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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천안함 침몰'을 "더러운 일"로 만드나?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루시타니아 호의 참극

경고

대서양 항해에 나서려는 여행자들께서는 독일 및 그 동맹국들과 영국 및 그 동맹국들 사이에 전쟁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과 영국 인근 해역이 전쟁 수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독일제국 정부의 공식적 경고가 있었던 것처럼 영국이나 그 동맹국 선박은 이 해역에서 공격 대상이므로 이 해역에서 영국이나 그 동맹국의 배를 타고 여행하시는 분들께서는 위험을 스스로 부담하셔야 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워싱턴 D.C. 독일제국 대사관1915년 4월 22일



1915년 4월 22일 주미 독일 대사관에서 미국 여러 신문에 올린 광고다. 몇 신문에는 그 바로 옆에 5월 1일 루시타니아 호의 출항을 알리는 영국 큐나드 해운회사의 광고가 나란히 실려 있었다.

3만 톤급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는 5월 1일 예정대로 뉴욕을 출항했다. 1257명의 승객과 702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엿새 후 이 배는 아일랜드 남해안에서 11킬로미터 떨어진 해상에서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승선자 중 119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의 수색 작업으로 289구의 시신만을 찾아냈고, 그중에서도 65구는 신원조차 확인되지 못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전쟁 사상 손꼽히는 참혹한 전쟁이었지만, 민간인의 대량 살상은 그 와중에서도 특별히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영국 정부와 군부는 국민의 적개심을 격화하고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 공격의 부당성과 잔인성을 선전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어 독일을 고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민간 여객선에 대한 경고 없는 어뢰 공격은 물론 부당하고 잔인한 일이다. 당시 국제 전쟁법으로 통용되고 있던 헤이그 협약(1899, 1907)도 여객선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고, 다른 민간 선박에 대해서도 승선자를 대피시킨 뒤에야 침몰시킬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나 역시 루시타니아 호 공격은 역사상 인간이 해 온 짓 중 제일 나쁜 짓의 하나라고 굳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나쁜 짓이 악마 같은 U-보트 함장 한 사람만의 잘못으로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발터 슈비거 함장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지만, 그런 판단이 내려지는 데는 여러 가지 조건이 겹쳐져 있었다. 이런 참극이 다시 일어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슈비거 함장의 능력과 도덕성을 비판하는 것보다 그가 처해 있던 조건을 검토하는 것이 더 요긴한 일이다.

기본 문제는 헤이그 협약을 악용하려는 술수 때문에 협약이 사문화되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루시타니아 호만 하더라도 필요시 무장상선(AMC Armed Merchant Cruiser)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건조와 운영에 영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던 배였다. 함포를 탑재할 포좌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침몰 당시에는 무장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바다에서 마주쳤을 때 그런 종류의 배가 어느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독일이 영국 인근 해역을 전쟁 수역으로 선포하고 무차별 공격에 나선 조치에도 방어적인 측면이 있었다. 영국은 독일의 해상 운송을 봉쇄하기 위해 1914년 11월부터 북해 전역을 전쟁 수역으로 선포하고 민간 선박의 운항을 통제하고 있었다. 1915년 2월 독일이 영국 인근 해역을 전쟁 수역으로 선포한 것은 이에 대한 맞대응이었다. 특히 자국 상선들이 중립국의 위장 국기를 달도록 한 영국 해군본부의 1915년 1월 31일 명령이 독일을 자극했다.

2월 4일 독일 해군이 전쟁 수역을 선포하고 2월 18일부터 무차별 공격에 들어간다는 방침을 발표한 직후인 2월 10일에 영국 해군이 자국 상선들에게 내린 명령은 더욱더 자극적인 것이었다. "독일 잠수함이 갑자기 전방에 나타나 적대적 태도를 보일 때는 전속력으로 항진해 들이받으라"는 것이었다. 열흘 후에는 선제 발포를 권장하는 지시를 내려 보냈다.

영국 해군의 명령과 지시는 비밀로 내려졌지만, 독일 해군에게 바로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헤이그 협약을 무력화시키는 명령과 지시였다. 아무리 민간 상선이라 하더라도 공격력을 가진 선박 앞에 잠수함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공격을 통보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였으니까. 큐나드 해운회사가 당시 루시타니아 호 선장에게 독일 잠수함을 들이받을 경우 상금을 약속했다는 사실도 후에 밝혀졌다.

