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차 답사>는 <1차 답사>와는 달랐다. 특히 주민들과의 공식적인 대화나 주민들로부터 직접적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사전에 준비도 부족했거니와 이번 답사는 마을에 정주하는 예술가들의 활동이 매우 다양하고 개성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처음에 방문한 김봉준 화백의 '신화마을'은 아직도 마을 주민들과 '신화'를 매개로 공동체로서의 일체감을 갖기에는 주민들에게 아직도 낯선 주제로 보였다. 극단 '노뜰'은 예정에 없던 방문이었으며 '이달의 꿈' 손곡리 마을도 사전에 준비가 안 돼 극단의 주요 멤버들과의 대화로 마감해야했다.
'내촌 목공소'의 이정섭 목수도 그가 사전에 예고한 대로 아직까지 마을주민들과의 교류에 그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같은 마을의 이진경 작가와 '쌈지농부'의 젊은 미술가들도 지금 막 주민들과 트고 지내는 참에 불과했다. 좀더 숙성이 필요해 보였다.
마지막 이선철의 '감자꽃 스튜디오'는 그의 활동범위가 평창만이 아니라 주문진 재래시장 등 광역화(?) 되어 한 마을의 주민 몇 명만을 모아서 같이 얘기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직접 주민들과의 대화가 부족했다 하더라도 이번 <2차 답사>는 예술가들의 활동이 서서히 주민들 사이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확인했고 '감자꽃 스튜디오'처럼 다양한 활동을 통해 주민들의 삶에 문화와 예술로 접근해 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알았다.
<2차 답사>를 통해 지역의 다양한 활동과 예술가들과의 네트워킹이 마을공동체에 더욱 활기를 불어 넣기를 희망하며 연재를 이어간다.
신화에 꽂힌 원주 문막 취병리의 김봉준 화백
▲ 자그마한 집들이 드문드문 있는 산 속 길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면, 재미있는 표정의 동물 조형물 들이 마당을 지키는 신화미술관이 나온다. |
골짜기를 돌고 돌아 마지막 진밭마을에서 비포장도로를 조금 더 가니 마을의 마지막 집, 신화미술관 앞에서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김봉준 화백이 우리를 맞는다.
그가 신화미술관 마당에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조형물부터 신화의 느낌을 강력하게 주었다. 미술관 입구의 현관에서부터 그림과 작은 조형물들, 주로 테라코타로 만들어 놓은 조소상이 모두 신화와 관련된 인물이거나 동물들이었다.
▲ 해학적인 표정을 띄고 방문객을 맞는 조형물들. 길은 신화미술 관에서 끝나지 않고 끝이 안보이는 산 속으로 이어진다. |
그는 80년대 민중미술운동에서 '두렁'이라는 집단을 이끈 맹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연행과 결합한 일종의 걸개그림인 '산그림'을 만들어 미술을 탈춤 등 연행과 결합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현실과 발언'을 통해 미술운동에 참가했던 나 같은 사람은 서구의 화법과 미술관, 화랑 중심이었던 데 비해 김봉준의 '두렁'은 과감하게 새로운 토착적 언어(탈제작, 만화, 민화, 불화 등)와 걸개그림을 들고 현장에 과감하게 뛰어 들었다. '두렁패'는 화랑 중심의 미술운동을 사회문화운동으로 지평을 넓힌 셈이다.
▲ 미술관 안 입구 쪽에 붙어 있는 그림과 글이 눈에 띈다. 김봉준 화백이 강조했던, 신화를 통해 자신 의 '정체성'의 원형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
그 당시 그들의 전시는 연행을 곁들인 일종의 집회였다. 80년대 초에 그들의 아지트(전시장)인 '애오개 미술학교'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 때의 당황스러움이라니. 탈춤과 사물놀이 등이 어우러진 춤판, 비나리 등이 왁자한 현장의 열기는 그 당시의 나에게는 '생'짜 그대로였다.
80년대 중반까지 현장에서 활동하던 김봉준은 그 뒤 자취를 감추기도 하고 잊을 만하면 홀연히 나타나기도 했었다. 그 사이 이한열 열사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고 병을 얻어 치료를 겸해 이 곳 문막으로 들어왔다는 얘기는 소문으로 들은 바 있다. 그 동안 행사장 같은데서 뜨문뜨문 만나기는 했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얼 하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고 지낸 편이다.
▲ 김봉준 화백의 부인 이선형씨의 설명을 들으며 작품들을 보니, 신화 속의 인물들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같다. 신화가 가지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풀어서 들려주 는 이선형씨의 열정적인 설명에 웃음과 감탄사가 끝없이 이어진다. |
'해모수와 유화, 주몽에 얽힌 신화'로 시작하여 '환웅과 웅녀 그리고 단군 신화', '제주도 할망신화', '대지의 신- 여성', '도깨비신화', '저승길 신화' 등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외에도 동북아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캄차카 반도는 신화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신화의 보고'란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신화에 관한 얘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김화백과 이선형씨가 번갈아 가면서 얘기를 하기도 했다.
