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상황을 담은 다큐(기록필름)들을 보면, 패전국의 군인이나 관료들은 막판에 기밀서류들을 불태워 없애기 바쁘다. 문서 소각은 군사기밀이 드러나는 것을 막고 포로 학살 등 전쟁범죄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다. 1945년 4월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버티던 히틀러는 그런 걱정을 하질 않았다. 지난 주 글에서 짚었듯이, 어떠한 중요한 조치나 결정사항을 문서 형태로 내려 보내지 않고 말로만 지시함으로써 히틀러는 자신의 전쟁범죄를 입증할 불리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바로 그 때문에 네오 나치를 비롯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은 히틀러의 무죄를 주장한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인 폴 존슨은 유대인 학살을 다룬 '히틀러 문서'는 없다 해도, 나치 유대인 학살범죄의 주범은 누가 뭐래도 히틀러라고 못 박는다. 그의 글을 보자.
[(히틀러는) 유대인 학살에 관한 글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으려고 애썼다. 히틀러의 명령이 기록된 서류가 없는 탓에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최종적 해결은 (비밀경찰 총수인) 하인리히 힘러의 소행이고, 히틀러는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는 주장도 간혹 나온다. 그러나 이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제3제국(나치 독일) 행정에 어쩌다 혼란이 생기기도 했지만, 원칙은 늘 확실했다. 모든 주요 안건은 히틀러의 결재가 반드시 필요했다. 유대인 문제는 특히 더 그러했다](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825-826쪽).
위 인용문에서 '히틀러의 결재가 필요했다'는 것은 입으로 하는 '구두 결재'를 뜻한다. 1938년 11월10일 '수정의 밤' 포그롬(pogrom)의 경우도 그랬다. 유대인 청년이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외교관을 암살한 것을 구실 삼아 불어 닥쳤던 피바람의 출발은 "유대인들에게 본때를 보이라"고 괴벨스에게 지시한 히틀러의 입에서 비롯됐다.
2인자 괴링, "최종 결정권자는 결국 총통 한 분"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 '수정의 밤' 광란은 오후 6시에 끝났다. 거의 18시간쯤 이어졌던 파괴․방화․약탈․살육 바람이 지나간 뒤, 나치 지도부 안에선 "이건 아니지 않는가"라는 비판이 일었다. 마구잡이 약탈․방화가 독일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대외 이미지에 도움이 안 된다는 애기들이 나왔다. 괴링이 괴벨스 비판에 앞장섰다. '수정의 밤' 폭동을 이끌었던 괴벨스는 속으로 "나는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칼춤을 추었을 뿐인데..."라며 억울해 했을 것이다.
나치 지도부 안에서는 "앞으로는 즉흥적인 선동에 따라 움직일 게 아니라, 관료들의 철저한 사전 검토 아래 유대인 정책이 입안되고 실행돼야 한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독일의 관료제가 유대인 정책을 주무르게 됨에 따라 많은 엘리트 관료들이 유대인 박해의 공범이 됐고, 끝내 홀로코스트로 가는 길을 다지게 됐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역할은 관료제가 대신하게 됐던 것일까. 물론 아니다. 유대인 박해정책의 중심엔 히틀러가 있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로버트 위스트리치(헤브루대, 근대유럽사)의 글을 보자.
[관료제와 내부의 권력투쟁이 반유대주의 정책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역동성을 띠고 추진력을 발휘하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히틀러가 맡았던 결정적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나치 2인자) 헤르만 괴링이 간결하게 지적했듯이, "최종 결정권자는 결국 총통 한 분이다"] (로버트 위스트리치,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을유문화사, 2004, 119쪽).
'수정의 밤' 폭동 훨씬 이전부터 히틀러는 독일의 절대권력자였다. 1933년 히틀러 집권 초기만 해도 제3당의 위상을 지녔던 공산당은 제국의회 방화사건(1933년 2월27일) 바로 다음 날 긴급명령으로 공중 분해됐다. 이어 3월24일 나온 수권법(授權法)은 의회를 거치지 않고 정부가 법을 만들어 공포하는 권한을 안겼다.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그야말로 기계처럼 히틀러가 바라는 유대인 관련법들을 만들어냈다. 그해 7월14일 '정당 창당 금지법'이 나오면서 나치당이 독일의 유일 합법정당이 됐다.