'U-보트'라는 말이 영어권에서는 독일의 공격형 잠수함을 일반 잠수함과 구별해서 가리키는 말로 쓰였지만, 독일에서는 'Untersee-Boot'가 모든 잠수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및 제2차 세계 대전에 쓰인 독일 잠수함은 공격 기능에 절대적 비중을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일반 잠수함과 다른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적군에게 적발되기만 하면 소형 화기로도 파괴될 수 있는 방어 기능의 취약성 때문에 모험성이 매우 강한 무기였다. 공격력이 크고 방어력이 약한 이런 무기의 존재를 헤이그 협약 때 의식했다면 민간 선박의 보호를 위해 더 실효성 있는 규정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슈비거 함장의 U-보트가 당시 처해 있던 상황도 참극을 빚어낸 판단에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잠수함은 아일랜드 서쪽 해역의 임무를 마치고 귀항하는 참이었다. 연료도 많지 않고 어뢰도 딱 한 발 남아 있었다. 운명의 날 우연히 루시타니아 호와 마주쳤을 때 루시타니아 호는 깃발도 올리지 않고 배 이름도 물감으로 가려놓은 상태였다. 며칠 전 조그만 화물선과 마주쳤을 때는 공격을 미리 알려 선원들이 구명정으로 옮겨 탄 뒤에 어뢰를 발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에 위험이 너무 큰 것 같았다. 그래서 경고 없이 마지막 어뢰를 발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한 방의 어뢰로는 통상 기대하기 힘든 참혹한 결과가 일어났다. 어뢰 폭발에 이어 또 한 차례 더 큰 폭발이 일어난 뒤 루시타니아 호는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3만 톤급 배가 수면 밑으로 사라지는 데 10여 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48척의 구명정이 대기 상태에 있었는데도 배가 심하게 기울어져서 제대로 내려진 것이 여섯 척뿐이었다. 선장은 배를 멈추려 했지만 기계 파손으로 동력을 끊을 수 없어서 물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고속 항진을 계속, 침몰을 빠르게 하면서 안전한 하선을 더욱 어렵게 했다. 1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 참극은 어뢰 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어울려 빚어낸 것이었다.

루시타니아 호의 침몰을 놓고 손해 배상 소송이 벌어졌다면 꽤나 복잡한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어뢰를 발사한 U-보트와 독일 해군의 책임이 물론 제일 크겠지만 전적인 책임일 수는 없었다. 두 번째 폭발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독일의 전쟁 수역 선포가 정당한 것이었는지, 독일대사관의 공식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 수역으로 운항한 데 잘못은 없는지, 피격 후 계속 항진으로 인명 피해가 늘어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배의 화물 중에 적대 행위를 유발할 군수품이 실려 있지 않았는지 등 많은 문제들이 검토되었을 것이다.

▲ "정의의 칼을 들어라!" 제1차 세계 대전의 선전전에서 루시타니아 호는 영국의 혁혁한 승리를 가져다줬다. 참극을 빚어낸 여러 요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독일 어뢰였기 때문에 다른 요인들의 검토를 철저히 틀어막는 것이 영국의 기본 전략이었다. 그 결과 사건의 많은 부분이 아직까지도 미궁에 빠진 채로 있고 영국인들의 수치감을 풀 길이 없다. 전쟁 중의 '상황 논리'가 이성을 마비시킨 데 대한 수치감이다. 전쟁 중이 아닌 사회에서도 이성이 그 못지않게 마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영국인들에게 위로가 될까? ⓒ프레시안
손해 배상 소송은 없었다. 영국과 독일의 선전전만이 평행선을 그렸다. 선전전에서는 독일이 방어적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은 독일이었고, 그 결과가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것이었으니까.

독일 정부는 루시타니아 호가 무장 상선으로 등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무기를 싣고 있었으므로 전쟁 행위 중에 피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큐나드 해운은 화물 목록을 공개하면서 소총 탄환 4200상자(420만 발), 포탄피 1250개, 뇌관 18상자만이 군사 물자로서 배에 실려 있었다고 밝혔다. 소총 탄환은 적재를 통제하는 군수품(munition)으로 분류하지 않는다고 했다. 더 강력한 탄약이 실려 있어서 2차 폭발을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이 독일 측에서 여러 차례 나왔지만 끝내 확인되지는 않았다.

