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동물 홀로코스트다."
구제역이 '재앙' 수준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해11월 말 경북 안동에서 최초 발생해 경북 일대를 휩쓴 구제역은 12월 14일 경기 양주로 옮겨가 삽시간에 국내 최대의 양돈 밀집 지역인 경기도를 집어 삼켰다. 경북의 한우산업과 경기의 양돈산업은 거의 '괴멸' 상태에 이르렀고, 1월 14일 현재 전국에서 살처분 된 소·돼지만 해도 150만 마리가 넘는다. 최근 열흘 사이 하루에 10만 마리 정도의 가축이 구덩이에 묻힌 셈이다.
▲ 구제역의 전국적 확산으로 살처분 된 가축만 150만 두에 이르렀다. 가축을 잃은 축산 농가에선 "더 파묻을 땅도 없다"는 탄식이 나오고, 실제 엄청난 규모의 살처분으로 돼지의 경우 안락사 없이 생매장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한국동물보호연합 |
'보름 안에 완치되는' 구제역, '공포의 병' 되기까지
구제역(口蹄疫)은 소·돼지 등 발굽이 둘로 갈라진 우제류에 걸리는 1급 가축전염병이다. 치사율은 성체(成體)의 경우 5~10%에 불과해 낮은 편이고 사람에게 감염될 가능성도 없다.
축산이 지금처럼 산업화되기 전까지 구제역은 그렇게 무서운 병이 아니었다.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영국에선 "따뜻한 죽과 부드러운 건초를 먹이고, 쓰라린 상처를 핥지 않도록 발굽에 타르를 발라주며 제대로 돌보기만 하면 보름 안에 완치되는 병"(<대혼란> 앤드루 니키포룩 지음, 알마 펴냄)이란 기록도 있었다.
그러나 축산에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영국은 1871년 정치적·경제적·통상적 이익이 얽히고 설킨 상황에서 구제역을 '신고 의무 질병'으로 정했고, 1940년대부터는 잔혹한 살처분 정책을 실시했다. 그 뒤 세계 축산산업의 덩치가 커지고 자유무역의 시대까지 열리며 살처분의 규모도 커졌다. 세계적인 양돈 수출국가였던 대만은 1997년 돼지 400만 마리를, 한 차례 광우병 파동을 겪었던 영국은 2001년 600만 마리의 소·돼지를 살처분했다. 이 사태로 자살한 축산업자도 60명에 달했다.
▲ 축산에 자본의 논리가 개입되면서 구제역은 곧 '가축 재앙'이 됐다. 치사율이 5~10%로 비교적 가축에게 위해하지 않은 질병임에도 구제역에 걸린 가축을 줄줄이 도살로 몰고 간 까닭은 바로 '상품가치' 때문이다. ⓒ경북매일신문 |
치사율도 낮고 인간에게 위해가 없는 질병임에도, 구제역 발생 족족 동물을 죽이는 까닭은 '상품성' 때문이다. 감기처럼 마땅한 치료제도 없는 데다, 일단 감염되면 우유 생산량이 급감하고 일반소의 경우 체중이 감소해 상품성이 떨어지게 된다. 인간의 육식을 위해 태어나 판매를 목적으로 사육된 가축에게, 구제역은 단순한 질병이 아닌 '죽음'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더 큰 문제는 매서운 전파력이다. 바람을 타면 육지에선 50km, 바다에선 250km까지 날아가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다. 바이러스가 바람을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전파됐다는 학계의 보고가 있을 정도다. 강한 전파력은 구제역 바이러스가 인간의 손을 빌려 구제역에 걸리지 않은 동물들까지 '집단 학살'하는 요인이 됐다.
지금 우리 정부가 시행하고 있는 '예방적 살처분'도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구제역에 걸리지 않은 가축까지 매몰하는 조치다. 일단 한 곳에 구제역이 나타나면 반경 500m~3㎞ 이내의 동물들도 감염 여부와 상관없이 모조리 살처분한다. 더 광범위한 '상품성 저하'를 막기 위해 살처분이라는 '극단적(이면서 동시에 일반적인)' 처방에 돌입한 셈.
모든 방재 인력이 총동원돼 방역과 매몰 작업에 나서고 있지만, 문제는 구제역이 한반도 전역을 삽시간에 삼킬 기세로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방역 현장에선 "백신 접종도, 살처분도 구제역 전파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라는 말까지 나온다.
