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개교한 <섬학교>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섬들을 걸으며 사유하고, 소통하며 배우는 학교입니다. 섬학교의 섬 여행은 다리나 제방 등으로 육지와 연결되지 않고 온전히 바다 위에 있는 섬들만을 답사합니다. 크든 작든 섬에서의 이동 수단은 가급적 두 발에 의존합니다. 섬 여행은 가급적 월 1회 떠나며, 작은 섬은 걸어서 일주, 큰 섬의 경우 섬의 가장 걷기 좋은 길 걷기를 기본으로 합니다.
섬에 남아있는 문화유적, 유배지, 당산, 어부림, 마을 숲, 당집, 사찰, 설화의 무대 등도 답사합니다. 해상 경관이 좋은 섬은 어선을 이용해 해상 일주도 하며, 마을 안길을 산책하기도 합니다. 또 답사 간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다 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섬과 소통합니다. 섬의 토속 음식 맛보기, 섬 노인들로부터 특산물 구매하기 등으로 섬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오도록 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신안 <'민어의 섬' 임자도와 '소금섬' 증도 기행>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 우리나라 최대 민어 산지이자 가장 큰 해수욕장을 자랑하는 임자도 Ⓒ섬학교 |
오아시스가 있는 사막의 섬
전남 신안군은 섬들만으로 이루어진 군입니다. 임자도는 신안군의 최북단에 있는 신안군 임자면의 중심 섬입니다. 남쪽은 신안군 자은도, 북쪽은 영광군 낙월도와 이웃하고 있습니다. 임자도에는 한국 최장의 해수욕장이 있습니다. 명사 삼십리, 폭 300미터의 백사장이 물경 12km에 이릅니다. 해변은 그대로 광활한 사막입니다.
해변뿐만 아니라 임자도는 섬 전체가 모래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막 지형입니다. 지질학자들은 임자도가 중동에서나 볼 수 있는 사막의 지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바닷바람이 심하게 불면 산과 들이 온통 모래로 뒤덮여버립니다. 섬 곳곳에는 오아시스도 있습니다. 섬 사람들이 '물치' 또는 '모래치'라 부르는 큰 물웅덩이들인데 모래가 머금고 있던 물이 한 곳으로 쏟아져 내려서 생긴 것입니다.
임자도 전장포 마을은 또 한국 최대의 새우젓 산지입니다. 해마다 1천여 톤의 새우를 잡아 전국 새우젓 생산량의 60∼70%를 충당합니다. 전장포 마을 뒤편 솔개산 기슭에는 길이 102m, 높이 2.4m, 넓이 3.5m의 말굽모양 토굴 네 개가 있습니다. 토굴에서는 일년 내내 새우젓이 곰삭아 갑니다.
임자도 바다는 한국 최대의 민어 산지입니다. 과거에는 임자도 민어 파시가 유명했고 지금도 임자도 해역은 민어의 산란장이라 여름이면 꽉꽉 울어대는 민어떼 우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임자도는 면적 39.30㎢, 해안선 길이가 60㎞, 여의도의 5배가 넘는 큰 섬입니다. 야생에 들깨가 많이 자라는 까닭에 임자도라는 지명이 생겼다 하나 지금은 대파가 더 많이 납니다. 섬이지만 주민 80%가 대파와 양파 농사 등으로 생활하는 전형적인 농촌입니다. 24개 마을 중 3개 마을만 어업을 하고 나머지는 농업이 주업입니다. 임자도는 본래 하나의 섬이 아니었습니다. 여섯 개의 산을 중심으로 여섯 개의 섬들이 서로 떨어져 있었는데 산지가 침식되고 흘러내린 토사가 퇴적되고 거기에 간척이라는 인간의 노력이 더해져 하나의 섬으로 이어졌습니다.
임자도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유적이 있습니다. 임자도와 증도(曾島) 사이의 바다에서는 중국 송·원대의 보물이 다량 인양되기도 했습니다. 1711년 임자진(荏子鎭)이 설치되면서 임자목장(荏子牧場)이 개설되어 말 175마리를 길렀다고 합니다. 주변에는 수도(水島), 재원도(在遠島), 부남도(扶南島), 갈도(葛島) 등 64개의 부속 섬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산은 남쪽에 있는 대둔산(320m)이고, 북쪽에는 삼학산(165m), 동쪽에는 불갑산(224m)이 있습니다. 2012년 현재, 1,785세대 3700명의 주민들이 산다고 합니다. 전 823.4ha, 답 715.7ha, 임야 2,596ha가 있고, 특산품은 새우젓, 김, 천일염, 민어, 병어 등입니다.