독일 측에 다소나마 유리한 사항이 2차 폭발이었다. 어뢰 공격 자체는 배를 침몰시키더라도 그렇게 큰 인명 피해를 불러오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참극의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 측에서는 어뢰가 두 발 발사되었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철저한 조사를 통해 결국 한 발뿐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선전전의 백미는 소위 '괴츠 메달'이었다. 뮌헨의 메달 제조업자 카를 괴츠라는 사람이 큐나드 해운의 무리한 여객선 운항을 풍자하는 내용의 메달을 만들어 팔았다. 무기를 잔뜩 싣고 가라앉는 배 모양과 함께 "밀수 금지!(Keine Bannware!)", "장사가 제일(Geschäft über Alles)" 등 문구를 새겨 넣은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만든 엉성한 물건이어서 날짜도 5월 5일로 잘못 새겨져 있었다.

이 메달이 1년 후 영국과 미국에서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1916년 5월 5일자 <뉴욕타임스>에 사진이 실리면서 U-보트 승무원들이 받은 훈장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여기에 주목한 영국 외무성 홍보 책임자 뉴튼 경이 백화점 사업가 해리 셀프리지에게 제안해 복제품을 만들게 했다. 한 개 1실링에 25만 개나 팔린 이 '루시타니아 메달'에 딸린 팸플릿에는 이 메달이 독일 국민들에게 기념품으로 뿌려진 것이며, "5월 5일"이란 날짜를 보면 여객선 공격이 사전에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과 큐나드 해운의 책임에 관해 석연치 않은 문제들이 당시부터 불거진 것들이 있었다. 만약 영국이 패전국이 되었다면 새로운 사실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공식적 해난 조사위원회의 활동 경위부터 난맥을 보여준다. 1915년 6월 15일부터 7월 1일까지 36명의 증인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끈 것은 몇 해 전 타이타닉 호 조사위원회도 이끌었던 머지 경이었다. 위원회 시작 때 해군에서 선장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기 위해 자료를 조작한 사실이 발견되자 머지 경은 수석검사 F E 스미스와 함께 진행을 거부했다. 결국 위원회는 선장에게도, 회사에게도, 해군에게도 잘못이 없고 모든 책임이 독일 정부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머지 경이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에서는 개운치 않은 여운이 느껴진다. "루시타니아 사건, 골치 아프고 더러운 일거리였어!(The Lusitania case was a damned, dirty business!)" 머지 경은 이 위원회 활동의 수당 수령까지 거부했다.

루시타니아 호의 선체는 해안에서 약 11킬로미터, 수심 약 100미터 위치에 누워있는데도 아직 완전한 탐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국 정부가 아직까지도 감추고 싶어 하는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1995년 아일랜드 정부가 이 선체를 역사기념물로 지정, 탐사 작업을 어렵게 만든 것도 영국 정부의 입김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1990년대 초에 탐사 작업을 한 어느 잠수부가 뜻밖의 사실을 터뜨렸다. 선체에 구멍이 펑펑 뚫려 있고 부근 일대에 대 잠함 기뢰 불발탄이 널려 있다는 것이었다. 인근 어민들은 1950년대 어느 시점에서 해군 함정들이 두 주일 동안 부근을 맴돌고 많은 폭발음이 들렸던 사실을 기억했다. 작년 2월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보물찾기(Treasure Quest)> 시리즈 중 "드러난 루시타니아"란 제목으로 무인 잠수정의 촬영을 방영한 일이 있는데, 그 화면에도 대 잠함 기뢰 불발탄이 분명히 나타났다고 한다. 1915년에 머지 경을 괴롭힌 의혹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해난 사고는 지상의 사고에 비해 명확히 밝혀지기 어려운 속성을 가진다. 관계자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명확한 해명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관계자들끼리 전쟁 같은 대립 상태에 있을 때는 모든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각자의 극한적 주장에만 매달리고, 그 어느 것도 입증과 반증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갈등을 증폭시키는 통로가 될 뿐이다. 어느 사고에나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상식은 무시당한다.

나는 지난 주 발표된 천안함 관계 조사 결과를 믿지 않는다. 그 발표 내용과 다른 사실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결정적인 것이라고 우기는 증거가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루시타니아 호를 둘러싼 선전전과 같은 소통 거부의 의지만 보이기 때문이다.

설령 북한의 공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안보와 관련해 그보다 더 중요한 많은 사실들이 얽혀 있는 사건이다. 왜 음파탐지기(소나)가 작동하지 않았는가? 이 하나의 질문만 하더라도 호전적인 이웃을 두었다는 사실보다 우리의 안보에 더 절실한 문제다. 그런 수많은 문제들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북한 책임으로만 덮어버리려 하는 현 정권의 선전전을 나는 경멸한다.

(오늘 <망국 100년>은 쉽니다. 금요일(28)에 다음 회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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