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운데 정작 농업 개방 속에서 한시가 급한 농·어촌 지역의 역량 강화와 개발 사업은 정치권의 외면을 받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 민간을 막론하고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농림수산식품부의 농촌 지역 개발 리더십 교육 프로그램 외에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정책을 찾아볼 수 없다.
정부는 오는 2010년부터 '농림어업인 삶의 질 향상 2차 5개년 기본 계획'을 집행할 예정이다. 지난 2005년부터 시행된 1차 5개년 기본계획에 이어 시행되는 것. 1차에 20.3조 원이 투자됐던 이 사업은 2차에서도 만만찮은 재원이 투자될 것이라는 점에서, 지역 개발의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일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지역재단과 '농어업회생을 위한 국회의원연구모임'이 '새로운 지역발전시대의 지역 역량강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토론회를 주최한 것은 이런 정부의 계획과 무관치 않다.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이제는 하드웨어가 아닌 지역 실정에 맞는 효율적인 소프트웨어 구축이 시급하다"며 "여기에는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지난 10일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지역재단과 '농어업회생을 위한 국회의원연구모임'이 '새로운 지역발전시대의 지역 역량강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토론회를 열었다. ⓒ프레시안 |
"농민은 '교육 피로증'…정책-교육 이어지지 않아"
이날 첫 번째 발제를 맡은 유정규 지역재단 운영이사는 "지역발전에 대한 전통적 인식은 도로나 항만 건설, 산업단지, 리조트 유치 등의 하드웨어 구축을 중시해 왔다"며 " 그러나 이런 접근은 지나친 자원낭비와 환경파괴를 초래하고, 발전성과가 외부로 유출되며, 각종 시설이 미숙하게 운영되는 점,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점 등 때문에 지역 사회 내부의 갈등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유정규 이사는 "따라서 지역 개발에서 이제 기존의 하드웨어 구축보다는 소프트웨어 구축을 중시하는 경향"이라며 "또 중앙정부의 정책 추진 방식이 중앙정부 주도의 하향식, 기본설계 보급방식에서 지역 주민의 참여를 토대로 한 상향식, 공모제 방식으로 전환하게 됐다"고 말했다.
'농림어업인 삶의 질 향상 2차 계획'에는 이런 경향을 반영해 기초 생활권 개발 사업을 '포괄 보조 사업'식으로 추진하겠다는 방안이 담겨 있다. 각 지역에 사업 선택의 폭이 더 넓어지는 셈.
그러나 유 이사는 현재 여러 농촌 지역에서 예산을 투입해 시행하는 교육 프로그램과 개발 계획의 문제점을 고려해 향후 계획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우선 그는 "많은 농촌 지역 주민들이 다양한 '교육'을 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역의 총체적인 역량 증대로 이어지지 못한 이유를 분석하고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농촌 지역 주민의 역량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프로그램은 크게 교육의 목적과 내용을 중심으로 볼 때 농업 인력 육성 과정과 농촌 지역 개발 인력 육성 과정으로 나뉘어 진다. 여기에는 지역농업특성화 교육, 농촌지역개발리더십육성과정, 향토음식개발과정, 녹색농촌체험마을동기화과정 등이 포함돼 있다.
유정규 이사는 "대부분 교육이 개인의 영농 기술이나 농가 경영 능력의 향상에 목표를 뒀다"며 "개인적인 역량을 강화하는 데는 기여해왔을지 모르지만 지역에 효과가 공유, 전파되고 지역 농업 활성화, 나아가 지역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대부분 교육이 당초 목적과 달리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행정 혹은 농협 등의 권유와 부탁에 의한 '시간 때우기'식 혹은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식으로 진행됨으로써 많은 예산과 시간의 투입에도 지역의 리더가 육성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더군다나 최근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교육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이제 '교육 피로증'이 확산되는 단계에 이르렀다"며 "그 원인 중에는 교육의 내용이나 결과와 연계된 정책프로그램이 없고, 대부분 교육이 교육 그 자체로 끝나버리고 마는 현 시스템의 영향이 크다"고 밝혔다.
