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의 정당들은 강령 제정과 개정을 위해 수일간 전당대회에서 축조심의를 하고, 항목마다 찬반 토론과 표결 절차를 통해 결정한다. 마치 국회의 법안 심의와 표결과 같은 절차를 따른다. 이는 당원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당원들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며, 나아가 국가의 운영 방향을 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새로운 강령을 개정하기 위해 선거 이후 1년 이상 장기적 연구를 통해 제안서를 제출한다. 강령은 바로 정당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한국 정당의 강령을 보는가?
▲ 회의를 하고 있는 문희상 비대위 위원장. ⓒ연합뉴스 |
정당은 누구를 대표하는가?
최근 민주당의 정강정책 공청회에 참석하여 토론자로 의견을 밝힐 기회가 있었다. 여기에서 나는 민주당이 누구를 대표하는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당은 사회 균열을 대표하고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사회통합을 위해 정치적 합의를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양대 정당인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계급정당이 아니라 국민정당을 자처한다. 물론 양대 정당은 지역주의적 정치 기반을 갖고 있지만, 모든 계층의 대변자를 표방한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여론조사를 보면 새누리당은 자영업자, 고소득 관리직의 지지가 많고, 민주당은 화이트칼라, 블루칼라 노동자, 학생의 지지가 많다.
정치학자들은 지지 정당과 이념 성향이 높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민주당은 진보와 중도 성향 유권자를 대변하고자 노력하는 반면에, 새누리당은 보수와 중도 성향 유권자를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바로 무엇인 보수이고, 진보이고, 중도인지 구분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수적 유권자도 무역 자유화와 개방경제를 지지하는 경우도 있고, 진보적 유권자도 시장경제와 재정 균형을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중도 유권자의 경우는 혼란스럽기도 한다. 이들은 양대 정당을 거부하고 제3후보를 지지하는 경향이 강한 무당파 유권자들이 많다. 하지만 중도 유권자와 무당파 유권자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무당파 유권자 가운데 일부는 뚜렷하게 진보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안철수 현상의 진원지도 무당파층이 많았다. 하지만 탈물질주의 가치와 삶의 질을 선호하는 서유럽의 무당파와 달리 한국의 무당파는 뚜렷하게 일관된 정책 선호를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중도 유권자의 정책 선호를 보면, 사회경제 정책은 진보적인데 비해, 외교안보 정책은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바로 민주당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민주당의 정치적 진화
1955년 이래 민주당은 지주 출신 엘리트로 구성된 보수적인 한민당 계열의 민주당 구파와 종교계, 시민단체, 노동조합을 대표하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신파의 세력이 공존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당 신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1960년대 이후 민주당은 점차 도시 중산층의 지지를 획득하면서 중도 성향과 진보 성향 유권자의 지지를 확대했다. 1998년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공식적으로 독일식 사회적 경제 또는 영미권의 제3의 길 정치에 관심을 가졌지만, 대체로 '중도개혁주의'를 이념으로 표방했다.
2008년 촛불 민심이 폭발하면서 새로운 변화가 발생했다. 같은 해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민주당의 이념은 진보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중도진보주의'를 표방했다. 결국 민주당의 정치적 목표는 중도와 진보 유권자의 지지를 모두 얻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최근 대선 평가에서 좌클릭이냐 중도화냐 논쟁처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는 것은 지지층을 축소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결국 민주당은 중도의 정치적 포지셔닝을 강화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진보 유권자의 지지를 획득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재정 건전성의 덫
그런데 민주당의 문제는 중도성향과 진보성향의 정책이 충돌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2013년 전당대회 강령 개정에서도 갈등이 일어났다. 새로운 개정안은 "기업의 건전하고 창의적인 경영활동"과 "재정 건전성"을 강조했다. 또한 "튼튼한 안보", "한반도 비핵화", "북한인권"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나는 튼튼한 안보와 비핵화, 북한 인권에 대한 새로운 입장은 국민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다른 한편 '원전 제로시대'를 표명한 것은 진일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정규직 차별 철폐" 등 노동 조항이 대거 삭제되고, "보편적 복지"라는 표현을 삭제한 점은 매우 큰 오류이다. 이러한 개정안은 중도 유권자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인 것 같지만,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먼저 "재정 건전성"은 복지와 연구개발을 위한 국가의 공공 투자를 강조하는 입장과 상충된다. 보수적인 박근혜 정부도 12조의 막대한 추경예산을 편성하는 마당에 민주당이 건전재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과거의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에 투항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물론 모든 복지는 국민의 세금과 사회보험 기여금으로 충당된다. 그런 점에서 '무상복지'라는 표현은 잘못 되었다.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ES) 크리스토퍼 폴만 소장은 '무상복지'라는 표현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내게 말했다. 일찍이 스웨덴 사민당 정부의 한센 총리도 복지국가는 산타클로스 국가가 아니라고 말한바 있다. 복지 예산을 확대할 생각이면 어떻게 재정을 충당할 것인지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복지는 확대하겠다고 말하면서 재정 건전성만 말한다면 논리적 모순을 일으킨다.
