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말아먹더라도 남북 관계만은… 1987년 민주화로 독재 시대의 '기존 지배층'이 정말 무너졌던가? 엄밀히 말하면 '지배 구조'가 무너진 것이다. 상징적인 몇 사람이 퇴출되었을 뿐, 계층으로서의 '지배층'은 거의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다. '87년 체제'는 '벨벳 혁명'의 꿈을 담은 길이다. 그 길을 연 혁명 주체는 정치적으로 중도적이고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속하는 '시민' 계층이었다. 정치적 지향성이 약한 이 계층이 주체로 나선 것은 기존 군사 독재가 사회 기반 조건의 발전에 너무나 뒤쳐져 겉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개량주의 성향의 이 계층이 바란 것은 점진적이고 합리적인 변화 과정이었다. 20년간 계속된 87년 체제 속에서 바로 그런 과정이 일어나 왔다. 이런저런 곡절이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좋은 변화가 참 많았다. 차분한 마음으로 21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권위주의 해소와 남북 간 긴장 완화 등, 어떤 과격한 혁명으로도 이루기 힘든 성취들이 그 동안 꾸준히 쌓여왔음을 생각하게 된다. 1987년 이후 10년간은 독재 시대의 기존 지배층을 대표하는 한나라당이 (다른 이름을 쓸 때였지만) 정권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나라당은 1987년에 드러난 평화와 민주주의를 향한 대세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반동을 시도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97년 이후 10년간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반 한나라당 세력이 정권을 담당하게 되었다. 2007년의 대통령 선거는 벨벳 혁명의 허점을 드러낸 하나의 안티클라이맥스였다. 내가 싫어하는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경제 살리기' 같은 허구의 과제가 핵심 이슈가 된 상황이 문제라는 것이다. 경제가 죽었나? 죽어가고 있었나? 그만하면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 경제를 놓고 호들갑을 떠는 와중에 정작 요긴한 과제들이 도외시되고 말았다. 벨벳 혁명의 '허점'이라 함은 현실 정치에 작용할 수 있는 특정 집단의 조직력에 대응책이 없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독재 시대의 기존 지배층은 반대 세력을 압도하는 조직력과 자금력을 가지고 있다. 현실 상황의 자연스러운 흐름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입지를 축소시킨다. 이 흐름을 뒤집기 위해 그들은 집요한 노력으로 경제 이슈화에 성공,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집요한 선전 활동이 시대의 흐름을 잠깐 가릴지는 몰라도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잠깐 가리는 데만 해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이 비용의 단적인 예가 조·중·동의 위신 추락이다. 벅찬 목표를 따라가기 바쁘다 보니 예전처럼 은근히 풍기는 정도로는 약발이 충분치 않아 원색적 나팔질과 노골적 말 바꾸기를 일삼다가 꼴이 말씀 아니게 됐다. 촛불 사태는 시대의 흐름에 거스르는 이명박 정부의 반동적 역류가 일으킨 풍파다. 이제 선전 활동 정도로 국민의 이목을 가릴 수 없는 상황에 왔다. 방송 장악에 목을 매고 있지만, 장악에 성공한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공권력을 정신없이 휘두르는 양상은 집권세력의 대응책이 얼마나 빈약한지 보여줄 뿐이다. 미국 쇠고기 정도 사안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힐 것을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어쩌나? 쇠고기보다 더한 폭탄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데. 교육과 의료의 시장화, 공기업 민영화, 대운하 등등…. 국민들의 눈에서 시대의 흐름을 오랫동안 가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들이 시도할 일은 한 가지다. 시대의 흐름을 진짜로 뒤집어놓는 것이다. '경제 살리기'의 절박함만으로는 평화와 민주적 가치를 바라는 국민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한반도의 긴장을 최대한 격화시켜 놓아야만 독재 시대 억압 체제의 복원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쓰다가 내가 생각해도 이 정도면 너무 비현실적인 '음모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어쩌랴, 워낙 비현실적인 상황을 이해하려면 비현실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것을. 내가 비현실적인 상황이라 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전임 대통령들이 서명한 남북 간 조약들을 이명박 정부가 이행하지 않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조약 내용 중에 국익을 위해 도저히 승계할 수가 없는 것이 있다면 재협상이든 추가 협상이든 요구할 일 아닌가. 뉴라이트 일각의 주장처럼 북한을 아예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조약 파기를 선언할 일 아닌가. 취임 반년이 넘도록 조약 내용을 준수할 뜻조차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반칙을 유도하기 위한 고의적 더티 플레이가 아니면 무엇인가? 사장이 바뀐다 해서 법인체 회사가 맺은 계약을 무효로 돌릴 수 있는가?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은 온 나라가 들끓는데도 국제 신인도를 핑계삼아 미적거리더니, 강한 상대에게 굽실거리고 약한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신인도 올리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부시 행정부는 북한 등 '악의 축'을 이용해 가공의 긴장 상태를 일으킴으로써 군사 정책을 편의적으로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대외 신인도는 크게 훼손되었다. 클린턴도 탄핵 위험이 절박한 상황에서 이라크 공습을 재개해 군사 정책을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지탄을 받은 일이 있지만, 부시가 벌인 짓에 비하면 약과 중의 약과다. 10년 전에 비해 미국의 '깡패국가(rogue state)' 이미지는 매우 선명해졌다. 