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비극으로 한 번 반복되고, 희극으로 다시 반복된다고 했다. 헤겔이 그 말을 했을 때 그는 아마 한국 진보 진영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염두에 뒀어야 했다.
2026년 6월 3일 밤, 경기 평택을의 개표소 앞에서 유권자들은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세 후보가 불과 몇 퍼센트 포인트 차이로 엉켜 돌아가며 1위 자리를 주고받는 풍경. 출구조사 결과는 조국혁신당 조국 31.1%, 국민의힘 유의동 30.6%, 더불어민주당 김용남 30.3%, 세 후보 모두 오차범위 안에 있었다. 새벽이 깊어갈수록 개표화면을 보던 민주진영 지지자들은 39년 전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1987년 12월 16일 밤, 김영삼과 김대중이 표를 갈라먹으며 군복을 벗은 노태우에게 대권을 상납하던 그 밤을.
1987년 교과서, 2026년 현장
사진 속의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백기완의 선거 포스터들을 보라. 민주화 직후의 선거였지만 민주진영은 분열의 기술만큼은 이미 달인 수준이었다.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던 사람들이 대통령 자리 하나를 놓고 두 갈래로 찢어지자, 유권자들의 표심도 찢어졌고, 어부지리는 노태우의 것이 됐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87년 체제의 원죄'라 부른다. 단일화 실패, 갈라치기, 표 분산, 보수 어부지리. 이 공식은 그 이후로도 한국 정치사에서 질기게 반복됐다.
그리고 2026년 평택을에서 이 공식은 다시 한 번 완벽하게 재현됐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각자의 깃발을 들고 나타났고, 진보 표심은 두 조각으로 갈렸으며, 유의동 후보는 '이런 거 편하네요'라는 표정으로 4선 고지에 올랐다. 유 후보의 득표율은 최종집계 기준으로 34%대. 나머지 두 후보는 29%와 27%대. 합치면 56% 이상이 비(非)국민의힘 표였지만, 그 표는 투표함 속에서 끝내 하나가 되지 못했다.
정청래, 조국의 책임
이번 사태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조국혁신당과의 단일화 협상을 결렬시키는 데 가장 열심히 기여한 것이 다름 아닌 민주당 지도부였다는 사실이다. "장동혁이 민주 세력의 전략자산"이라는 말이 회자됐을 때, 누군가는 정청래 대표야말로 국민의힘의 전략자산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었다. 골문 앞까지 드리블해 들어가 정확하게 빗나간 그 슈팅은, 기술적으로 볼 때 오히려 의도하지 않고서는 구현하기 어려운 수준의 예술이었다.
물론 조국 후보 측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번 결과는 저 조국의 실패"라고 낙선 소감을 밝혔지만, 단일화 거부는 결국 진보 표를 쪼개는 선택이었다. '내 것을 챙기다 남의 것도 날린' 셈이다. 황교안 후보(자유와혁신)의 6%와 진보당 김재연 후보의 3%까지 더하면, 유의동 당선인을 빼고 나머지 후보들의 표는 총합 66%에 육박한다. 이 나라에서 진보-중도 표가 64%를 넘기도 했건만 단 하나의 의석을 지키는 데 실패한 것이다.
어부지리의 계보
1971년, 김대중이 박정희에게 졌을 때 표 차이는 94만 표였다. 1987년, 노태우가 36%로 당선됐을 때 김영삼과 김대중의 합산 득표는 55%를 넘었다. 2002년에야 비로소 단일화의 기적이 성사됐고, 노무현이 당선됐다. 그 교훈으로 쌓인 것이 무엇인가? 약 20년간의 학습효과는 2026년 평택을에서 깔끔하게 제로 리셋됐다.
내란세력의 수괴가 파면된 직후, 민주화 세력의 압도적 우위가 예상되는 선거에서 평택을 하나를 내줬다는 것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합의 실패이자, 상대방을 향한 오기가 유권자에 대한 책임보다 앞서는 순간이 만들어낸 패배다. 독재의 부역자들이 두 번 다시 국회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던 외침은, 같은 편끼리의 기싸움 앞에서 조용히 꺼졌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그래도 되는 법은 없다
1987년 이후 한국 진보진영에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었다.
"적이 강할 때는 뭉쳐야 한다."
그 명제가 틀린 것이 아님을 역사는 무수히 증명했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2017년 진보진영의 집결, 2025년 조기대선에서의 이재명 당선까지. 단합이 가능했을 때 역사는 전진했고, 분열했을 때 역사는 후퇴했다.
그 공식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평택이라는 좁은 논밭에서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다. 조국혁신당의 출마는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다. 단일화 협상의 실패가, 더 정확히는 협상을 진지하게 시도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 민주당이 "우리가 더 크니 당신들이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든, 조국혁신당이 "조국이라는 브랜드면 혼자서도 이긴다"고 오판했든, 결과는 같다. 유권자가 원하는 것을 정치인의 자존심이 이긴 것이다.
이제 범여권 안에서 권력투쟁이 시작될 것이다. 누구 탓인지를 따지는 기싸움, 차기당권을 노리는 계산들, 이재명 대통령 임기초반의 민감한 시기에 끼어드는 내홍. 1987년 이후 야당이 그랬듯이, 집권 직후의 여당이 안으로 무너지는 것은 한국정치사의 또 다른 반복 패턴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된다고 역사가 말한 적은 없다. 분열로 인한 패배를 교훈 삼지 못하면, 다음 선거에서도 누군가는 또 그 포스터 속의 얼굴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을 것이다. 1987년의 유령은 아직 한국정치의 복도를 떠돌고 있다. 쫓아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단합, 그리고 유권자에 대한 진지한 책임감이다. 그 두 가지가 없다면, 어부는 앞으로도 계속 물고기를 낚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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