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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한 사회에서 '보편적 시민권'이란…

[김윤태 칼럼] 시민권 이론을 다시 생각하며

독일 베를린 서쪽 방향에 룰레벤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1936년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의 스타디움에서 가까운 지역이다. 또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 정부의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이기도 했다. 그 당시 캠브리지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던 T. H. 마셜은 외교관이 될 꿈을 가지고 독일에서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일과 영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독일에 거주하는 모든 영국 사람은 룰레벤 수용소에 끌려갔다. 수용소에는 약 4000~5500명이 억류되었으며, 대부분 영국인이었다. 마셜은 21살의 나이에 수용소에 들어갔는데,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무려 4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자유를 잃어버린 강제 수용소에서

마셜은 4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자유의 박탈'을 경험했다. 물론 마셜이 당시 수용소에서 <콰이 강의 다리>에 나오는 영국군 포로처럼 잔혹한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룰레벤의 수용소에서는 강제 노동과 잔혹한 처우는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영국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거의 보장되었다. 독일 정부는 제네바협약에 따라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의 자율적 활동을 인정해야 했다. 점차 수용소에는 조그만 '사회'가 형성되었다. 편지도 쓰고, 책도 읽고, 스포츠도 즐길 수 있었다. 자체적으로 잡지를 발간하고, 도서관을 만들고, 우체국도 만들었다. 그들은 음악 단체, 연극 단체, 도박장도 만들었다. 심지어 경찰도 결성했다. 이처럼 수용소 내부의 '자유의 박탈'과 '권리의 향유'라는 모순적 조건은 마셜에게 분명히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으로 돌아온 마셜은 외교관의 꿈을 버리고 학문의 길을 걸었다. 1919년부터 런던정치경제대학(LSE) 교수로 활동했으며 계급과 지위에 관한 사회학 논문을 주로 발표했다. 그는 당시 런던정치경제대학 사회학 교수였던 홉하우스의 '새로운 자유주의(new liberalism)' 철학에 크게 공감했다. 이는 요즘의 신자유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자유주의 사상이 더욱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적 자유주의'에 가깝다. 그는 런던정치경제대학의 총장이며 유명한 '베버리지 보고서'의 작성자이었던 윌리엄 베버리지의 복지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프레시안

시민권 이론의 탄생

1950년 마셜이 출간한 <시민권과 사회계급> 제하의 논문은 시민권에 관한 가장 유명한 논문이 되었다. 마셜의 시민권 이론은 이 주제의 가장 고전적인 연구로 평가를 받는다. 마셜은 '시민권'의 발달을 역사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18세기 서유럽에서 출발한 자본주의경제에서 만들어진 사회계급은 기본적으로 불평등한 체계이다. 이에 비해 시민권은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부여되는 '지위(status)'로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보유할 수 있는 자격을 가리킨다. 마셜은 불평등한 체계인 사회계급과 평등한 체계인 시민권은 역사적으로 경쟁하면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마셜은 <시민권과 사회계급>에서 시민권이 '공민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요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18세기에는 주로 법적 지위와 관련된 시민적 권리(공민권)가 발전하였으며 주로 법정을 통해 보호되었다. 19세기에는 보통선거권과 같은 정치적 권리가 발전했으며, 의회를 통해 표출되었다. 20세기에는 사회적 권리가 확대되었으며, 주로 전쟁 상황과 노동계급의 투쟁을 통해 발전했다.

마셜이 세 번째로 지적한 '사회권'은 시민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마셜은 사회권이 기본적으로 시민사회가 성장하는 토대였던 공민권과 민주주의의 토대였던 정치권이 상호작용한 결과라고 보았다. 다른 한편 마셜은 사회권은 역사적 시기를 볼 때 20세기에 확립된 권리라고 지적했다. 사회권은 적정 수준의 경제적 복지에서부터 사회적 유산을 공유하고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문명화된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킨다. 사회권에서 주장하는 기본적인 건강, 교육, 주택, 소득 보장, 사회보장 등에 대한 권리는 이후 현대 복지국가의 제도적 토대가 된다.

복지국가의 토대가 되는 보편적 사회권

마셜의 시민권 이론, 특히 사회권의 개념은 현대 복지국가의 형성에 있어 중요한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하였다. 마셜은 "사회적 시민권이야말로 복지국가의 핵심 개념을 구성한다"고 강조했다. 시민권의 확립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사회계급 제도가 발생시키는 불평등을 수정할 것이며, 균등한 소득은 아니더라도 균등한 권리에 기반한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곧 시민권의 확대가 불평등한 자본주의사회를 평등한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마셜의 사회권에 관한 정의는 현대 복지국가의 지속적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시민권은 현대 복지국가에서 기존의 '잔여적' 복지 모형과는 다른 '보편적' 복지 모형의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정책의 발달에 기여하였다.

모든 시민이 동등하게 시민권을 가진다는 관념은 누구나 동등한 삶의 가치를 가지며 인간의 존엄을 누릴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마셜이 자선과 박애를 기초로 빈민에게 구호를 제공했던 기존의 복지에서 권리 개념을 기초로 전 국민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보편적 복지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일으켰으며, 복지를 제공하는 일차적 책임이 국가에 있다고 지적한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불평등의 시대와 시민권

돌이켜보면 지난 60여 년 동안 마셜의 시민권 이론은 시대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지만, 지금까지도 시민권에 관한 가장 중요한 고전적 논의로 평가받고 있다. 마셜의 시민권 이론은 자유시장, 탈규제, 공기업의 사유화, 복지 축소 등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불평등한 사회에서 보편적 시민권이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가질 것인지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20세기 중반 복지국가가 출발했던 시대에 마셜이 던졌던 질문은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영감을 줄 것이다.

* 이 글은 2013년 8월 출간할 T. H. 마셜의 <시민권과 복지국가>(이학사)에 게재한 옮긴이 김윤태의 글 '불평등한 시대에 <시민권과 사회계급> 다시 읽기'에 소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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