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선전장관 괴벨스가 앞장 서 부추겼던 '수정의 밤'(Kristallnacht)을 다룬 지난 주 글과 관련, 독자 한 분이 메일을 주셨다. "이즈음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하는 짓을 떠올리면, 나치에게 박해받는 기사를 읽으면서 유대인들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끼기가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는 잘못이지만, 유대인에게 동정심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고도 했다.
'피해 기억'에 매달리는 유대인, 지금은 가해자
메일을 주신 그 독자분의 불편한 마음은 이해되고도 남는다. 아마도 다른 여러 독자 분들도 그렇게 느끼셨을 것이다. 2023년 10월7일부터 지금껏 1년 가까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Gaza)지구에서 벌인 마구잡이 주거지 파괴와 4만1000 명을 죽게 만든 무차별 공격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일이다(하루 평군 124명 사망). 더구나 최근에는 북쪽의 레바논을 겨냥해 밤낮 가리지 않고 수백 차례나 공습해 600명쯤의 사망자를 냈다. 집에서 잠자던 어린이들도 수십 명 죽었다. 국제법상 전쟁범죄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유대인들이 나치의 피해자였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그런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될 일이다. 하지만 나치로부터 박해를 받은 희생자라는 '피해 기억'과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벌여온 '가해 행위'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은 '중동의 깡패국가(rogue state)' 또는 국가폭력을 저지르는 '중동의 테러국가(terror state)'라는 국제사회의 따가운 눈길을 아랑곳하지 않아왔다. 최대 동맹국 미국의 뒷심을 믿고서다(미국이 해마다 이스라엘에 38억 달러 어치에 이르는 엄청난 무기를 공짜로 건네주지 않았다면, 범죄행위들이 훨씬 줄었을 것이다. 미 바이든 행정부는 무기 금수 카드를 내미는 흉내만 냈을 뿐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은 '피해 기억'에 바탕한 유대인의 생존 논리를 내세우면서 '가해 행위'를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홀로코스트 희생집단이라는 사실을 앞세워 '유대인 생존이 최우선'임을 강조해왔다. 아울러 그에 못지않게 중동 사람들의 평화적 생존권도 중요하다는 측면을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지난 9월18일 유엔총회는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지역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스라엘을 최우선 동맹국으로 여기는 미국은 물론 반대했고, 한국은 미국 눈치를 보다가 기권했고, 중국과 일본은 찬성했다).
히틀러의 광기로부터 우리 인류가 되새겨야 할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 '힘으로 이웃을 쫓아내고 죽이는 방식이 아닌,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존 노력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오늘의 이스라엘은 안타깝게도 나치의 광기를 닮아가는 모습이다(나치의 전쟁범죄를 살펴보는 것도 지구촌 평화공존의 길을 다지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뜻에서다).
"불량배들이 문화국 독일 이미지 먹칠했다"
'수정의 밤' 사태가 벌어졌을 때, 독일인 모두가 유대인을 미워하고 학대한 것은 물론 아니다. 핍박 받은 유대인에게 연민을 느끼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인 도움을 준 이들도 소수였지만 있었다.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하고 집에서 쫓겨나 벌벌 떠는 유대인들에게 이불과 옷가지, 빵이나 우유 같은 것을 건네주었다.
(중동의 깡패국가 소릴 듣는 이스라엘에도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극단적인 강공책을 비난하는 유대인들도 물론 있다. 이스라엘의 정치 지형에서 '좌파'로 일컬어지는 이들 온건 평화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아랍계 주민들이 겪는 고난에 동정 어린 눈길을 보낸다. 그러면서 언젠가 들어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와의 평화공존이 중동평화를 가져오는 해법이라고 여긴다. 이른바 '2개 국가 해법'이다. 문제는 이들이 머릿수에서 소수파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총선 때마다 평화온건 정권, 또는 중도 성향으로의 정권 교체를 이루지 못한다.)