보편적 복지가 중요한 이유
더 심각한 문제는 '보편적 복지'라는 문구를 삭제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복지국가가 미국식 복지로 갈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물론 보편적 복지는 스웨덴에서 100퍼센트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유당 출신이었던 영국의 윌리엄 베버리지가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한 '베버리지 보고서'를 발표했을 때 가장 인기를 끈 것은 바로 '보편주의'의 원칙이었다.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복지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은 영국인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복지국가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한 제도이다. 그러나 경제의 사회화 또는 국유화가 아니라 시민권이라는 사회적 평등을 제공하여 민주주의의 원칙을 실현하고자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유럽의 보수정당도 당연히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지지한다. 특히 교육과 보건 서비스에서 보편주의의 원칙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이는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고 노사평화와 사회이동의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왜 보편적 복지를 제공하는 스웨덴과 독일의 경제가 최근 가장 경쟁력이 있는지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 가난한 사람만 선별하여 복지를 제공하는 경우 오히려 중산층은 왜 가난한 사람의 복지를 위해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지 불만을 터뜨릴 것이다. 이들은 세금을 내는 대신 민간병원, 사립학교, 개인주택을 선호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선별적 복지는 조세저항, 빈부격차, 사회갈등의 심화, 범죄의 증가라는 사회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지난 대선, 좌클릭 때문에 진 것이 아니다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좌클릭'이 패인이라는 지적은 상당수 과장된 주장으로 보인다. 주로 사회경제적 정책의 진보성을 지적하기보다 대북정책, 안보 분야의 좌편향을 지적하는 의견이 많다. 사실상 경제민주화, 복지국가를 새누리당이 흡수했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정책 논쟁은 선거 쟁점이 되지 못했다. 결국 민주당의 좌클릭 논쟁은 주로 외교안보 분야에 집중된 반면, 사회경제적 분야는 새누리당의 좌클릭으로 정책의 차별화가 실패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정당의 신뢰감이다. 새누리당의 복지 공약은 유권자의 태도에 변화에 빠르게 반응하는 긍정적 효과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민주당은 새누리당에 비해 더 현실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구체적 공약으로 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야 했는데, 이에 대한 대책이 부족했다. '좌클릭' 정책으로 평가를 받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를 가장 잘 할 후보로 문재인 후보가 아닌 박근혜 후보가 꼽혔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문재인 후보는 경제민주화와 정치개혁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한겨레신문과 리서치플러스 10월 5~6일 여론조사).
민주당, 신뢰감이 부족하다
정책의 '좌클릭' 보다는 공약의 이행에 대한 '신뢰'가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안정감과 신뢰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후보는 박근혜 후보보다 일관되게 낮은 평가를 받았다. 증세 없는 복지 확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57%에 달하는 상황이었다(조선일보·중앙선거관리위원회·미디어리서치 2012년 12월 5일 여론조사). 증세 없이 적극적인 복지확대를 펼치겠다는 문재인 후보의 공약이 큰 호소력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유권자들은 작더라도 확실한 박근혜식 복지 확대를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민주당은 정책의 수정에 대한 효과적인 설명이 부족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노대통령은 한미 FTA, 제주해군기지는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고 했으나,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은 진보진영에 호소하기 위해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제주 해군기지의 재검토를 주장하였다. 충분한 설명과 논리 없이 진행된 민주당의 정책 변경이 국민에게 불신을 준 것이 대선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정책의 변화를 넘어 말을 바꾸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신뢰를 얻기는 어려웠다. 결국 좌클릭 자체가 영향을 줬다기보다는 일관성이 없는 모습, 원칙이 없는 리더십의 이미지가 중도층의 신뢰 획득에 악영향을 미쳤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일관성의 문제, 복지 확대에서는 현실성의 문제가 바로 유권자의 신뢰를 약화시켰다.
민주당, 어디로 갈 것인가?
전반적으로 유권자의 이념 지형이 중도와 진보의 비중이 비슷하지만, 민주당은 두 가지 이념 성향의 유권자를 모두 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도 유권자를 단순화시켜 사회경제 정책의 진보성을 약화시켜서도 안 되지만, 중도 유권자를 단순히 부동층으로 평가절하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제 유권자의 이념 지형을 볼 때 중도 또는 진보 어느 한 쪽의 지지만으로 정권의 획득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민주당은 연합정치의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정치의 예술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의 중도·진보주의가 곧 보수적 가치에 투항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보수적 가치인 균형 재정, 민영화, 탈규제, 감세, 무역 자유화에 맞서 공공투자, 효과적 규제, 누진세, 국익 우선 통상정책의 전략적 방향을 강조해야 한다. 만약 보수적 가치와 구별되는 이념과 생활 밀착형 정책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집권의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당의 강령에서 '재정 건전성'은 삭제하고 '보편적 복지'는 즉각 복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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