▲ 국내 최대 염전인 태평염전 Ⓒ섬학교 |
국도 2호선의 시작
점암은 울산까지 이어지는 국도 2호선의 시작입니다. 신안군 지도읍 점암 선창가에서 임자도행 막 배를 탑니다. 임자도는 신안에 속한 섬이지만 신안군청이 있는 목포보다는 무안 읍내에서 더 가깝습니다. 농협 배가 밤늦도록 다니니 섬이지만 교통의 불편이 거의 없습니다. 오늘 막배의 여객은 모두 셋뿐입니다. 배를 탈 사람이 적어도 배가 떠주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여객이 단 한 명뿐이라도 여객선이 운항하는 것은 신안군이 여객선의 손실분을 보존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자동차를 실은 철부선이 임자도 선착장에 입항합니다. 시간만이 아닙니다. 공간 또한 절대적 공간은 없습니다. 20분의 짧은 항로지만, 막배가 끊기면 바다가 가로놓인 임자도와 점암은 영원처럼 멉니다. 부두에서 도보로 10여분. 임자면 소재지에 하나뿐인 여관을 찾아듭니다. 여관 주인은 구면처럼 반깁니다.
"어쩌다 이리 늦게 오셨소?"
"막배로 들어와서 밥 먹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여기는 손님 없으면 일찍 문을 걸어버려요. 그러면 못 들어와요."
"여관 간판을 못 찾아 한참 헤맸습니다. 혹시 여기 임자도에도 절이 있습니까?"
"쩌기 이흑암리라고 거기 가면 대동산이 있어요. 한동산이라고도 하는데, 거기 절터는 있어요. 산꼭대기에. 기왓장이랑 축대도 있고."
"거기 말고는요?"
"없어요. 절은 하나도 없고 교회는 많아요. 부락마다 하나씩은 있을 거요. 한 일고여덟 개 될랑가."
▲ 임자도 앞바다의 무인도들 Ⓒ섬학교 |
난파선에서 얻어간 불교 경전들
절 이야기를 물어본 것은 혹여 백암(佰庵) 성총(性聰, 1631~1700) 스님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까 싶어서였습니다. 불가의 학인 스님들이 강원이나 승가대학에 입학해 맨 처음 접하는 교과서가 <치문(緇門)>입니다. 오늘날 스님들이 <치문>을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은 백암 스님이 이곳 임자도에서 경전들을 얻어간 덕분입니다. 백암 스님은 조선 숙종 7년(1681년) 임자도에 표류한 중국 배에서 경전들을 수습해 갔다고 전해집니다. 백암 스님은 그때 임자도에서 <치문> 외에도 <화엄경 소초> <금강경 간정기> <기신론 필삭기> 등 190여권이나 되는 불교 경전을 함께 가져갔다고 합니다. 스님은 경전들을 순천 낙안의 징광사에서 간행해 보급했습니다. 한국 불교는 임자도와 인연이 깊지만 지금 임자도에는 단 한 곳의 절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람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나그네는 다시 잠들 수 없습니다. 한 목숨 보내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내내 봉순이의 혼백이 나그네를 따라 다닌 것일까. 봉순이는 끝내 섬까지 동행한 것일까. 보길도 시절부터 나그네와 10여년을 함께 살았던 진돗개 '봉순이'. 녀석을 떠나보낸 것은 섬으로 오기 사흘 전이었습니다. 나그네가 집을 버리고 떠돌면서 봉순이도 함께 떠돌았습니다. 보길도에서 강화로, 강화에서 경주로, 경주에서 또 인천으로, 봉순이가 마지막에 몸을 의탁한 곳은 인천의 어머니 집이었습니다. 봉순이가 아프다는 전갈을 받고 인천으로 달려가 동물병원에 데려 갔을 때는 이미 녀석의 간 기능이 80% 이상 정지된 후였습니다.