유대인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다른 이유로 '수정의 밤' 사태를 못 마땅하게 여겼던 독일인들도 있다. 이들은 '불량배'들이 '문화국인 독일'의 이미지를 먹칠한다고 분개했다. 그런 이들 가운데는 나치 당원들도 소수나마 있었다. 영국 역사학자 이언 커쇼의 글을 보자.
[한 나치 동조자는 괴벨스에게 익명으로 보낸 편지에서 "내가 독일인이라는 사실이, 선진문화를 지닌 아리아 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고 울고 싶은 심정"이라고 적었다](이언 커쇼, <히틀러Ⅱ 몰락 1936-1945>, 교양인, 2010, 202쪽).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유대인에게 동정심을 가졌을까. 꼭 그렇진 않았다. 히틀러나 괴벨스의 주장대로 '유대인은 기생충이라 제거돼야 마땅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다만 독일의 대외 이미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길거리 행동대원들의 비합법 폭력보다는 국가기관이 나서서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유대인을 제거하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봤다(글 끝에서 보듯이, 나치의 정책도 그런 쪽으로 바뀌었다).
'히틀러의 건축가'가 남긴 목격담
'히틀러의 건축가'로 잘 알려진 알베르트 슈페어(1905-1981)는 제2차 세계대전 후반부 3년 동안 군수장관(1942년 1월-1945년 4월)이란 중책을 맡았다. 그때 슈페어의 나이가 30대였기에, 히틀러의 총애를 넘어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맡기기 어려운 자리였다. 바로 그 때문에 슈페어는 전쟁범죄자가 됐다. 강제수용소의 수감자들을 군수산업의 노동력으로 동원하는 법안에 찬성했고, 실제로 유대인은 물론 정치범이나 소련군포로를 포함한 많은 수감자들에게 노예노동을 강요한 책임이 따른다.
패전 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피고석에 선 슈페어는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다수 피고인들과는 달랐다. 히틀러 정권의 잘못을 뒤늦게나마 지적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했기에 승자들로부터 '선량한 나치'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법정 태도는 형량에 영향을 끼쳤다. 나치 독일 지도부에서 장관을 지낸 피고인으로서는 슈페어 혼자 교수형을 받지 않았다. 20년 동안 감옥에서 슈페어는 회고록을 써나갔다. 1966년 출소 뒤 펴낸 두툼한 분량의 <기억>(Inside the Third Reich, 1969)은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됐다(연재 32 참조 바람).
슈페어는 본업이 건축가였기에, 정치적 사건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같은 정치행사에 조명이나 설치물 등 인상적인 무대를 만들어 내놓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라 여겼다. '수정의 밤'과 관련, 슈페어가 남긴 목격담을 보자.
[(1938년) 11월10일, 작업실에 가는 도중 아직도 연기가 올라오고 있는, 불타는 베를린 유대교 회당의 폐허를 목격했다. 전쟁(1939년 9월1일 폴란드 침공)이 터지기 1년 전의 상황을 규정짓는 심상치 않은 사건이었다. 지금도 그 장면은 내 인생에서 가장 서글픈 기억이다. 당시 나를 괴롭혔던 것은 무질서였다. 불탄 기둥들, 무너진 외관, 타버린 벽들...전쟁이 일어나면 유럽의 많은 곳이 이러한 광경으로 뒤덮일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정치적 부랑아들'이 되살아난 것이 고통스러웠다. 깨진 상점 진열장 유리는 내가 가진 중산층의 질서의식에 어긋나는 것이었다](알베르트 슈페어,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 마티, 2007, 203쪽).
회고록에서 슈페어는 그날의 사건이 '유리 이상의 무엇이 부서지고 있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고 했다. '유리 이상'이란 곧 이어 벌어질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를 뜻한다. 슈페어는 '훗날 괴벨스 자신이 그 슬프고 끔찍한 밤의 지휘자였음을 암시했다'고 적었다. 그는 괴벨스가 히틀러를 부추겨 그날의 폭력사태가 일어났다고 여겼다. "내 생각에도 괴벨스가 망설이는 히틀러를 '이미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말로 부추겨 모든 것을 시작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알베르트 슈페어, 204쪽).
