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도 가는 길. Ⓒ쩜원 |
위도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씨가 해변 연주회를 했던 벌금해변을 비롯해 깊은금, 미영금 등 여러 해변들이 서해 최고의 절경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격포의 명승 채석강은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 같은 기암절벽이 보는 이를 압도합니다. 내소사에 오르는 길은 한국 최고의 전나무 숲길로 유명합니다. 또 부안 읍내에 있는 매창(梅窓, 1573∼1610) 시비도 탐방합니다. 섬과 바다, 숲과 문학이 어울어진 행복한 여행길이 될 것입니다.
섬학교 제17강은 2013년 7월 6(토)∼7(일)일, 1박2일로 서해 절경 위도를 찾아갑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 답사지인 위도와 채석강, 내소사, 매창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허균과 매창 그리고 부안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누나
(매창 <이화우 흩날릴 제>)
마음 쓸쓸한 석양녘이면 문득 문득 자신도 모르게 웅얼거리곤 하는 매창의 시다. 세상에 연시(戀詩)는 넘쳐나지만 나그네에게 이보다 더 애절한 연시는 다시 없을 것이다. 어째서 연시들은 이별한 뒤에야 비로소 절창이 되는 걸까. 사랑이 한참 불타오를 때는 서로를 탐닉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애절한 시 따위는 쓸 틈도 없다는 것일까.
▲ 허균은 매창을 중국 최고의 여류시인 설도에 비견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섬학교 |
<이화우 흩날릴 제>는 1586년 부안의 관기로 있던 매창(부안현 아전 이탕종과 관비인 어미 사이에서 태어난 매창의 본명은 계생이다)이 천민시인 유희경(1545∼1636)을 만나 사랑을 나누다 이별한 뒤 쓴 시조다. 처음 만날 당시 매창은 14세, 유희경은 42세였다(후일 유희경은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한 공로로 면천이 된 뒤 종2품 가의대부에까지 이른다). 이별 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어느 쓸쓸한 가을 저녁쯤 매창은 문득 유희경이 그리워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신분이 기생이었으니 매창은 결코 한 남자만을 사랑할 수 없는 처지였다.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거쳐 갔고 그녀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중에는 쾌락을 위해 그녀의 몸과 기예만을 탐한 남자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희경은 그녀의 몸과 정신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 중 하나였다. 유희경의 문집인 <촌은집>에는 매창을 위해 쓴 시가 7편이나 전한다.
서른여덟 해라는 짧은 생을 살았던 매창의 전반기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유희경이었다면 후반기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단연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이었다. 1601년 스물아홉의 매창은 세곡선을 감독하는 전운 판관이란 관리 신분으로 부안에 내려왔던 허균과 첫 만남을 가졌고 이내 마음이 통해 이후 10년 동안 신분을 초월한 벗으로 지낸다.
처음 허균과 만나 종일토록 시를 주고받았던 매창은 그날 잠자리에 기생이었던 조카딸을 들여보낸다. 천하의 바람둥이 허균이 매창을 품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거문고와 시를 쓰는 능력이 탁월한 매창을 오래오래 친구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물론 당시 매창은 허균의 친구였던 김제군수 이귀의 애인이었던 탓도 있을 테지만 글쎄^^). 이날 만남을 시작으로 둘의 우정은 매창이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1608년 공주목사로 재직하다 파직 당한 허균은 아주 눌러 살 생각으로 부안 변산의 우반골에 정사암이란 집을 짓고 들어가 칩거한다. 물론 그 기간은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허균의 부안에 대한 사랑은 깊을 대로 깊었던가 보다. 이때도 매창과 교유하며 수많은 시를 주고받았음은 물론이다.
우반골은 1653년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 1673)이 은거하면서 <반계수록>을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김성환 군산대 교수 같은 이는 허균이 부안 우반골에 거주하며 <홍길동전>을 지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 <홍길동전>의 이상국인 율도국(栗島國)이 부안의 섬 위도를 모델로 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특히 율도국의 모델이 위도라는 주장은 정설처럼 굳어져 유통되고 있다. 위도를 소개하는 책자들이나 격포에서 들어가는 위도행 여객선 안에도 그런 주장이 대문짝만하게 쓰여져 있다.