녀석이 나를 떠나지 못하는 것인가. 내가 녀석을 보내지 못하는 것인가. 봉순이는 자신의 생살이 찢어져 피가 철철 흘러도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성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속이 썩어가는 아픔도 저 혼자서만 삭였을 것입니다. 때로 그렁그렁 눈가에 맺히던 이슬이 아픔을 참아내는 녀석의 눈물이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왜 나는 그 고통을 눈치조차 못 챘던 것일까. 동물도 때로 괴로움을 참고 슬픔을 숨길 줄 안다는 것을 어째서 생각조차 못했던 것일까. 한 점 티끌이 날아올라도 대지가 다 들어 있고 한 송이 꽃이 피어도 세계 전부가 흔들린다 했습니다. 하물며 함께 마음 나누던 생명의 죽음 앞에 서랴.
임자면 면소재지라 해야 번화가는 아주 짧습니다. 면사무소, 농협, 파출소, 우체국은 한데 몰려 있고, 식당, 횟집이 서너 곳. 세탁소, 양복점이 하나씩. 그래도 가장 많은 것은 다방입니다. 다방이 네 개. 그래도 마트는 제법 큰 것이 둘이나 됩니다. 면소재지 번화가를 벗어나 넓은 터에 자리 잡은 콜 마트, 코사 마트. 청과, 수산물, 야채, 부식, 냉동식품에서 공산품까지 무엇이든 집까지 배달해 줍니다. 시골에서도 이제 작은 가게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면소재지를 벗어나 길은 진리 마을 입구에서 갈라집니다. 오른쪽은 전장포 방향. 대광해수욕장 길은 직진입니다. 진리 마을은 아마 옛날 임자도진이 있던 마을일 것입니다. 섬의 내륙 깊이까지 갯벌이 들어와 있습니다. 진리 삼거리에는 세 개의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축, OOO 손자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정시 합격'
'임자 초중고 축구 클럽 선수 모집'
'양파, 대파 퇴비 판매'
퇴비는 살포까지 해줍니다. 퇴비도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농사까지 대행해주는 곳이 생겼습니다. 노인들뿐인 농촌에서 그도 아니면 어찌 농사가 가능하겠습니까. 진리를 지나면 교동 마을입니다. 교동에는 염전이 많습니다. 옛날부터 임자도에는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도 많았습니다. 옛날에는 소금을 벗이라 했는데 그래서 임자도에는 버던, 들버지 같은 소금 관련 지명이 많습니다.
임자도 밭에는 마늘, 밭에는 쪽파, 밭에는 대파, 대파, 대파. 임자도의 밭은 온통 대파 천지입니다. 비금도에서는 논에도 시금치를 심었었는데 임자도의 논은 대파를 심지 않았습니다. 대파의 생장 기간이 길어 2모작을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대파는 4월말부터 6월 사이에 파종을 한 뒤 겨울에 가야 비로소 수확이 가능합니다.
춘천에서 품팔이 온 농민
교동 마을에서도 대파 수확이 한창입니다. 대파 밭 갓길에는 관광버스가 한 대 세워져 있습니다. 체험 관광이라도 왔나 싶지만 아닙니다. 일꾼들이 타고 온 차입니다. 일꾼들은 비닐 방한복을 입고 허리에는 대파 묶을 끈을 달고 허리 굽혀 대파를 뽑습니다. 논둑길을 지나 밭으로 갑니다. 논둑은 곧 허물어질 듯이 위태롭습니다. 논과 논의 경계이자 길이기도 한 논둑, 양쪽 논 주인들이 각기 제 논의 면적을 조금이라도 더 넓히기 위해 극한까지 파먹어 들어 왔습니다. 혼자 걷기에도 좁은 논둑. 기계화 영농 이후 논둑은 길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새참도 나르고 들밥도 나르고, 모도 던지던 논둑길. 다 지나간 옛 이야기입니다.
대파를 뽑는 일꾼들은 임자도 사람들이 아닙니다. 춘천, 충주를 비롯한 다른 지방에서 온 계절노동자들입니다. 이들도 이주노동자이지요. 대파 수확기 한두 달 정도 섬에 상주하며 돈벌이를 합니다. 일당 5만원. 여자는 그보다 덜 받습니다. 사내는 춘천에서 왔습니다.