수정의 밤은 괴벨스와 히틀러의 합작품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책임이 크지 않은 듯이 썼다. '수정의 밤'은 괴벨스의 역할이 컸기에 '괴벨스 포그롬'이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히틀러는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을까. 한마디로 히틀러의 책임도 크다. 괴벨스는 그가 모시는 히틀러의 지침을 받고 행동했을 뿐이다. 괴벨스가 남긴 기록(일기)를 보면 히틀러와 상의한 끝에 유혈보복의 총대를 멨다는 것이 드러난다. 괴벨스는 히틀러의 '본때를 보여주라'는 지시 내용을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지도자(히틀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다. 지도자의 결정. '시위가 이어지게 하라. 경찰을 뒤로 빼라. 유대인에게 본때를 보여야 한다.' 맞는 말이다. 해당사항을 바로 경찰과 당에 지시하다. 그러고 나서 당 지도자들에게 그러한 취지로 잠시 연설을 하다. 박수갈채가 쏟아지다. 모두들 전화통을 붙든다. 이제국민이 행동에 나설 것이다](이언 커쇼, 195-196쪽에서 재인용).
나치 지구당 선전국을 거쳐 각저역의 군과 마을 단위 당원들에게 "유대인에게 본때를 보이라"는 분위기가 전해졌다. 하지만 괴벨스에게는 돌격대(SA)나 친위대(SS), 또는 비밀경찰 게쉬타포를 동원할 권한이 없다. 돌격대가 독일 전역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거나 아예 갈색 정복을 입고 방화와 폭력에 나섰던 것은 괴벨스가 히틀러의 지시를 돌격대에 전했거나, 히틀러가 돌격대장에게 동원 명령을 내리라고 지시했을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가 모르는 돌격대의 행동이, 그것도 대규모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는 없다. 친위대나 게쉬타포도 마찬가지다.
히틀러의 지시로 '수정의 밤'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폭력․방화․살인․약탈을 저지른 돌격대원들이 처벌받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1939년 2월 나치당 최고법원은 '과잉행위자' 30명을 피고석에 세웠다. 그 가운데 26명이 유대인을 죽인 혐의를 받았지만, 그 가운데 아무도 당에서 제명되거나 기소되지 않았고, 따라서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4명의 당원이 출당처분과 함께 기소되긴 했다. 이들의 혐의는 살인이 아니라 성폭력이었다. 그렇다고 성폭력이 범죄로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기소 이유는 유대인과는 금지된 성적인 접촉이었다. 비유대인(독일 아리안인)과 유대인 사이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독일의 피와 명예를 보호하는 법'을 어겼다는 죄목이었다.
악행 입증할 문서 안 남긴 히틀러의 교활함
정확히 보자면, 수정의 밤 사태는 히틀러와 괴벨스의 합작품이었다. 하지만 나치 지도부 안에서 논란이 일었다. "괴벨스가 선을 넘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해를 넘긴 1939년 2월13일 나치당 재판소가 '수정의 밤' 파장에 대해 내린 평가에 따르면, '지도자(히틀러)는 (괴벨스의) 보고를 듣고 나서 그런 시위는 당이 준비해서도 조직해서도 안 된다고 결정 내렸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날 경우에는 그런 시위를 막아서도 안 된다고 결정했다'는 것이다(이언 커쇼, 1060-1061쪽 각주 참조).
이런 문건을 보면, 히틀러가 괴벨스에게 한 말은 이중적이었고, 괴벨스는 그가 듣고 싶은 쪽으로 히틀러의 말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보인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자연발생적인 시위(또는 자연발생적으로 위장한 시위)를 통해 유대인들이 독일 민족의 분노를 제대로 한번 느껴봐야 하고, 그럴 경우 경찰이 막아서선 안 된다'는 뜻을 그에게 전한 것으로 이해했다.