율도국으로 가는 배
아마도 매창과의 우정에서 비롯된 혀균의 부안 땅에 대한 애착과 은거가 그런 추측들을 나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주장들이 뚜렷한 문헌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충분한 가능성은 있다. 특히 율도국의 모티브를 위도에서 찾았을 개연성은 크다. 물론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 오늘날의 오끼나와인 유구국을 모델로 삼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럴 가능성도 크다. 허균은 <수호지>에서 영감을 받아 <홍길동전>을 썼고 <수호지>의 마지막 장에는 관군의 토벌에도 살아남은 양산박의 도적들 일부가 배를 타고 유구로 가서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니 허균이 유구국을 모델로 율도국을 창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의 허균은 아득히 먼 유구가 아니라 변산에서 바라다 보이는 위도라는 섬에서 영감을 받아 차별이 없는 이상국가 건설을 꿈꾸었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았겠는가. 그가 혁명을 꿈꾸며 동지들을 불러 모으고 거사를 도모하던 곳이 부안 땅 아니었던가. <홍길동전>의 한문 필사본으로 <위도왕전(韋島王傳)>이 있다. 한자는 다르지만 위도라는 이름은 같다. 부안의 위도(蝟島)와 <위도왕전>의 위도(韋島)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연치고는 흥미로운 우연이 아니겠는가.
허균이 세우고자 했던 율도국은 단지 섬나라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율도국의 모델이 유구냐 위도냐를 따지는 논의는 부질없다. 또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실존 인물이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도 부질없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꿈꾸던 이상향은 새로운 조선이었고 홍길동은 다름 아닌 허균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홍길동과는 달리 혁명을 꿈꾸던 허균은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허균도 가고 매창도 가고 홍길동도 가고 허균이 바라보며 이상향을 꿈꾸었던 위도는 남아 있다. 오늘 우리는 위도로 간다. 허균의 못다 이룬 꿈을 찾아 율도국으로 간다.
▲ 위도 파장봉에서 내려다본 파장금항과 밥섬 식도. Ⓒ섬학교 |
고슴도치섬 위도와 식도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의 본섬. 위도(蝟島)는 생긴 모양이 고슴도치와 닮았다고 해서 '고슴도치 위(蝟)'자를 붙여 위도라 했다고 전해진다. 위도의 관문 파장금은 고슴도치의 입에 해당한다. 위도 사람들은 풍요로운 섬이었던 위도가 가난한 섬이 된 것은 파장금항 앞에 방파제를 막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재물이 들어오는 입을 막아버렸으니 돈이 안 들어온다는 것이다. 위도는 조기의 황금어장이었던 칠산 바다의 중심 섬이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봄철 조기 파시가 열리면 위도에는 수천 척의 배들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고 위도는 돈벼락을 맞을 정도로 융성했다. 파시가 사라지고 칠산 바다에 조기의 씨가 마르면서 위도는 한적한 섬이 돼버렸다.
위도 파장금 바로 건너에는 식도라는 섬이 있다. 고슴도치 입인 파장금 앞에 있어서 고슴도치의 밥이다. 그래서 이름도 밥섬, 식도. 지금은 식도의 경기가 더 좋다. 큰 어선들이 많아 어업 활동이 활발하다. 위도 주민들은 이 또한 방파제로 입을 막아버린 때문이라 풀이한다. 고슴도치가 밥을 못 먹으니 식도에는 밥(재물)이 쌓인다는 것이다.
위도는 옛날부터 부자가 많기로 유명했다. 엽전으로 수십 리 떨어진 왕등도까지 다리를 놓겠다고 호언할 정도로 재산이 많았던 안동 장씨 부자 이야기는 유명하다. 물론 식도 역시 옛날부터 어업으로 큰 돈을 번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과의 무역으로 떼돈을 번 식도의 송부자 이야기도 유명한 일화다. 위도 인근 칠산어장 때문이었는지 다른 섬들에 비해 위도 주변 섬들에는 유독 부자 이야기가 많다.
안동 장씨 부자의 축재 과정은 불분명하지만 송 부자가 부를 축적한 것은 청어잡이였다고 전하는데 실상은 조기잡이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청어는 조선시대 선비들을 먹여 살린 물고기라 해서 비유어라고도 했다. 서해바다가 넘치도록 청어가 많이 잡혔지만 어느 순간 청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참조기다. 송 부자가 수산물 무역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일제 강점기는 서해 바다에 청어가 아니라 조기떼가 넘치던 시대다. 그러니 송 부자의 치부 수단은 청어가 아니라 칠산어장의 조기일 것이다.