"강원도도 똑같아요. 사람이 없어요. 젊은 사람들은 노가다 현장 나가는 게 낫고 그러니 농사 안 붙어 있어요."
사내는 춘천에서 7천 평 농사를 짓습니다. 제법 큰 농사지만 아이들 학비 대기에도 벅차다고 합니다. 노가다 현장 일도 없는 겨울에는 남쪽으로 내려와 일거리를 찾습니다.
"말로만 남쪽이 따뜻하다고 하지 되게 춥네요."
바닷바람은 칼바람입니다. 바람만 안 불면 한겨울도 초여름처럼 따뜻한 것이 남쪽 섬의 날씨지만 바람 불면 체감온도가 강원도 못지않습니다.
"7천 평 농사 지어봐야 겨우 돈 천이나 남아요. 이삼 천 평 짓는 사람은 먹고 살기도 힘들죠. 오천 평은 넘어야 겨우 먹고 살아요. 농사가 어디 돈이 되나. 부업으로 뭘 하고 현장이라도 나가야 돈 푼이나 만지지. 돈이 안돼요. 당최."
대체 7천 평이란 큰 농사를 짓는 농민이 농한기마저 쉬지도 못하고 강원도 땅에서 이 먼 전라도의 섬까지 흘러와 날품을 팔도록 강요하는 괴물은 무엇일까. 교육비, 아이들의 사교육비가 그 흉측한 괴물의 정체입니다.
▲ 송도 위판장의 민어 경매 Ⓒ섬학교 |
바다의 황금시대 임자도 타리 파시
임자도 서쪽, 하우리 앞 바다는 임자도 최대의 어항입니다. 일제시대, 여름철 7∼8월이면 임자도는 각지에서 몰려온 수백 척의 민어잡이 배들로 북적였습니다. 그 중에는 일본의 규수 지방에서 온 어선들도 많았습니다. 일본에서 온 상선들은 조선과 일본의 어선들이 잡은 민어를 얼음에 재워서 일본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일본으로 간 민어들은 고급 어묵의 재료로 쓰였다고 합니다. 이 무렵이면 임자도 하우리 해변과 그 앞의 대태이도, 소태이도 두 섬 사이의 백사장은 거대한 파시 촌이 형성됐습니다. 임자도 바로 앞의 대태이도를 일본인들은 타리섬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임자도 파시는 타리 파시로 불렸고 일본의 규슈 사람들은 목포는 몰라도 타리섬은 안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섬이었습니다. 지금은 무인도지만 타리 파시 때는 임자도 하우리 해변과 대태이도 사이 바다에 배가 꽉 차서 배들을 다리삼아 건너 다녔다 합니다. 대태이도, 소태이도는 섬타리, 하우리 백사장은 육타리라 했습니다. 섬타리, 육타리 양쪽에서 열린 파시를 타리 파시라 했습니다. 당시 신문기사에도 타리 파시 소식이 실려 있습니다.
"타리어장이 개시된 지 300년이 넘었다. 민어어장으로는 타리어장이 가장 크고 다음은 굴업어장. 농가 한 채뿐이던 섬 타리에 파시가 서면 가건물이 수백 개 생기고 어부만 수천 명, 놀러오는 사람들만 매일 50~60여명 왕래. 가건물 160호중 병원 1곳, 음식점 90호, 요리점 15호, 잡화상 6곳, 이발관 3곳 등. 요리점에는 일본조선 기생 합해서 130여명의 창기. 선구상도." (1938년 동아일보 임봉순 기자의 임자도 기행)
타리 파시가 서면 수십 곳의 요릿집, 색주가 선술집 등이 들어서고 잡화점과 선구상(船具商), 이발소, 이동 목욕탕 등이 생겼습니다. 술집에는 일본 게이샤를 비롯해 색시들만 100명이 넘었습니다. 매일 같이 어부, 상인, 색시들 수천 명이 들끓어 임자도는 도시의 유흥가를 방불케 했습니다.