1930년대의 독일은 나치당의 일당지배, 중앙집권적 정부 독재, 그리고 무엇보다 히틀러의 개인의 절대적 권위 아래 움직였다. 히틀러는 정부 부처의 장관들이 참석하는 내각회의에도 얼굴을 잘 비치지 않고 독단적인 결정을 (그것도 문서가 아닌 말로) 내려 보냈다. 당과 정부를 아우르는 최고 지도자(Führer) 히틀러의 반유대 정책을 가로막을 장치는 없었다.
방관자로 남았던 독일 시민들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의 레겐스부르크는 도나우 강변에 자리한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다. '수정의 밤'이 지나고 이곳 중심가에서는 때 아닌 유대인들의 행진이 벌어졌다. 항의시위가 아니라, 강제 동원된 유대인들의 행렬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어두운 얼굴을 한 유대인들이 들고 있던 팻말엔 '유대인 축출'(Auszug der Juden)이라 크게 쓰여 있었다.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길거리의 야만은 곳곳에서 벌어졌다. 비밀경찰에게 붙들려 뮌헨 외곽의 다하우를 비롯한 집단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에게 독일의 10대 청소년들은 욕하거나 야유를 퍼부었다.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히틀러 유겐트에서 철저하게 세뇌를 당한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이 야만적 광기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야만을 지켜보면서 독일 보통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유대인 상점과 주거지가 약탈당하고 유대교회당(시나고그)이 불탈 때 독일 시민들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폭동에 앞장섰던 나치 돌격대원과 폭력배 숫자는 당시 거의 7000만에 이르렀던 독일 인구에 견주면 극히 소수였다. 다수 독일인들은 평소 비호감이던 유대인들이 겪는 굴욕과 고통을 보면서 은근히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많은 독일인들은 마구잡이 폭력사태에 혐오감을 느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속으로 기뻐했든, 혐오감을 느꼈든, 대다수 독일인들이 보인 태도는 '구경꾼'의 그것이었다. 돌격대에게 파괴된 유대인 장난감 가게에서 물건을 집어들고 나오는 어린애들을 향해 "그래선 안 돼!"라며 단호히 막아서는 모습보다는, 약탈과 폭력을 못 본 체 하는 방관자의 모습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동정 또는 폭력배들의 행동에 대한 반감보다 먼저 독일 시민들이 걱정했던 것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자신들의 안전이었다. 구경꾼(방관자)에 머물지 않고 앞에 나섰다간 돌격대나 비밀경찰의 눈길을 끌고 자칫 불이익을 받을 것이란 두려움이 시민들을 움추리게 했다. 뮌헨 외곽의 다하우(Dachau) 수용소를 비롯해 이미 정치범들을 잡아가두는 수용소들이 곳곳에 운용되고 있었다. 라파엘 젤리히만의 글을 보자.
[그 난폭한 반유대적 잔학행위에 저항감을 느끼면서도 수동적으로 묵인했던 점은 오늘날까지도 독일인들에게 양심의 용기가 결여되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중략)자신의 안위와 두려움이 유대인에 대한 동정과 폭력적 행동에 대한 역겨움보다 더 중요했다. 일부 독일인들은 탄압받던 유대인들을 도왔고, 최소한 일시적이나마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해주었다. 그러나 기꺼이 도우려는 사람들의 수는 너무 적었다. 대다수는 그 혐오스러운 사태를 비판하면서도 그대로 방관했다](라파엘 젤리히만, <히틀러: 집단애국의 탄생>, 생각의 나무, 2008, 285-286쪽).
독일 시민사회가 '수정의 밤' 광란에 대해 보인 반응은 한 단어로 줄이자면 '침묵'이었다. 괴벨스의 통제를 받는 독일 언론도 비판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 이상 유대인을 거리에서 만나고 싶지 않다"며 반유대 감정을 부추길 뿐이었다. 독일 종교인들도 무분별한 약탈과 방화에 혐오감을 느꼈을 테지만, 그냥 눈을 감았다. 유대인 교회당(시나고그)가 공격당한 데 대해서 독일 기독교 교회도 이렇다 비판 성명을 내지 않고 침묵했다.
재산세 25%, 속죄세 20%, 이민세 25%
'수정의 밤'은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독일이 안심하고 머물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 나치 정권이 들어서던 뒤 적지 않은 유대인들(특히 기독교로 개종한 동화 유대인들)이 품었던 환상, 다시 말해 나치 정권이 선거를 통해 무너지고 새로운 온건 정권이 들어서는 변화가 있으리라는 희망적인 전망은 사라졌다.