▲ 위도에는 벌금, 미영금, 논금, 깊은금 등 크고 작은 해변이 많다. Ⓒ섬학교 |
황금조기의 섬 위도
앞에서 언급 했듯이 위도는 칠산어장의 중심 섬이었다. 칠산 어장은 영광군 칠산도 인근의 바다를 말하는데, 영광의 송이도, 안마도에서 부안의 위도 사이의 바다다. 그 바다의 중심에 칠산도가 있어서 칠산어장이라 한다. 칠산도는 7개의 작은 섬들이 나란히 서 있어서 칠산도다. 동지나해에서 월동한 조기떼는 가거도, 흑산도, 비금도, 도초도를 거처 안마도 내해로 들어와 칠산어장에서 산란을 시작하며 황금의 조기 어장을 형성했다. 칠산어장 때문에 그 유명한 영광굴비도 생길 수 있었다. 굴비의 대명사인 영광굴비는 대부분 칠산어장에서 잡힌 조기들을 영광 법성포로 가져가서 말린 것이다. 그런데 칠산어장 조기잡이의 중심이 되는 곳은 영광 법성포가 아니라 위도였다.
위도 조기 파시는 흑산도 파시, 연평도 파시와 함께 서해의 3대 파시 중 하나였다. 살구꽃이 피면 칠산도 부근에 참조기떼가 몰려왔다. 위도 치도리의 늙은 살구나무에 살구꽃 피면 위도 앞바다에 조기떼가 찾아왔다. 이때는 조기떼를 쫓아온 수천 척의 조기잡이배가 위도 앞바다를 가득 채웠고 파장금항에는 파시가 섰다. 파장금은 파도가 길어지면 어선이 모이는 곳이라 해서 얻은 이름이라 전한다. 파시가 서면 파장금 항에는 선구점, 이발소, 다방, 세탁소, 의상실, 식당, 술집 등 많은 가게들이 문을 열었다.
조기 파시 때는 수천 척의 어선들이 몰려들었고 술집 색시들만 400여 명이 넘은 적도 있었다. 봄 파시철이면 모래밭에 가건물들이 들어섰다. 술집과 상점 등으로 한철을 보내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겨울 파도에 집들이 다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봄이 오면 사람들은 제비처럼 다시 집을 지었고 어선들이 몰려와 파시가 섰다. 바람이라도 불어 파도가 거세 조업을 할 수 없는 날이면 파장금은 선원들로 떠들썩해지고 술집마다 돈이 돌았다.
1960년대 말 칠산어장을 비롯한 서해안에서 조기가 자취를 감추고 조기 파시는 끝났다. 조기가 사라진 뒤에도 위도에서는 다른 파시가 계속됐다. 고등어, 삼치, 아지, 병어 등의 어장이 형성됐다. 1970년대 이후에는 가건물 대신 파장금 마을에 시멘트 건물이 들어섰다. 외지에서 온 장사치들은 파시 때마다 건물을 임대해 한철 장사를 한 뒤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섬 주민 중에서도 술집을 열고 붙박이로 장사를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때는 파시의 규모가 작아졌다. 그래도 파시 때면 삼사백 척의 어선이 몰려오고 선원들도 천 명 이상이 북적거렸다. 그러다보니 사건사고도 많았다.
▲ 부안 격포항 어판장에 나온 생선들. Ⓒ섬학교 |
목숨을 던져 사랑하는 술집색시를 구한 선원
1985년 여름,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젊은 사내 하나가 음독을 했다. 사내는 유서를 남겼고 얼마 뒤 서해의 섬 마을에 사내 둘이 나타났다. 전북 부안군 위도 파장금. 사내들은 부둣가를 어슬렁거리다가 다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오후 다섯 시쯤이나 됐을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들 몇이 부둣가로 나왔다. 진한 화장을 한 여자들은 부둣가 술집의 작부들이었다. 손님을 끌기 위해 나왔으나 부둣가에는 손님이 없었다. 여자들은 흩어져서 다방으로 들어갔다. 차를 마시고 있는 손님들을 꼬여낼 참이었다. 마침 커피를 마시는 사내 둘을 만났다. 허름한 차림이 선원들 같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니 아마도 고깃배를 타러 위도에 온 모양이었다. 수작이 오가고 사내들은 작부를 따라 나섰다. 술집은 색시집이었다.