히틀러는 논란이 될 사항의 경우 애매하게 이중적으로 말함으로써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두고 측근 부하들을 헷갈리게 만들기 일쑤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문제점은 히틀러의 악행을 입증할, 유대인 박해와 관련된 그의 서명이 담긴 결정적 문서가 없다는 것이다. 수정의 밤 때뿐만 아니다. 1945년 패전 때까지 히틀러는 직접 증거가 될 만한 문서를 남기지 않았다. 히틀러는 괴벨스를 비롯한 측근에게 입으로만 '유대인 절멸' 지침을 내렸을 뿐이다.
연구자들은 이를 가리켜 히틀러의 교활한 통치방식의 하나로 여긴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 경우 최종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측근들이 충성경쟁을 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 폴 존슨의 분석을 보자.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반드시 구두로만 지시를 내리는 것이 히틀러의 방식이다. 이 사건(수정의 밤)이 일어났을 때에도 괴벨스와 (비밀경찰 총수) 힘러에게 모순되는 명령을 구두로 내린 듯하다. 역시 히틀러다웠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계획된 사건이긴 해도 생각했던 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고 여기저기서 혼란이 생겼다. 어쨌든 히틀러는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유대인을 더 심하게 박해하기 위해 이 사건을 이용했다](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815-816쪽).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일부 사람들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죽이라고 지시하는 문서가 없으니 히틀러에게 죄가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곤 한다. 일본 극우들, 그리고 이들과 손을 굳게 맞잡은 한국의 '신친일파'들이 '위안부' 성노예를 조직적으로 동원한 문서가 없었다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들은 역사부정이란 맥락에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 같은 배에 올라탄 모습이다(연재 11,12,13 참조).
비밀경찰 총수 힘러, "괴벨스는 돌대가리" 비난
문서가 아닌 입으로만 지침을 내리는 히틀러의 방식은 나치 친위대와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였던 하인리히 힘러(1900-1945)마저 헷갈리게 만들었다. 위에서 다룬 '히틀러의 건축가' 슈페어와 마찬가지로 힘러도 수정의 밤 사태는 전적으로 '돌대가리' 괴벨스가 일으킨 것이고, 히틀러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여겼다. 힘러가 남긴 비망록을 보자.
[(유대인을 겨냥한 공격) 명령은 선전부가 내렸다. 오래 전부터 권력의 야욕에 사로잡혀 있던 돌대가리 괴벨스가 외교적으로 매우 중차대한 이 시점에 일을 벌인 것 같다. 내가 총통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는 이 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1>,개마고원, 2008, 85쪽에서 재인용).
위 인용문에서 '외교적으로 중차대한 시점'이란 (지난주에 살펴봤던) 체코령 주데텐 합병을 둘러싼 뮌헨협정(1938년 9월30일) 등 일련의 긴장상황을 가리킨다. 힘러는 그의 비서로부터 괴벨스가 포그롬을 벌이기로 했다는 소식을 11월9일 밤 11시15분쯤 (그의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를 받고야) 알았다. 따지고 보면 힘러도 포그롬에 책임이 있다. 나치 행동대원들의 방화와 폭력이 이미 시작된 11월 10일 새벽 1시 유대인을 수용소에 잡아넣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적어도 2만 명(자료에 따라선 2만 6,000명 또는 3만 명)이 수용소에 갇혔다.