유대인들의 경제력도 무너진 상태였다. 1935년 무렵 이미 유대인 기업체 가운데 4분의 1이 해체되거나 최저 가격으로 비유대인 소유로 '아리안화'됐다. 이런 조치의 수혜자가 독일 자산가들이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수정의 밤'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인 1938년 4월26일 '유대인 재산신고법'이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6월부터는 모든 유대인들은 재산을 숨김없이 등록해야 했고, 그 뒤 체계적인 소유권 박탈이 이어졌다. 여기서 '체계적'이라 함은 유대인 재산에 대한 무거운 세금을 '합법적으로' 뜯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악랄한 세금 가운데 하나가 '수정의 밤'과 관련된 징벌적 '속죄세'다. 지난주 글에서 봤듯이. '수정의 밤' 이틀 뒤 헤르만 괴링의 주도 아래 열린 대책회의는 복구비용 명목의 징벌적 세금으로 유대인 사회에 11억 마르크를 매기기로 결정했다. 과세의 주체는 나치당이 아니라 (헤르만 괴링의 주장대로) 재무부에게 맡겨졌다. 모든 유대인은 신고한 재산의 20%를 1938년 12월15일, 1939년 2월15일, 1939년 5월15일, 1939년 8월15일까지 네 번에 걸쳐 나눠 내야 했다.
'수정의 밤' 악몽을 겪고 독일을 떠나려는 유대인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이 무거운 세금이었다. 무엇보다 이민세율이 터무니없이 높았다. 이민을 떠날 시점에서 재산 가치의 25%를 내야 했다. 나치 히틀러 정권의 심보를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렇다. "유대인들이 독일을 제 발로 떠나려 한다니 고맙긴 하지만, 그동안 잘 먹고 살았던 독일에 '마지막 기부'를 하는 게 마땅하다." 이민세법에는 흔히 다른 세법에 있기 마련인 면제 조항이나 감세 조항도 없었다. 미술품, 외환, 증권을 처분하려 해도 25%의 세금을 내야 했다. 유대인은 '칼만 안 들었지 강도짓이나 다름없는 강탈'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떠나려면 사실상 빈손으로 떠나야
여기서 하나 물어보자. 어떤 부자 유대인이 집이나 회사를 싸게라도 팔고 그에 따른 세금을 다 낸 뒤에 그래도 돈이 남아 있다면, 그 돈을 가지고 독일을 떠날 수 있었을까. 은행에서 마르크를 달러로 바꾼 뒤에 미국이든 어디든 옮겨갈 수 있었을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홀로코스트 연구자 라울 힐베르크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꼽았다.
[첫째, 유대인의 모든 독일 내 재산은 독일 민족의 소유라는 관념이 있었다. 독일 관리들은 유대인이 정직하게 돈을 벌었을 리가 없다고, 다시 말해서 유대인의 재산은 독일 정부가 결국에 가서는 몰수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유대인은 돈을 국외로 반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 결정적이었던 두 번째 이유는, 이주하는 유대인이 일부 자산을 가지고 나가도 된다면 독일 정부가 마르크화를 받는 대신 외환(달러 등)을 내주어야 했는데, 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유대인의 파괴 1>, 개마고원, 2008, 203쪽).
독일에서 외환거래는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기 전부터 외환관리법에 따라 엄격하게 규제되고 있었다. 독일 정부는 가뜩이나 부족한 외환을 아껴 되도록이면 독일 경제에 필수적 물품을 들여오는 데에 쓰려 했다. 안 그래도 미운 유대인이 독일을 떠나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너그럽게 외환을 손에 쥐어줄 뜻이 없었다. 1인당 겨우 10마르크에 해당하는 외환을 공시 가격으로 가져갈 수 있을 뿐이었다.
독일과 국경을 맞대지 않은 나라로 이주할 경우 20마르크를 외환으로 바꿔주었다. 이를테면, 미국으로 이주하는 유대인 가족 구성원이 3명이라면 겨우 24달러를 들고 갈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이 유대인 사회에 알려지면서, 더욱 해외 이주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중개인을 통한 재산 밀반출 등 몇 가지 편법이 있긴 했지만, 위험부담이 따랐다. 한마디로 나치 히틀러 정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거의 빈손으로 떠나야 했다.
