투 그 자체다. 해외입양인은 다시 한국인이 되려고 고투한다. 한국인처럼 보이지만 한국인이 아닌 거북한 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한국문화, 관습, 음식에 대한 무지로 인해 한국식당 출입에 용기가 필요하다(많은 해외입양인은 한국에 냉담한 양부모와 함께 한국문화에 대해 진공상태로 자랐다). 그리고 보통 해외입양인이 할 수 있는 한국말은 "한국어 못해요"다. 혹은 간신히 한국인에게 한국어 몇 마디를 하는 수준이다. 이 과정에서 해외입양인들은 자신을 패배주의자로 느끼는데, 그 이유는 한국어를 잘해봐야 결국 나는 가짜 한국인 일뿐이기 때문이다.

한국 이름으로 바꿔도 상실감은 여전

나는 무언가 상실한 것을 되찾기 위해 내 이름을 원래 한국이름으로 바꿨다. 그 후, 한국의 시설에서 어차피 내 이름과 기록을 위조했을 수도 있는데 이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공포심이 일어났다. 그러나 나중에 내 이름이 원래 한국가족 이름과 완전하게 돌림자가 같은 것을 보고 안심이 되었다. 내 한국이름은 내 한국형제, 사촌과 함께 중간에 '인'자가 있다.(특별히 내 한국형제 얼굴은 내 얼굴과 아주 비슷하다). 내 이름의 한 부분은 내 한국형제와 운율이 맞지만, 마치 분실된 퍼즐 조각이 찢어지고 깨어진 후에 대충 수리가 되어서 원래 자리에 잘 안 맞는 것처럼, 내 이름은 서양식으로 시작되고 끝나지만 중간에 한국이름이 있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된 것이다.

난 내가 아무리 한국인인 척해도,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문화의 정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한복을 입고, 김치를 먹으며 아리랑을 불러도 내가 서양에서 자라면서 내 속 깊이 깃든 정신과 생에 대한 태도는 한국인의 그것과 불일치하고 다르다. 난 한국과는 다른 사회규칙 속에서 생존해 왔다.

내가 만약 두 문화사이의 다리역할을 한다면, '콰이강의 다리' 처럼 엉망과 참사가 될 뿐이다.

난 해외입양으로 망가진 사람이다. 나를 양육하기로 한 사랑스러운 친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내 입양은 시설에서의 납치와 사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내 입양부모는 순진했고 부적격자였다. 난 입양문화와 내 원래 문화사이에서, 둘 다와 제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또 입양가족과 친가족 모두와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난 생색만 내는 동정심("내가 기도해 줄게요")을 보여주는 입양부모들이 여는 좌담회에서 큰 소음을 낸다. 나를 부정하게 입양 보낸 현실, 강제입양, 입양을 통해 수익을 얻는 입양산업구조, 파양, 상실, 입양의 비탄, 실패한 입양결과에 대해 입양부모들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밉다. 과연 입양이 아름다운가? 사랑하는 가족만 있으면 단칸방에 살아도 충분하지 않은가?

물론 적절한 입양부모 아래서 원가족을 존중하고 원래 문화를 배우며 성장하는 입양아들도 있다. 그래서 입양의 부정적 통계를 피할 수 도 있다. 또한 소수의 성공한 입양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큰 그림을 봐야 하지 않나? 어떤 원가족들은 해외입양을 마치 해외 유학 가는 것처럼 들었다. 그래서 아이도 돌아올 것으로 이해했지 해외입양이 영구적이라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어떤 친모들은 강제로 아이를 포기해야 했고 또 어떤 아이들은 아예 도둑맞기도 했다. 아기농장도 있지 않은가? 입양시장에 있는 아동들을 보자, 이게 전부 불의와 부정이 아닌가?

"불의가 넘치는 상황에서 중립적인 것은, 압제자의 편을 선택한 것"(데스몬드 투투)이라는 말이 있다.

젊은 입양인들의 아픔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구체적으로 부정직한 입양사례를 이야기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회정의 차원에서 큰 틀로 입양과정 중 문제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해외입양의 부조리를 접할 때 마다 그냥 침묵을 지킬 수가 없다. 나는 감정을 억제하고 차분히 있을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잘못된 입양관행을 몇 세대에 걸쳐서 계속해서 반복하며 입양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부르는 일에 대해 침묵하고만 있을 수 없다.

아이를 입양한다고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그 아이의 원가족을 구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사실 입양부모는 구매자로서 아이가족에게 평생 비통한 아픔을 주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아이를 해외입양 한다고 그 아이가 태어난 나라가 구해지는 것도 아니고 가난한 나라들이 빈곤의 사이클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동을 구한다는 의미는 그 아동의 가족을 구한다는 것이다. 가족을 구한다는 의미는 가족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도록 기술 등의 도움을 제공해 준다는 말이다. 나라를 구한다는 의미는 그 나라의 시민들에게 도움을 주어서 각 이어지는 세대가 번성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아이들을 가난한 나라의 가족들에게서 데려가는 일은 아무도, 아무 나라도 결코 구하는 것이 아니다.

(번역: 김성수 '함석헌평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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