칠월 칠석이면 풍어를 기원하는 고사도 지내고 활쏘기대회와 노래자랑대회도 열렸습니다. 어부나 상인들뿐만 아니라 각처에서 사람들이 놀러 왔습니다. 도시의 유흥가를 섬으로 옮겨놓은 셈이었으니 사람이 들끓었지요. 타리에만 임시 가옥이 100여호 생겼다고 합니다. 일본의 저장선도 100여척이 다녔답니다. 목포 군산 사이를 하루 4회 오가는 여객선 3척이 타리와 낙월도 두 섬을 경유했습니다. 언덕으로 파출소와 병원이 있었고 아래 모래사장의 첫줄은 색시 집들, 다음 줄은 잡화점들이었다. 파시는 여름 철 두 달 간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였습니다.
타리 파시에는 갖가지 슬픈 사연들이 전해집니다. 그중에서도 타리 기생 이야기는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기록이 없는 구전이니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어찌 없는 일을 지어낸 것이겠습니까. 그보다 더 참혹한 일도 많았던 식민지 시대 아니었습니까. 어느 해 여름 일본 어부에게 조선 기생 한 사람이 맞아 죽었습니다. 기생들은 주재소로 몰려가 항의했지만 살인자는 처벌 받지 않았답니다. 식민지 백성들의 비애였지요. 파시 촌에 있던 타리 기생 30여명은 동료의 억울한 원한을 풀길이 없자 다 함께 양잿물을 마시고 자결했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이들의 시신을 하우리 모래밭에 묻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구전으로만 전해져 안타깝기만 합니다.
지금도 임자도는 민어의 고장입니다. 여름철이면 산란을 위해 임자도 근해로 민어떼가 몰려옵니다. 이 무렵 잡히는 민어가 가장 맛있습니다. 임자도에서는 민어 중에서도 마른 민어를 최고로 칩니다. 임자도 사람들은 그것을 '건정'민어라 합니다. 이슬 맞추지 않고 일주일 정도를 말립니다. 보양식으로 건정 민어탕을 끓일 때는 남녀에 따라 끓이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남자들 먹을 것은 쌀 뜬물에 더덕을 넣고 끓인 반면 여자들은 쌀 뜬물에 산도랏(산도라지)을 넣고 끓였습니다. 이것을 민어곰탕이라 했습니다. 산모에게 특히 효과가 많아 산도랏 건정 민어탕을 먹으면 젓이 쑥쑥 잘도 나온다고 합니다.
▲ 장장 12km의 임자도 대광리해수욕장 Ⓒ섬학교 |
명사 삼십 리, 이 나라에서 가장 긴 해수욕장
이즈음 대광해수욕장 입구의 상가들은 개점 휴업중입니다. 모텔과 민박 몇 집, 슈퍼마켓, 횟집에 나이트클럽까지 있지만 모두 여름 한철 장사입니다. 명사십리만 되도 큰 해수욕장이라 합니다. 그 유명한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도 길이가 6킬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곳 대광해수욕장은 12킬로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긴 해수욕장입니다. 오늘 대광해수욕장은 오로지 나그네 한 사람의 것입니다. 이 장대한 백사장을 독차지 하는 행운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행운은 누구라도 누릴 있는 것입니다. 여름 피서 철만 피한다면 이런 행운은 당장이라도 나의 것이 됩니다. 바다는 파도는 온통 나에게만 말을 걸고 내 안으로 자맥질 처 들어옵니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은 나에게만 다가와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 해변도 근래까지 대광해수욕장이라 불렸었는데 지금은 대광해변이란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몇 년전 제가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라는 여행 칼럼을 연재하고 책으로 묶어낼 때 해수욕장이 아니라 해변이란 이름을 쓰자고 제안했었는데 해변이란 이름을 보니 반갑습니다. 나그네는 해수욕장이란 이름이 못마땅합니다. 물놀이가 가능한 이 나라 거의 모든 해변은 해수욕장이란 간판을 달고 있습니다. 해수욕장은 해변을 그저 여름 한철 물놀이 장소로 제한시키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해변은 어느 철이든 산책하고 사유하기 좋은 곳입니다. 이곳도 대광해수욕장보다는 대광해변이 사람들을 더 친밀하게 이끌어 줄 것이 자명합니다.