그런 부시 행정부도 설거지 단계에 접어들어서는 북한을 대하는 태도에 상식을 많이 되찾고 있다. 6자 회담 참가국 중 미국과 함께 가장 북한에게 편협한 태도를 보이던 일본도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모두가 긴장 완화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한국만이 이명박 정부 출범 후 홀로 경직된 태도를 지키고 있다. 긴장 지속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는 나라의 정부가 맞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뉴라이트가 남북 관계의 긴장 상태의 지속 내지 격화를 바라는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펴는 미국이 세계의 군사적 긴장을 키우는 군사 정책을 취한 것과 똑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일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빈부 격차를 늘려 제로섬게임의 한계를 최대한 확장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경제적 자유를 위해 정치-사회적 자유를 제한하는 경향을 가진 것이다. 미국이 이런 소모적 정책을 택한 것은 파탄의 순간까지 강자의 입장에서 단물을 뽑아먹을 수 있는 이점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약자의 입장에 가깝고 긴장 완화의 과제를 가지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부적절한 정책이다. 그런 부적절한 정책을 '경제 살리기'라고 다수 유권자가 밀어주었으니, 경제는 살리든지 죽이든지 맘대로 하시라. 환율 시장 개입, 몰상식하게 해도 괜찮다. 시장화도 좋고 민영화도 좋고 대운하도 좋다. 그러나 제발 대북 관계만은 근시안적인 장삿속으로 망쳐놓지 말기를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
▲ 전방 장병들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군 미필 통수권자. "함께 사는 세상"을 그보다 더 철저하게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한나라당은 진짜 '딴나라당'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프레시안 |
재작년 가을에 쓴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의 한 대목이다. 오늘 아침 블로그에 들어가 보니 어느 분이 붉은 글씨로 표시한 부분을 인용해 놓고 "마치 오늘을 예언하고 쓰신 것 같다"는 논평을 붙여놓았다.
그렇다. 그 시점에서도 현 정권이 움직이려는 방향은 눈에 훤히 보였다. 내 눈에만 훤히 보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보이는 대로 적으면서도 나는 그것이 "비현실적 음모론"에 그치기를 바랐다. 그런데 상상했던 최악의 사태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권이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위기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든가, 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든가 하는 상식적인 얘기를 되풀이하기도 귀찮다. 나처럼 서재에 틀어박혀 지내는 사람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 일을 아무도 막지 못하고 지금 상황에 이르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이 내게는 더 큰 걱정이다.
1987년 항쟁에 앞장섰던 "정치적으로 중도적이고 경제적으로 중산층에 속하는 시민 계층"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이 사회의 상태에 근본적인 불만을 가진 '진보주의자'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다. 근본적인 불만은 없으면서 크게 잘못되는 일을 막으려는 '개량주의자'의 역할이 요긴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큰 변화를 바라는 진보주의자는 지금의 체제가 망가져버리기를 바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큰 고통을 겪음으로써 변화의 필요가 더 절실하게 느껴지기를 바랄 수도 있다. 나는 보수주의자며 개량주의자다. 진보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보수의 파탄을 통해 진보의 독재에 빠지기보다 진보와 보수의 생산적 경쟁을 바라기 때문에 개량주의자인 것이다. 지금의 체제를 가능한 한 정상적으로 운용하면서 바람직한 진보의 방향을 이 사회가 선택할 수 있기 바란다.
"남북 관계는 말아먹더라도 경제만은…" 1987년 이 나라를 파탄에서 건져낸 '시민'들 중에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라는 사실을 생활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느끼게 되어 있으니까. 노후 보장, 아이들 교육, 취직 문제, 어느 한 가지 일을 생각해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 "금강산도 식후경이야."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가 간다.
계량적, 미시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는 경쟁에서 이기기 힘든 세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경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경쟁의 틀이 지켜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있다. 1987년 6월이 그런 상황이었다. 군사 독재가 무리하게 계속되어서는 개인의 행복을 추구할 여건 자체가 너무나 크게 훼손되리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크게 바뀔 것을 바라지 않는 '시민'들이 경쟁을 위한 개인적 노력을 잠시라도 접어놓고 사회의 틀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남북 관계 악화는 23년 전 군사 독재의 연장보다도 우리 사회에 더 큰 위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남북 관계 악화가 북한의 도발에 앞서 현 정권의 획책의 결과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 아닌가? 나는 한국 '시민' 계층이 정의를 위해 개인적 이해관계를 도외시하고 어떤 행동에든 나설 것을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23년 전에 이 사회의 위기를 직시했던 것처럼 지금의 위기를 직시하기 바랄 뿐이다. 이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23년 전의 성과마저 잃어버릴 상황에 우리는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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