구멍 뚫린 초동 방역, '날개 단' 바이러스
이번 구제역 사태의 경우, 질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바람이 아닌 '인간'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차단 방역은 초반부터 구멍이 났고, 예방보다는 일단 구제역이 발생하면 뒷수습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방역 요원이 한 지역의 방역을 마친 후 곧바로 다른 지역에 투입되면서 '오염원'을 퍼뜨렸다는 징후도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일례로 지난달 6일 한 수의사가 안동 구제역 농장에서 신었던 신발을 갈아 신지 않고 방문했다는 이유로 충남 보령시의 돼지 2만5000여 마리가 집단 살처분됐다. 어차피 도축장 컨베이어 벨트 위에 누울 운명이었지만, 수의사의 부주의 때문에 2만5000여 생명이 한순간에 모조리 몰살된 것이다.
▲ 차단 방역은 초반부터 구멍이 났고, 예방보다는 일단 구제역이 발생하면 따라가 뒷수습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방역 요원이 한 지역의 방역을 마친 후 곧바로 다른 지역에 투입되면서 '오염원'을 퍼뜨렸다는 징후도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연합뉴스 |
정부의 초동 대응 실패는 구제역의 전국적 확산을 낳았다. 구제역이 최초 발병한 안동 축산 농가에 따르면, 첫 구제역 의심 신고가 접수된 것은 정부의 공식 발표일인 지난해 11월 29일보다 6일 앞선 23일이었다. 그러나 방역 당국은 모두 4차례에 걸친 의심 신고에서 간이키트 검사만으로 음성 판정을 내렸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해 5월 강화도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이후 정확한 구제역 판정을 위해 시료를 국립수의과학검역원으로 보내라는 지침을 내렸지만, 이것이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 결국 첫 의심 신고가 '음성'이 아닌 '양성'으로 판명되기까지의 6일 동안, 이 지역을 출입한 도축 차량은 원주와 여주, 강릉까지 이동했고 사료와 분뇨 차량은 각각 경북 남부지역과 파주로 이동해 구제역 바이러스를 퍼뜨렸다.
채찬희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12일 열린 '구제역 및 AI 현황과 대책,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에서 "최초 의심가검물이 의뢰됐을 때 간이 진단키트 대신 수의과학검역원에서 정밀 진단을 했다면 최소 5~7일 먼저 구제역 발병을 확진하고, 구제역이 전파되기 전에 초동 방역을 효과적으로 했을 것"이라며 "일단 구제역이 발생하면 (축산 차량의) 도와 도 사이의 이동을 제한해 전국적 확산을 막아야 하지만, 그런 조치가 제대로 취해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때늦은 백신 접종…150만 가축 피로 얼룩진 '구제역 청정국'
뒤늦은 백신 접종도 문제였다. 정부는 구제역 발생 한 달여 만인 지난달 25일 백신 접종을 결정했고, 그나마도 소에 한정했다. 바이러스 전파력이 소의 최대 3000배에 달하는 돼지의 경우, 모돈과 종돈에서 대해서만 지난 6일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 '찔끔찔끔' 확대된 백신 접종은 결국 구제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12일에서야 제주를 제외한 전국을 대상으로 확대됐다. 구제역 확산의 '선제적 예방 효과'를 위한 백신이 정부의 '뒷북' 대응으로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한 것.
정부가 백신 도입을 꺼린 가장 큰 이유는 국제수역사무국(OIE)이 부여하는 '구제역 청정국 지위' 유지 때문이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구제역이 경북지역에 머물던 지난달 8일 '구제역 백신 접종의 문제점'이란 자료를 배포해, 백신 접종 가축이 보균 동물(캐리어·carrier)이 돼 바이러스를 퍼뜨릴 수 있고, 일단 백신을 접종하면 다시 구제역 청정국으로 회복되는 데 6개월~1여 년의 시간이 소모돼 이를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제역 청정국의 지위를 잃으면 육류 수출에 차질이 생길 뿐만 아니라, 세계무역기구(WTO)의 '동등성 원칙'에 따라 다른 구제역 발생 국가가 우리 정부에 자국산 육류에 대한 수입 허용을 요구할 때 협상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
▲ '뒷북' 백신 접종은 전국적 구제역 확산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지난 10일 접종 반원들이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의 한 축사에서 축주의 도움을 받아 예방 백신을 놓고 있다. ⓒ연합뉴스 |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일단 국내산 육류의 수출량 자체가 많지 않아 국내 축산 농가의 타격이 정부 주장처럼 크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대규모 살처분으로 인한 보상비가 이를 훨씬 웃돈다는 지적이다. 실제 2009년 우리나라의 쇠고기 수출액은 약 4억 원, 돼지고기 수출액은 16억 원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반면 살처분 보상비 등 이번 구제역 사태로 인한 비용은 현재까지 1조3000억 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통적인 '육류 수입국'인 한국은 육류 수출국과 달리 구제역 청정국 지위에 크게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
2001년 영국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당시 영국의 축산업 연간 매출은 6억5300만 달러에 불과했으나, 살처분 비용은 200억 달러까지 치달았다. 600만 마리의 가축, 60명의 축산업자가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영국 정부가 지키려한 것은 '구제역 청정국'이란 위상이었다. 이후 <대혼란>의 저자 앤드루 니키포룩은 "영국 정부가 구제역 사태에 상당히 어리석게 대처했다"고 비판했다.