대광 해변 길은 대부분이 단단한 모래밭이라 걷기에 편안합니다. 나그네의 발길이 가볍습니다. 해변의 초입에서부터 흰둥이 진돗개 하나가 나그네를 따라 옵니다. 나그네가 멈추면 저도 멈추고 나그네가 움직이면 저도 따라 움직입니다. 잠깐 사이에 정이 들었습니다. 흰둥아, 봉순이의 영혼이 잠시 너의 몸을 빌려 함께 가는 것이냐. 나그네는 서러움에 왈칵 눈물이 돕니다.
해변 모래톱에는 어디서 흘러 왔는지 통나무 하나 해풍에 하염없이 몸 말리고 누웠습니다. 쓸모없이 버려진 듯 보이는 저 나무도 실상 쓸모없는 나무는 아닙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아직 쓰임새를 못 찾은 것일 뿐. 쓰임새만 찾아진다면 만물이 다 요긴하지요. 저 통나무도 집 짓는 곳으로 간다면 튼실한 기둥이 될 것이고 바다에 떠다닌다면 조난자의 생명을 구해 줄 구명선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흰둥이는 나그네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그저 묵묵히 삼 십리 해변의 끝까지 따라왔습니다. 침묵해야 할 곳에서 침묵으로 함께 해주는 길동무란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섬학교 제5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7월 7일 토요일 : 증도 태평염전과 임자도 걷기>
06:30 서울 출발
11:00 증도 도착
11:20-12:20 태평염전 소금밭전망대, 염생식물원, 염전 길 걷기(1km)
12:30-13:30 증도 <오산슬로푸드식당> 점심(짱뚱어탕, 낙지비빔밥, 간장게장 중 택1)
14:30 지도 점암 선착장 승선(버스가 섬에 들어감)
14:45 임자도 도착
15:00 숙소 도착(대광리 해변 임자팬션)
15:30-17:30 임자도 걷기(4km)
대광리 숙소 출발 → 벙산 → 광산재(도구잔등, 하우리 잔등) → 하우리 해변
18:00-20:00 저녁식사(임자도 <서울여인숙식당> : 복달임에 일품인 임자도 민어회와
민어탕 뒷풀이)
20:00 휴식 및 취침
<7월 8일 일요일 : 명사 삼십리 임자도 백사장 걷기(12km)>
06:00 기상
07:00-08:00 아침식사(대광 해변 <털보네식당> : 한식)
08:20-10:40 숙소 출발 → 솔숲 → 신안군 청소년수련관 → 도찬리 → 전장포
11:30 임자도항 승선
12:00-13:00 점심(송도 <신안횟집> : 우럭매운탕)
13:00-13:30 송도 위판장의 민어 경매 견학
13:40 서울 향발
<학습자료>
[대둔산성지] 임자도 이흑암리 대둔산(280m) 정상에 위치한 퇴뫼식 산성이다. 대둔산성은 대체로 조선 숙종 37년(1711년) 임자진이 설진될 당시에 초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자진 지도에는 봉태로 표시되어 있으나 이 산성은 봉태를 겸한 돈태지 규모의 산성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과 현존 유구를 볼 때 조선시대 '물림쌓기' 방식에 의해 구축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대둔산성의 초축은 조선조 숙종 37년 임자진의 설진 시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유물이 없다. 특히 산정에는 헬기장이 조축되어 있어 성축의 훼손 정도가 심한 편이다. 대둔산성의 서쪽으로 재원도, 동쪽으로는 지도, 남쪽으로는 바다, 북동쪽으로는 진리(진도)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 대둔산정에서는 이들 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화산고인돌] 화산리 부락 김기지 씨 집 뒷터에 지석묘 3기가 있다. 일명 개구리돌이라고 불리는 상석은 6.25전쟁 당시에 깨졌다고 하는데 흔적을 확인할 수가 없다. 상석 크기는 장축 400cm, 단축 250cm, 두께 100cm 이고 타원형으로 이루어졌다
[화산단] 섬지방의 유림 인사들은 외세 침탈 등 국가적 위기의 해결 방안으로 위정척사를 주장하였다. 특히, 임자도의 유림들은 화산 산록의 바위에 '위정척사'라는 명문을 새겨 강렬한 척사 의지를 천명하고 당시 임자의 대표적 유림 인사들이었던 김두후, 이학재, 임행재, 박종현은 일제 시대였던 1916년 화산 산록에 단을 설치하였다. 당시 경향에서 크게 활약하였던 화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 중암 김평묵, 송사 기우만 등 위정척사 사상의 지도자들을 추앙하였다. 이흑암리 123-1에 있다.