재산이 많은 유대인이 금전적 손해를 보기 싫어 은행 예금을 그대로 두고 갈 경우는 어땠을까. 그 구좌는 즉각 동결됐고, 예금주는 그 계좌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런 뒤 나치 정부의 금고로 들어갔다. '수정의 밤'을 거치며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인 1939년 8월까지 약 1년 사이에 독일에서 12만 명, 오스트리아에서 8만 명이 그야말로 거의 빈털터리로 독일을 떠났다(로버트 위스트리치, 92쪽 참조). 길게 보면, 그래도 이들은 전쟁 뒤 밀어닥친 홀로코스트 광풍을 겪지 않아 그나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치와 맺은 팔레스타인 이주 협약
독일을 떠나는 유대인들이 가진 돈을 나치 정부에 뜯기지 않고 가져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창구가 하나 있었다. 팔레스타인(영국의 위임통치령)으로 가려는 유대인들을 위한 하바라 협정(Ha'avara Agreement)이었다. 나치 히틀러 정권이 출범하던 해인 1933년 8월에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꾀해온 시온주의 단체 가운데 하나인 '유대인 팔레스타인기구'(Jewish Agency for Palestine, 이하 약칭 유대인기구)와 나치 정권이 맺은 하바라 협정은 나치와 대영제국, 시온주의자들이 손을 잡은 특이한 경우다.
'이주 협정'(Transference Agreement)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협정은 독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가려할 경우 적어도 1천 파운드의 순은을 독일은행에 예치하면, 독일은 최신형 농기구 등의 공산품을 예금자 몫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수출한다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사항은 이러했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유대인 '자본가'는 독일 수출업자와 접촉하여 독일 상품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낼 수 있었다. 독일의 수출업자는 상품 대금을 이주하는 유대인의 계좌에서 마르크화로 받고, 이주하는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뒤 그 상품에 해당하는 돈을 유대인기구에서 팔레스타인 파운드로 받았다. 그러면 그 상품은 유대인기구가 시장에 내놓았다. 유대인기구, 독일수출업자, 유대인 이주자 모두 그 거래에 만족했다. 독일 상품이 팔레스타인에 쏟아졌고, 얼마 뒤에는 바터 협정으로 보충되어, 팔레스타인산 오렌지가 독일산 목재, 포장지, 자동차, 펌프, 농업기계 등과 교환되었다](라울 힐베르크, 205쪽)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이 협정은 끝났다. 그동안 약 1억 달러 어치의 독일 공산품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수출됐다. 1930년대에 독일은 팔레스타인으로 상품과 자본을 가장 많이 수출한 국가로 꼽힌다. 이를 두고 중동의 아랍인들은 '타고날 때부터 이익을 좇는 데 이력이 난 유대인들과 대영제국의 도움 아래 나치와 손을 잡고 서로의 이익을 챙겼다'고 눈을 흘겼다.
대영제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국가'(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를 세워주기로 한 밸푸어선언(1917) 뒤 팔레스타인으로 옮겨가는 유럽 유대인들이 크게 늘어났고, 그 때문에 높아진 중동의 정세불안은 21세기 오늘에까지 이르렀다(연재 80 참조 바람). 하바라 협정에 따라 독일 유대인 수천 명이 팔레스타인으로 옮겨갔다. 독일의 기술․관리 인력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옮겨감으로써 그곳 유대인 사회는 더 큰 경쟁력을 갖게 됐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독일 유대인 6만 명쯤이 팔레스타인으로 옮겨갔다. 1932년 유대인 인구는 팔레스타인 전체인구의 17%인 18만 명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1939년 유대인 인구는 29%인 44만 5,000명으로 불어났다(홍미영,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와 시온주의 프로젝트',『한국이슬람학회논총』제25-2집, 2015 참조). 이런 인구지도의 변화에다가 1939년 이후 전란을 피해 몰려온 유대인 이주 물결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엄청난 긴장을 일으켰다.
"아이들 생명보다 이스라엘 역사가 중요"
나치 히틀러의 광기를 피하려면 어딘가로 옮겨가야 했다. 유대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한 곳은 어디였을까.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 했던 팔레스타인이었을까. 아니다. 이주 희망지 1순위는 미국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럽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으로 가도록 권하면서, "그곳에 가면 빈 땅이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많은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은 매력적인 곳이 못됐다. 영국 유대인 사회주의자 존 로즈의 글을 보자.