결과적으로 보면, 힘러는 괴벨스가 시작한 포그롬에 숟가락을 하나 더 얹어놓은 셈이었다. 아마도 힘러의 머릿속으로 괴벨스가 히틀러의 허락 없이 독단적으로 그런 큰일을 벌이진 않았을 테니, 충성 경쟁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힘러의 명령을 받은 게슈타포 요원들은 나치 열성당원들이나 돌격대처럼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도 유대인들을 붙잡아갔다. 영국 역사가 이언 커쇼의 표현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유대인이나 유대인 편으로 보이는 사람을 불지 못해서 안달이 난 시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이언 커쇼, 188쪽). 독일 보통사람들 사이에 뿌리깊이 박힌 반유대 정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치정권의 2인자 헤르만 괴링(1893-1945)는 힘러보다 더 늦게 폭동 소식을 들었다. 방화와 폭력이 한창 벌어질 무렵 괴링은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 안에 있었다. 베를린 역에 닿은 뒤 소식을 듣고 곧바로 히틀러에게 전화를 걸었다. "괴벨스가 무책임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괴링이 거듭 히틀러에게 했던 말이다. 히틀러는 흥분한 괴링을 달래느라 그랬을까, "앞으로 이런 일이 되풀이 돼선 안 된다"는 괴링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괴벨스에게 폭동 지시를 내린 히틀러로선 괴링과의 그런 통화가 불편했을 것이 틀림없다.
"복구비용은 유대인이 내고, 10억 마르크 벌금도 내야"
부총리로 히틀러의 제3제국 공식 서열 2인자인 괴링은 '괴벨스가 자신과 아무런 상의 없이 히틀러를 끼고 큰일을 저질렀다'고 여기고 괴벨스에게 적대감마저 품었다. '수정의 밤' 포그롬이 가라앉은 이틀 뒤(1938년 11월12일) 괴링은 유혈사태와 방화로 비롯된 경제적 손실과 그 대책을 다루려고 회의를 소집했다. 포그롬의 손익 대차대조표를 따지는 그날 회의 참석자는 선전부장관 괴벨스를 비롯해 경제부장관, 재무부장관, 독일보험회사 대표, 보안경찰청장, 치안경찰청장, 외교부대표 등이었다.
보험회사 대표는 파괴된 상점만 7,500개에 이르며, 깨진 유리창 값만 60만 마르크, 약탈된 보석이 170만 마르크를 포함해 재산 손실 총액이 2500만 마르크에 이를 것이라 했다. 문제는 깨진 유리창이 유대인 소유가 아니라 유대인 건물주의 소유이고, 상점 안의 물건들도 유대인 것이 아닌 독일인 도매상의 소유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라울 힐베르크, 89쪽 참조). 부총리로서 (독일 군수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춘) '독일경제 4개년 계획'을 이끌던 괴링은 몹시 화를 냈다. 독일 저널리스트이자 정치학자인 라파엘 젤리히만의 글을 보자.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해를 입힌 게 아니라, 결국 경제를 총괄해야 하는 나에게 해를 입힌 것이오. 오늘 유대인 상점 한 군데가 파괴되고 길거리에 상품들이 나뒹굴면 보험사가 유대인들에게 손해를 보상해줄 것이오. 유대인의 가게에 불을 지르는 건 미친 짓이오"(라파엘 젤리히만, <히틀러: 집단애국의 탄생>, 생각의 나무, 2008, 284쪽에서 재인용).
하지만 그날 회의에서 내린 결론은 (특히 피해자인 유대인들이 보기에) 너무나 일방적이었다. △보험에 들지 않은 유대인 재산을 그대로 둔다(다시 말해, 보상하지 않는다. 약탈품도 돌려주지 않는다) △보험에 든 독일인의 재산은 보험회사가 배상한다. △보험을 든 유대인의 재산에 대한 배상액은 국가가 몰수한다 △유대인 재산 소유자는 '도시 미관을 회복하기 위해' 자비로 파괴시설을 복구한다는 결론이었다.
곧이어 나온 나치 정부의 행정명령은 유대인 공동체로 하여금 복구비용 명목으로 11억 2,000만 마르크의 벌금을 내도록 했다. 피해는 유대인이 입었는데도, 가해자는 그 복구비용을 고스란히 피해자에게 떠넘긴 셈이었다(이 과정에서 작은 논란이 있었다. 나치당의 베를린관구장을 맡고 있던 괴벨스는 그 벌금을 나치당 금고 안에 넣으려 했으나, 괴링은 정부예산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괴링의 손을 들어주었다).
