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5년 04월 05일 2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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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통령과 CIA 국장이 세균학자 유가족 '입막음'에 나선 까닭은?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72] 생체 실험과 세균 전쟁
뉴욕 맨해튼 고층호텔에서 떨어져 죽기 하루 전, 올슨은 아내 앨리스에게 안부 전화를 걸어 "내일 집에서 보자"고 했다. 하지만 앨리스는 남편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큰 아들 에릭(사건 당시 8살)에게 아버지의 석연찮은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어머니 앨리스는 '이제 그만 잊자'고 했으나 에릭은 달랐다. 에릭과 세월호 유족들의 아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한반도 세균전 불만 가진 전문가, CIA에 '처형'됐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71] 생체 실험과 세균 전쟁 ⑳
에롤 모리스 : 대체 프랭크 올슨이 무슨 일을 했기에 정부가 나서서 죽인 걸까요? 시모어 허시 : 알고는 있지만 말씀은 못 드려요. 답답할 노릇이라고요? 저라고 이렇게 인터뷰에 나와서 신비주의로 일관하고 싶은 줄 아세요? (조금 뜸을 들인 뒤) 프랭크 올슨은 반체제인물(dissident)로 찍혔어요. 1953년의 정세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땐 러시아와의
'美세균기지' 사표 낸 전문가의 비판, "세균무기 말고 방역 연구해야"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70]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⑲
미국의 여러 연구자들은 한국전쟁에서 세균무기를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거나 (아주 소규모로) 성능 테스트조차 해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무렵 미국은 세균전을 펼칠 기술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미 데트릭 기지의 생화학전 무기 개발의 책임자 에그버트 블린 육군소장(미 육군 화학부대장)과 블린 소장의
"너희가 속임수 썼는가?" 중국군 위생부장의 회고록 진실 공방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9]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⑱
많은 세균전 연구자들은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세균무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특히 미국의 연구자들은 아주 소규모로 적진에다 뿌려 무기의 성능을 실험하는 시도조차 없었다고 본다. 한반도 세균전 의혹을 부인하는 근거를 모아보면 크게 세 가지다. △1950년 무렵 미국은 세균전을 펼칠 기술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공중에서 세균폭탄을 떨어트렸다고
깃털폭탄, 매달 흰쥐 2만마리…미 합참, 한반도 세균전 개발로 5억 달러를?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8]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⑰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뒤 포로교환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1953년 9월6일 북한과 중국은 마지막으로 남은 미군 전쟁포로를 풀어주었다. 그날 아침 베이징 라디오에서는 한반도에서 세균전을 폈다고 자백을 했던 미군 장교 25명의 이름을 밝혔다. 판문점에서 휴전선을 넘은 첫 번 째 지프차에는 프랭크 슈와블 대령(미 제1해병 항공비행단장)과 앤드
못 보던 파리의 출몰…美대령의 고백 "세균전, 합참에서 짰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7]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⑯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펼칠 무렵인 1952년 초, 미국이 세균전을 펼쳤다는 북한·중국의 주장이 거세졌다. 미국은 '그렇다면 유엔 조사단을 구성하자'고 맞섰다. 북한·중국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유엔이란 '미국의 작은 국무부'에 지나지 않고, 둘째, '유엔군'이란 이름으로
영하 20도에 나타난 페스트 곤충들, '악마의사'가 부른 한반도 세균전?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6]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⑮
[(세균무기 개발을 위한) 새로운 노력은 원자폭탄 제조 프로젝트와 맞먹을 정도로 비밀리에 계획됐다. 세균연구 본부는 신속한 반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워싱턴에 충분히 가까이 있으면서도 세균으로부터 최소한의 안전을 보증할 수 있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메릴랜드의 옛 군기지 캠프 데트릭에 마련됐다](주디스 밀러 외 2인, <세균전쟁; 생물학무기와 미국
공습하다 붙잡힌 미 폭격기 승무원들은 생체해부 당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5]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⑭
미국 포로가 731부대의 생체실험으로 죽음을 맞이했는가는 논란거리다. 일본이 저질렀던 생체실험의 희생자들 가운데 조선 독립운동가와 러시아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중국인이었다. 731부대는 만주 선양(瀋陽, 奉天)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갇힌 2000명가량의 포로 가운데 일부에게 '세균무기에 백인 특유의 면역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생체실험을 했다(연재 62 참
천황옥새 찍힌 731부대 문서들…기둥에 묶어 탄저균 폭탄 생체실험도 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4]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⑬
[그들은 전쟁 중에 인체실험으로 터득한 혈액의 동결 건조 기술을 사용하여, 가마가사키, 고토부키초와 같은 싸구려 여인숙 거리에서 (부랑자나 실업자들로부터) 혈액을 싸게 사들여 만든 건조 혈액을 미군에 팔아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한국전쟁 특수는 전쟁범죄 의학자들이 돈벌이하는 기회이기도 했다](노다 마사야키, <전쟁과 죄책>, 또다른우주, 2023
사람을 원숭이처럼 생체실험한 '악마의 의사들', 전쟁 뒤 더 잘 나갔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63] 생체실험과 세균전쟁 ⑫
살아 숨쉬는 '마루타'의 몸에 세균을 집어놓고 언제 어떻게 죽는지를 살피는 행위를 '의학연구'라 우길 수는 없다. 731부대의 생체실험은 '의학'의 이름을 훔친, 또는 의학과 '악마적 동맹'을 맺은 잔혹행위이자 야만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를 비롯한 731부대 군의관들을 '악마의 의사' 집단이라 비난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