▲미술관 안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거대한 여신상. 신전에 들어선 느낌이 들어 숙연해진다. |
이 외에도 그들은 마을에 있는 당산, 입향신부터 빨래터신, 조방신, 뒷간신을 지나 지신밟기 까지 머나먼 신들로부터 가까운 동네 신들 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면서 마을은 신화의 보고이며 마을 공동체의 복원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화 설명 중간 중간에 자기 자신의 '상처와 치유'에 대해 잠깐씩 언급 하곤 했다. 그는 지금까지 많은 정신적인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는 자기의 상처를 이러한 신화와 예술로 치유했다고 하면서 칼 융의 무의식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특히 집단 무의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화되어 있는데 이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신화와 예술이라고 설명한다.
▲ 신화미술관 내부 전경. 신화로 가득한 이곳에서 김 화백 부부의 열띤 설명을 들으며 모두가 나름대로 열심히 필기도 해가며 신화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
나는 김봉준의 얘기를 들으면서 '예술의 시원'을 탐구한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을 떠 올렸다.
"… 우리는 자신의 감각이나 사고가 '야생'의 상태였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나 단지 잊었을 뿐, 그 야생은 생명과 연결된 무의식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그 무의식 속에 잠재된 감각과 사고의 야생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일어서게 하고, 그것에 표현을 부여 할 수 있는 지성 형태를 '예술'이라고 부르려 한다. …"
김봉준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정신적인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이를 '호머 상처(傷處)러스'라고 내 후배가 우스갯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그렇다. 어떤 인간도 정신적인 내상 없이 살아가지는 못하리라. 그래서 우리들에게 예술이 필요하지 않을까?
▲ 설명을 듣고 나와 미술관 입구를 보니, 들어갈 때 지나쳤던 것들이 다시 눈에 띈다. 김화백의 대학졸업 작품인 여인 조각상과 '오랜 미래', '대지 어머니' 등의 문구가 새삼 가슴에 들어온다. |
점심을 먹기 위해 미술관 밖으로 나왔을 때 들어갈 때는 무심코 지나쳤던 여인조각상이 바로 문 입구에 등신대로 서 있었다. 김봉준의 대학생 때 졸업작품이라고 했다. 제목이 '투사의 아내' 인데 70년대가 유신 말기라 작품의 제목이 불온(?)하여 교수들이 전시를 못하게 했단다. 상처받은 김봉준은 그때부터 민중미술로 돌았다고 한다.
▲ 마을의 전 이장님이 오셔서 마을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셨다. 왼쪽부터 임수경 전 이장, 김봉준 화백, 필자 |
밥 먹는 동안에 김화백이 이 마을에서 주민들의 동의를 받아 벌렸던 '숲과 마을' 축제 얘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축산을 주 생업으로 하는 20~30 가구의 마을 주민들은 마을 축제라고 하니 처음엔 멋모르고 찬성을 하고 같이 어울렸는데 자기들 축산업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그 축제는 두 번하고 끝이었다고 한다.
김화백은 신화마을을 부론면 손곡리 '이달의 꿈' 극단과 함께 사회적 기업 <신화마을 네트워크사업단>으로 등록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극단이나 미술관이 자체 수입이 없어 운영이 어렵다고 솔직히 털어 놨다. <신화마을 네트워크>사업단의 하나인 손곡리를 안내하기 위하여 원주의 문화활동가인 김기봉과 원주 민예총의 이상훈이 진밭마을로 와 우리와 같이 식사를 했다.
▲ 신화미술관 앞에서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산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갔다. 왼쪽부터 김송희, 박명학, 임수경, 필자, 이선형, 김봉준, 채은영 |
그는 우리와 헤어지는 걸 아쉬워했다. 할 말이 많았으리라. 그가 기본적으로 설정한 사회의 기본 원형으로서의 마을과 우리 <예마네>에서 구상하고 있는 자치 마을의 개념이 다르지가 않다. '자네의 신화마을 네트워킹이나 우리의 예술과 마을 네트워킹이나 본질적으로는 지향하는 바가 같네, 우리가 어느 정도 마을들을 탐사하고 나면 뭔가 같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지 않을까?', '마을 공동체의 복원을 위해 넘어야할 산이 많네, 같이 힘을 합쳐 보세.' 그와 나는 희망 섞인 몇 마디를 주고받고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마을을 향해 떠났다.
(예술과마을네트워크 까페 http://cafe.naver.com/yem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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