[우봉 조희룡 유배지] 우봉 조희룡(1789∼1866년)은 조선후기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룬 문인화의 대가이다. 1789년 5월 서울에서 태어나 조선후기 매화도와 묵란도에서 고유의 화풍을 확립한 화가로 1847년 벽오시사를 결성, 후배화가들을 이끌고 문인화단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추사 김정희 등이 도입한 중국 남종문인화로부터 이념미를 재제한 조선적 감각을 가미한 새로운 화풍의 세계를 열었던 인물이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서로 번갈아 가며 세도정치를 하던 시기에 활동한 조희룡은 예송논쟁에 휘말려 1851년 임자도로 유배되었다. 임자도 이흑암리 마을에서 3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기거하는 오두막집을 "만마리 갈매기가 우짖는 집"이라는 뜻의 '만구음관'이란 편액을 걸고 집필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조희룡의 임자도 유배시절 초가집인 만구음관의 터만 남아있고 당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05년 이흑암리 마을에 조희룡 기념비를 건립하고 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용난굴: 전설 속에 용이 나왔다는 높이 5m, 폭 2m 규모의 자연동굴 용난굴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신안의 명소 중에 하나다. 이흑암리 육암마을 남쪽 약 1.7km의 해안에 유난히 곱고 미세한 모래들로 구성된 백사장과 용난굴(용출암)이 있다. 어머리해수욕장 끝, 바다로 통하는 큰 동굴이 '용난굴'이다. 중국에서 청자를 싣고 오던 배가 임자도 앞바다에 침몰했는데, 살아남은 선원들은 섬 주민들 보살핌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늘 고향이 그리웠다. 선원들은 용난굴 바위에 앉아 고향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는데 그 눈물이 바위에 떨어져 구멍이 났다. 그러자 바위 속에 웅크리고 있던 용이 그 구멍을 뚫고 승천해 지금과 같은 형상이 됐다고 한다. 그 용은 고향으로 돌아간 선원들의 넋이 아니었을런지.
태평염전: 전남 신안군 증도에 있는 국내 최대의 단일 염전이다. 청산도와 함께 슬로시티로 지정된 증도는 2010년 3월 다리가 놓여 육지로 편입되어 더 이상 섬이라 볼 수 없다. 태평염전의 규모가 무려 여의도 면적의 두배인 462만㎡다. 등록문화재 제360호. 한국전쟁 후인 1953년 피난민들을 정착시키고 소금생산을 늘리기 위하여 조성한 염전이지만 지금은 개인 소유다. 태평염전은 증도와 그 옆 섬 대초도 사이의 갯벌을 막아 형성된 간척지에 들어서 있다. 매년 15,000톤의 천일염이 생산되는데 국내 생산량의 5%나 된다. 염전은 67개로 나뉘어 있고 이에 딸린 67동의 소금창고가 3㎞에 걸쳐 늘어서 있다. 염부(鹽夫)들의 사택, 목욕탕, 관리사무실 등이 남아 있고 초창기에 세운 석조건물은 소금박물관이 되었다.
소금은 천일염과 정제염(精製鹽)으로 분류된다. 천일염은 바닷물을 염전으로 끌어와 바람과 햇빛으로 수분과 함께 유해 성분을 증발시켜 만든 소금이다. 정제염은 바닷물을 전기분해하여 이온수지막으로 불순물과 중금속 등을 제거하고 얻어낸 염화나트륨(NaCl)의 결정체다.
한국에서는 수심이 깊지 않고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서해안이나 남해안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인도양, 지중해 연안,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도 생산된다. 신안군은 국내 천일염 생산량의 65%를 생산한다. 염전도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이다. 교장 | 강제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일부 풀숲 구간에선 필히 긴 바지^^), 스틱, 물통, 윈드자켓, 우비(+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학교 제5강 답사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 강의비,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23만원입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