10년 전 영국과 유사한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정부의 조치에 대해 한국동물보호연합 이원복 회장은 "20억 원 수출을 위해 1조 원 규모의 살처분을 하는 것은 소탐대실"이라며 "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회장은 "일단 구제역이 발생하면 살처분 종료 3개월 후에 청정국 지위를 신청할 수 있지만, 백신의 경우 접종 완료 6개월 이후 신청이 가능하다"라며 "결국 정부는 이 3개월에 집착하다 예방 백신 접종의 시기를 놓쳤고, 150만 마리 동물의 '학살'을 낳았다"고 꼬집었다.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역시 "정부는 축산농가의 타격을 강조하며 청정국 지위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굳이 따진다면 육류 수출로 이익을 보는 것은 축산농가보단 대형 육류기업들"이라며 "축산농가 입장에서도 다 죽이고 나서 청정국 지위을 획득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고 말했다.
"더 이상 묻을 곳도 없다"…살처분만이 능사인가?
구제역이 경남·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되자, 결국 정부는 12일 '전국적인 예방 백신'이란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이번 구제역 사태에 대한 정부의 방역 '1원칙'은 사실상 광범위한 가축 살처분이었다.
구제역이 걸리지 않은 소·돼지도 반경 500m~3㎞ 안에 구제역이 발생하면 예외없이 살처분됐고, 이로 인해 매몰 처분된 소·돼지의 수는 14일 기준 전체 사육 두수의 10%를 초과하는 150만 마리에 이른다. 구제역에 걸리지 않은 소를 죽일 수 없다는 축산농가와 방역 당국의 실랑이가 매일같이 반복되는 가운데, 축산인들 사이에선 "구제역 잡다가 소·돼지 씨를 말리겠다"는 탄식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 예방적 살처분으로 생매장되는 돼지들. 많은 수의 돼지가 구제역 감염 여부와 상관없이 '예방적' 매몰 처분됐다. ⓒ한국동물보호연합 |
살처분은 구제역이 발생하면 일반적으로 진행하는 가장 빠른 초동 방역 조치지만, 문제는 이 같은 매몰 처분이 한계에 부딪쳤을 때 어느 시점에서 백신 접종에 들어가야 한다는 구체적인 매뉴얼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 구제역 사태의 경우 정부가 백신 접종을 결정한 시점이 백신의 항체 생성 시간(7~21일)을 고려하고서도 지나치게 늦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미 구제역이 퍼질대로 퍼진 상황에서 백신 접종을 시작해, 백신의 효과 자체를 별로 보지 못했다는 것.
한 수의사는 "유례없는 전국적 구제역 사태다 보니, 상황에 따라 어떻게 조치해야하는지, 어느 단계부터 백신을 어떤 수준으로 써야하는지 정부도 현장 방역 요원도 허둥지둥하기에 바빴다"고 말했다.
광범위하게 시행된 '예방적 살처분'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우희종 교수는 "예방적 살처분 조치는 초기 발생 상황에서 유효할지는 몰라도 구제역이 이미 국내 도처로 확산된 상황에서는 유효한 방법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예방적 살처분은 구제역이 국지적인 수준에 머물렀을 때는 효과적인 방역이 될 수 있지만, 지금처럼 구제역이 전국 각지에서 출몰하는 상황에선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것.
ⓒ한국동물보호연합 |
아울러 효과적인 차단 방역을 위해선 축산농가의 노력 외에도 구제역 발생 상황에서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역 시스템의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례로 영국은 2001년 구제역 발생을 계기로 살처분을 고수하던 기존의 정책을 전환, 백신 접종을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2006년엔 '구제역 비상계획'을 만들어 백신 접종 여부에 대한 세부적인 매뉴얼을 법률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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