[다른 현실적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난민들은 브리차(팔레스타인으로의 불법 이주를 돕는 조직)의 말을 따라 팔레스타인 연안으로 향하는 낡아빠진 배를 타기 쉬었을 것이다. 하지만 (2,000년 전 유대인 선조들이 살던 곳으로 귀환한다는) 강렬하고 감정적인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시온주의 조직자가 나중에 '미국유대인회의'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난민 대부분은 미국으로 가고 싶어 했다](존 로즈, <강탈국가 이스라엘>, 2018, 90-91쪽).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살펴본다. 유대인 시온주의자들이 독일에서 유대인들이 탈출하는 것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이스라엘)를 세우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던 시온주의를 충실히 따른다면, 유대인 난민들은 이스라엘로 향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난민들은 영국이나 미국으로 가려고 애썼고, 시온주의자들은 그런 모습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렇기에 심지어 유대인들의 이주 기회를 훼방 놓기도 했다. 사례를 보자.
1938년 영국은 수천 명의 독일 유대인 아이들을 영국으로 데려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배경에는 1936년부터 1939년까지 3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아랍인들의 봉기와 관련이 있다. 밸푸어선언(1917)에 따라 유럽의 유대인들이 영국의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것은 반대한 아랍인들의 대규모 무장 봉기(1936)는 런던의 정치인들을 머리 아프게 만들었다(연재 80 참조).
영국은 이중적인 정책을 폈다. 한편으로는 아랍인들의 봉기를 무력으로 누르면서 다른 한편으론 팔레스타인 지역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유대인 이주를 제한적으로 막았다. 영국이 독일에서 유대인 아이들을 데려오려고 했던 것도 아랍 봉기와 관련된 하나의 대안이었다. 하지만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의 이런 관대한(?) 계획을 반대하고 나섰다. 훗날 이스라엘 초대 총리가 되는 다비드 벤구리온(1886-1973)의 말을 들어보자.
"만약에 독일에 있는 (유대인) 아이들이 영국으로 향하면 모두 살지만 이스라엘로 향하면 절반만 살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는 둘째 방안을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아이들의 생명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도 중시하기 때문이다"(Lenni Brenner, <Zionism in the Age of the Dictators>, Lawrence Hill & Co, 1983, 149쪽).
벤구리온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란 곧 이스라엘 건국(1948)을 가리킨다. 유대인이 살 길을 찾아 발버둥치는 상황에서도 시온주의자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더 중요시했다. 따라서 시온주의자들은 되도록 많은 숫자의 유럽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향하길 바랐다. 독일 유대인 어린이 1,000명을 영국으로 받아들인다는 계획은 이런저런 사정이 얽혀 끝내 없던 일이 됐다(위 인용문이 들어있는 <독재자 시대의 시온주의>의 저자 레니 브레너는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작가로, 미 유대인 출신이면서도 시온주의 및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민권운동과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비판하는 평화운동을 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 통치와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글들을 써왔다).
"오늘 나는 예언자가 되고자 한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오른 뒤 1945년 4월까지 12년 동안은 유대인과 정신지체자, 집시(로마족), 성소수자 등 나치가 규정한 이른바 '열등 인간 집단'을 절멸시키는 야만과 광기의 시기였다. 나치의 폭주 기관차가 내달린 종착역은 600만 유대인이 떼죽음을 겪은 것으로 알려진 홀로코스트였다.
나치 히틀러 정권이 집권 초부터 마음먹고 유대인 몰살을 꾀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머무는 유대인들을 다른 곳으로 쫓아내려 했다. '수정의 밤' 광란이 벌어졌던 1938년 무렵부터 유대인들을 독일에서 내보내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졌다. 그러면서도(글 위에서 본대로) 이민세 등으로 유대인이 지닌 재산을 갈취해 독일 재정에 보태려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독일의 세력범위 안에 더 많은 유대인들이 놓이게 되었을 때도 처음엔 (학살보다는) 이주와 추방에 더 무게를 두었다. 그러다 곧 홀로코스트 쪽으로 옮겨갔다.
히틀러의 어록에는 "유대인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히틀러는 "독일에서 유대인이 사라져야 한다"는 독설을 거듭 내뱉었다. "이제 유대인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도 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7개월 전인 1939년 1월30일, 히틀러는 총리 취임 6주년을 맞아 제국의회에 나와 연설하면서 "유대인의 웃음소리가 머지않아 통곡으로 바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히틀러는 스스로 "오늘 나는 다시 한 번 예언자가 되고자 한다"고 했다. 다음 주엔 히틀러의 '예언'이 끔찍한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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