사내들은 아가씨 둘을 옆에 끼고 술을 마셨다. 술을 잘 못하는지 사내들은 많이 마시지 않았다. 오히려 아가씨들이 먼저 취하고 말았다. 사내들은 아가씨들의 사연을 물었다. 한 아가씨는 미자, 또 한 아가씨는 정숙이라 했다. 아가씨들은 고향은 달랐으나 사연은 비슷했다. 중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미자는 상경해서 공장을 다녔다. 정숙이는 식모살이를 했다. 공원과 식모일로는 병든 부모 병원비랑 어린 동생들 학비 마련이 어려웠다. 처음에는 찻집 종업원으로, 다방 레지로 일하다 술집으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돈은 벌리지 않고 갈수록 빚만 늘어났다. 그러다 결국 빚 때문에 이 외딴 섬까지 팔려왔다. 그러나 여기서도 빚은 줄지 않았다. 둘 다 몇 백만 원의 빚이 있었다. 빚 때문에 섬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다.
다음 날 사내들은 섬을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 후 파장금 마을에 수십 명의 경찰병력이 들이닥쳤다. 경비정을 타고 온 경찰들은 열 몇 곳이나 되는 술집들마다 입구를 차단하고 포주들과 아가씨들을 조사했다. 밤 12시쯤 경찰은 포주들과 아가씨 70여 명을 경비정에 싣고 뭍으로 나갔다. 포주들은 경찰서로 잡아가고 아가씨들에게는 모두 3만 원씩의 여비를 줘서 집으로 돌려보냈다. 며칠 전 위도 파장금을 찾아왔던 사내 둘은 서울의 신문사 기자들이었다. 경찰출입기자였던 두 사람은 영등포역 앞에서 자살한 사내의 유서를 보고 위도에 잠입취재를 하러 갔었다. 섬으로 팔려간 작부들의 절박한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자 경찰이 작전에 나선 것이었다.
영등포역 앞에서 사내는 왜 음독을 했던 것일까. 유서에는 그 사연이 적혀 있었다. 사내는 선원이었다. 고기잡이배에서 밥을 하는 화부였다. 파장금항에는 법성관, 삼화관, 신흥관, 신설관, 부산관, 인천관, 남창관 등의 색시집이 있었고 다방도 10여 개나 됐다. 선구점과 이발관, 피복점, 호수당구장, 오성상회, 영신상회 등 생필품점도 있었다. 사내도 선원들이랑 그중 한 색시집을 단골로 들락거렸고 거기서 한 색시와 눈이 맞았다. 사내는 여자를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여자는 진 빚이 많았다. 포주들은 화장품이나 의상비 등으로 아가씨가 빚을 지게 만들었다. 손님이 없을 때는 밭도 매고 나무도 해오게 하며 노예처럼 부렸다.
사내도 돈이 없었다. 사내는 여자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서울 사는 형제들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여자를 빼낼 방법이 없어지자 사내는 절망에 빠졌다. 술을 마시고 사내는 유서를 썼다. 여자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구해달라고 하소연했다. 마침내 사내는 극약을 마시고 생을 마쳤다. 사내는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목숨을 던져서 사랑하는 여자를 구해냈다. 그 후 위도 파장금에는 색시집들이 사라졌고 정박하려던 어선들도 색시집이 없는 것을 알고 뱃머리를 돌렸다. 차츰 파장금항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파장금에는 단 한 곳의 유흥업소도 없다. 하지만 파장금 마을 뒷골목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골목을 걸으면 우리는 모두가 시간여행자라도 된 것처럼 아득해질 것이다.
섬학교 2013년 7월, 제17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배시간의 변경으로 일부 조절될 수 있습니다).