"상향식, 공모식 농정이 '만능' 아니다…로컬거버넌스 필요"
농촌 지역 개발 정책이 상향식, 공모식으로 변하면서 새롭게 발생하는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유정규 이사는 "2000년 이후 농정이 주민주도의 상향식으로 변화되어 왔지만 아직도 현장의 분위기에는 큰 변화가 없다"며 "이는 정책의 내용이나 추진방식이 변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지역 내부의 역량 부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농정은 중앙의 설계에 의한 하향식으로 추진됐고, 지역 주민이 자기 지역의 지역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것이 사실"이라며 "그 결과 지역활성화를 주도할 수 있는 지역리더의 존재도 찾아보기 어려웠고, 동시에 지역 역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기회도 봉쇄되어 왔다"고 분석했다.
유 이사는 최근 전국적으로 몇몇 '스타마을'을 중심으로 정책 사업이 집중되는 점을 지적하며 "소수의 선택된 마을에 대규모 공적자금을 중복적으로 투입하면서 선택받지 못한 대다수 마을은 '주민주도 상향식'이라는 미명 아래 외면하는 '상향식 공모제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또 이른바 '미인대회' 방식으로 화려한 수사와 위장을 통해 훌륭한 계획서를 만들고, 적절한 대응으로 심사를 통과해 사업대상지로 선정되도, 막상 사업을 시작하면 현지 상황과 맞지 않거나 주민의 반대에 직면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고 비판했다.
유정규 이사는 "결국 지역개발계획은 단순히 계획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기초한 사업실행과 이를 위한 조직화, 동기부여, 나아가 이를 수정할 수 있는 일련의 '플랜-두-씨(plan-do-see)', '러닝 바이 두잉(learning by doing)' 기능이 원활히 발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세계화와 개방화에 대응하면서 자치와 분권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지역주도, 주민 주도의 상향식 정책흐름에 부응해 지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새로운 구심체로서 '로컬거버넌스(local governance)'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영국 지역 역량 강화 사업, 주민들이 시행착오 통해 능력 키우는 것이 목적"
이어 발제에 나선 김태연 단국대 교수는 영국의 지역 역량 강화 사업을 소개하며 "이 사업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추진과정에서의 시행착오를 통해 지역 단체 및 기관들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으로 소위 '지역단체 주도 시책'이라고 불린다"고 설명했다.
김태연 교수는 "영국의 농촌 지역 역량 강화사업은 사실상 한두 가지 정책으로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농촌 지역에서 실시되는 모든 사업을 파트너십을 중심으로 실시하도록 하면서 이뤄지고 있다"며 "경제발전, 다원화, 관광산업, 지역사회 개발, 환경보호 강화, 기술지원 등이 포괄돼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나라 농촌지역에 민간단체나 기관이 부족한 현실 때문에 지속적으로 행정기관이나 공기업에 의존해서 지역개발 사업을 시행하는 행태가 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토론에 나선 양병찬 공주대 교수는 "가장 선진적인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 리더 육성 프로그램도 어떤 지원 구조 없이 사업 단위로 전개되기 때문에 지역의 주체가 불분명하고 몇몇 전문단체에 의해 주도될 수밖에 없다"며 "지역의 거점 시설을 확보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상시적으로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손재범 사무총장은 "지역발전을 위한 협의회의 경우 명망가 중심의 인적 구성을 탈피해 지역 내외부의 다양한 이해를 대표할 수 있고 실질적인 논의를 주도할 수 있는 이들로 인적 구성을 달리해야 한다"며 "사안별 구성뿐만 아니라 지역자원의 발굴, 조사와 데이터베이스를 위한 협의회를 구성해 이들이 지역 발전을 위해 책임감을 갖고 고민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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