'괴벨스 포그롬'은 홀로코스트 전주곡
괴벨스가 앞장 서 일으킨 유혈사태(괴벨스 포그롬)은 독일 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일부 외국 기업들은 독일 기업과의 동업을 취소했고, 수출은 한때나마 30%까지 줄어들었다. 외환보유고가 적은 독일에겐 큰 타격이었다. 외국뿐 아니라 독일 국내의 분위기도 좋지 못했다. 약탈과 종교시설 방화는 문명국가 독일의 이미지에도 먹칠을 했다는 얘기들이 나왔다. 괴벨스에 대한 괴링이나 다른 나치 지도부의 불만도 컸다. 괴링은 "폭동은 저열한 본능에 굴복하는 것이고 외국으로부터 바람직하지 않은 반응을 불러온다"고 불평했다.
히틀러는 재빠르게 나치 지도부 교통정리에 나섰다. 괴벨스는 앞으로 반유대 선전활동에 집중하고, 유대인 처리는 비밀경찰 총수인 힘러에게 넘기도록 했다. 또한 유대인을 억압하는 모든 조치는 먼저 정부 관료들의 검토를 거치도록 했다. 히틀러의 비서로 '지도자'(Führer) 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받든 나치당 당수부장 마르틴 보어만(1900-1945)은 "당원들이 유대인 개인을 괴롭히는 것은 나치 운동의 품위를 손상시킨다"면서 '11월의 시위'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라는 지침을 모든 지구당에 보냈다. 보어만의 지침은 곧 히틀러의 뜻이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의 글을 보자.
[나치당이 1930년대에 벌인 활동이 독일 관리들에게 가한 효과는 하나였다. 유대인에 대한 조치가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괴벨스 등의 선동가들이 상황을 아마추어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실제로 '합법적인' 방식으로, 모든 조치 하나하나가 메모․통신․회의를 통해서 철저하게 계획되는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성급한 행동은 배제되었다. 관료제가 작동하게된 것이다. 유럽 유대인 500만 명의 절멸은 그러한 관료제적 파괴과정이 한걸음 한걸음 진행된 끝에 나타난 사건이다](라울 힐베르크, 93-94쪽).
유대인에 대한 압박 행동은 나치당의 선동가나 행동대원들이 먼저 나설 것이 아니라 관료들이 철저하게 검토한 뒤의 '합법적 절차'에 따라 이뤄지도록 한 것은 '수정의 밤'이 낳은 큰 변화다. 그로 말미암아 나치 히틀러 정권의 거의 모든 부처의 관료들이 유대인 박해에 개입하게 됐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는 ('수정의 밤'처럼 반유대 선동에 따른 마구잡이 폭력이 아닌) 유대인 정책의 조직화와 관료화가 학살의 규모를 엄청나게 키웠고, 끝내 유대인 말살로 이어졌다고 풀이한다.
'수정의 밤(괴벨스 포그롬)'은 돌격대를 비롯한 길거리 행동대원들과 흥분한 독일 보통사람들이 마구잡이 폭력을 휘둘러 일어난 피바람이었다. 그 뒤로 나치 히틀러 정권은 즉흥적 선동이 아닌 방식으로 박해에 나섰고, 끝내 유대인 절멸 쪽으로 옮겨갔다. '괴벨스 포그롬'은 반유대 정서를 바탕으로 홀로코스트로 가는 길목에서 나치가 들려준 전주곡(前奏曲)이었다. 그것은 듣기 편안한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리창이 깨지고 건물이 불타고 폭도들의 고함과 희생자의 고통스런 외마디가 뒤섞인 불협화음이었다. 그것은 1940년대 전반기에 더 큰 규모의 조직적 국가폭력으로 이어졌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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