<7월 6일(토)>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 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7강 여는 모임
10:00 부안 도착
10:00-10:30 매창공원 탐방
11:00-12:20 전나무 숲길 따라서 내소사 탐방
12:30-13:30 점심식사(격포에서 충무공밥상)
14:40 격포항 출항
15:30 위도 도착
15:40-17:20 위도 걷기(3km)
위도항-방파제-파장봉(162m)-시름교-파장금 마을 뒷골목 탐방-위도항
17:40 미영금 해수욕장의 유일한 숙소(바다횟집 팬션, 다인실) 도착
18:20-20:00 저녁식사 겸 뒤풀이(주인 어부가 직접 잡은 자연산 생선회와 매운탕)
20:00 취침 및 자유시간
<7월 7일(일)>
07:00 기상
08:00-09:00 아침식사(바다횟집)
09:00-10:30 미영금 해수욕장에서 놀기
10:30-11:30 위도 버스 일주(<인간극장> 주인공 백은기 기사 해설)
12:20 위도항 출항
13:10 격포 도착
13:20-14:20 점심식사(부안 궁항에서 백합탕 정식)
14:20-15:00 채석강 탐방
15:30-15:30 격포 어시장에서 장보기
15:30 서울 향발. 제17강 마무리모임
▲ 위도와 채석강, 내소사, 매창 기행 답사로 ⓒ섬학교 |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등산복/배낭/등산화),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어머니전>
섬학교 제17강 답사 참가비는 24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숙박비, 관람료, 4회 식사와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금감원의 보험사 개인정보 보안강화 규정으로 여행자보험 단체가입이 어렵고, 다른 보험에 가입한 경우 중복보장이 안 되는 등 실익이 크지 않아 여행자보험 가입을 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하신 분은 개인 가입을 하시고, 이동시 '안전'에 특히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관광버스는 보험 가입이 돼있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8월 섬학교 안내]
8월 섬학교는 복잡한 휴가철을 피해 첫째 주말이 아닌, 둘째 주말에 열립니다.
8월 9(금)-11(일)일 2박3일의 오붓한 휴가형으로, 통영 앞바다의 연대도와 인근 섬에서 열립니다.
참고하시고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학습자료>
[채석강] 배를 타고 술을 마시던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흡사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 11월 17일 명승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선캄브리아대의 화강암, 편마암을 기저층으로 한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이다. 바닷물에 침식되어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물때가 맞으면 채석강 절벽 아랫길을 따라 격포해수욕장까지 갈 수도 있다.
[내소사] 내소사 입구의 전나무 숲은 광릉수목원, 오대산 월정사와 함께 국내 3대 전나무 숲의 하나로 꼽힌다. 백제 무왕 34년에 혜구두타가 두 개의 절을 세워 대소래사, 소소래사라 했다. 소소래사가 남아 내소사가 됐다. 내소사 대웅전의 단청과 연꽃문양의 격자문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고려 동종, 법화경절사본, 설선당과 3층 석탑 등의 문화재가 있다.
[위도진] 현재 위도면 사무소가 있는 진리는 조선시대에 위도진이 있었다. 위도진에는 종3품 첨사 아래 수군 53명이 주둔했다. 위도진의 동헌 건물이 남아 있다.
[위도해수욕장] 벌금해변에는 1969년 개장한 위도해수욕장이 있다. 산자락에 쌓인 1km 길이의 백사장은 더 없이 아늑하다. 위도에는 깊은금, 미영금, 논금 등 물놀이하기 좋은 해변이 여럿 있다. 논금해수욕장은 김기덕 감독 영화 <해안선> 촬영지다. 2011년에는 위도해수욕장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연주회가 열리기도 했다.
▲ 내소사 전나무 숲길. ⓒ변산반도국립공원 |
[위도띠뱃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 원래는 대리원당제였다. 위도띠뱃놀이는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풍어제 중 하나인데 매년 음력 정월 초사흗날에 열린다. 용왕굿을 할 때 띠배를 띄워 보냈기 때문에 띠뱃놀이다. 띠배는 띠풀과 짚, 싸리나무 등을 섞어서 만든다. 2∼3m 크기. 띠배 안에는 용왕에게 바치는 제물과 허수아비로 만든 사공, 돛대와 닻까지 실어서 바다로 띄워 보낸다. 용왕에게 공물을 바치러 가는 사신선인 셈이다.
▲ 위도띠뱃놀이. ⓒ부안군 |
[임수도] 2000년 연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전남 곡성의 관음사 연기 설화 고증 과정에서 위도 인근 임수도가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의 모델이라는 주장이 제기했지만 설득력이 크진 않다. 임수도 발굴 과정에서 백제시대 석실고분과 고려 유물, 송나라 동전 등이 출토됐다. 중국과의 해상 교역 거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인석] 1994년 진리 어촌계장이던 서봉신씨가 위도 부근의 임수도 인근 바다에서 돌덩이 하나를 건져 올렸다. 문인석이었다. 험한 뱃길의 안녕을 빌며 인신공양을 대신해 문인석을 바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 임수도 바다에서 건져 올린 문인석. ⓒ섬학교 |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현재 프레시안에 <통영은 맛있다>를 연재중입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 변산반도 낙조. ⓒ변산반도국립공원 |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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