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사람과 통성명을 하고나면 자주 듣게 되는 이야기를 한데 모아본 것이다. 사실 난감할 때가 많다. 별에 대한 이야기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별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고, 날씨야 대기 과학자들 소관이니 난들 알 도리가 있겠는가. 망원경도 없다. 아마추어 천문가로 활동할 당시에는 직접 만든 것을 포함해서 몇 대를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한 대도 없다. 내가 현실 감각이 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라 맞장구치면서 인정하지만 천문학자 중에도 악랄한 악질이 많다는 얘기는 차마 못한다.
그런데 천문학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데 한 권 소개해 달라고 하면 솔직히 좀 난감하다. 조금은 우주에 대한 환상과 동경으로 들뜬 마음을 붙잡아줄 책이 언뜻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추천하는 첫 번째 천문학 책은 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이다. 욕심 같아서는 우리나라 천문학자가 쓴 책을 권하고 싶은데 마땅히 알려줄 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책은 이 부분이 마음에 드는데 저 부분이 미흡하고, 저 책은 그 부분은 마음에 차는데 이 부분은 거슬리는 식이다.
'일반인이 처음 읽을 만한 천문학 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번역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훌륭한 역작이 많지만 역시 정서적인 면에서 우리나라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경우가 많다. '처음 읽을 책'을 읽고 난 다음에 읽으면 좋을 디테일한 책들이 대부분인 것이 현실이다.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일반인이 처음 읽을 만한 천문학 책'은 도대체 어떤 책일까 반추해 봤다. <코스모스>의 그늘이 워낙 커서겠지만 이 책의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천문학적 사실들을 다루지만 이야기 전개는 서정적으로 하면서 책 전체에는 서사가 흐르는 책, 정도랄까. 써놓고 보니 또 <코스모스>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헤어날 수 없는 강력한 자기장 같은 책이라고나 할까. 여기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조금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서 서양 책들이 어쩔 수 없이 갖고 있는 이질감 없이 그냥 공감할 수 있는 책.
유학 시절에 워싱턴 대학에서 일하던 천문학자 그레고리 보선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천문학을 (본격적으로 또는 체계적으로) 접하는 일반인에게 '어떤' 내용을 '왜' 그리고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이 많다고 했다. 그가 천문학 전공이 아닌 대학생들을 위한 강의에서 선택한 것은 고전적인 천문학 내용을 순차적으로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이라는 주제로 우주론과 우주 생물학에 초점을 맞춰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강할 때 '인간과 우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늘 생각하고 있던 것도 바로 그가 말한 그런 방식의 접근법이었다. 언젠가 강의를 하게 되거나 책을 쓰게 된다면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최신의 천문학이 어떻게 답하는지를 제시하고 학생들이 가장 많이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마침 인문·사회 계열 학생들을 위한 교양 천문학 강의를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나는 다른 많은 내용들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현대 우주론'을 통해서 우주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우주 생물학'을 통해서 우리들의 근원에 대한 천체물리학적 접근을 한 후 우주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반추해 보는 커리큘럼을 들고 학생들 앞에 섰다. 다행히 학생들의 반응은 좋았다.
내친 김에 현대 우주론을 설명하기 위한 두 기둥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물론 수학을 사용하지 않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역시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학생들은 큰 흥미를 보였고 내용에 대한 이해도도 생각보다 좋았다. 우주 생물학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는 분야라서 생생한 최신의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학생들과 공감하고 호흡하는데 아주 적절한 주제라고 생각한다. 우주론과 우주 생물학 이 두 축을 바탕으로 인간과 우주에 대한 생각을 해보는 것으로 한 학기를 마감하곤 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욕심을 내서 도입한 것은 예술 작품 속에 녹아 있는 우주에 대한 단상을 끄집어내서 소개하는 강의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하고 있는 천문학적인 내용을 미천 삼아서 예술 작품을 만들어서 내는 과제를 제출하도록 하기도 했다. 학생들의 작품은 다시 다른 수업에 인용하기도 하면서 수업 진행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언젠가 책을 쓰게 된다면 이런 내 생각을 모두 담을 것이다.
▲ <인간과 우주>(박창범 지음, 가람기획 펴냄). ⓒ가람기획 |
"서양적 귀납 기술은 과학적 발견을 낳는 데에 효과적이다. 그러나 귀납적 접근 방법은, 여러 사실을 묶어놓고 그 전체적 의미를 깨닫지 못할 위험이 있다. 또 잘 이해된 부분들을 하나하나 모아 전체를 이루다 보면, 그 전체 자체를 이해 못하고도 이해한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신체란 손가락, 발가락 열 개와 손발 두 개씩과 머리 하나가 몸에 붙은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만다면, 인간 육체의 절묘한 미와 대칭성과 유기적 조화 운동이 간과될 수 있다."
그러고는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따라서 모든 구성원이 하나를 이루는 우주 전체를 거시적으로 파악할 때 우주를 참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서 나는 이 책의 흐름을 우리의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에 걸맞게 우주 전체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인간에 이르도록 꾸몄다. 오늘날 인간이 우주에 대해 알아낸 잔 지식은 너무나 많아 욕심이 지나치면 그것을 어수선하게 늘어놓아 읽는 이를 지치게 하기 쉽다. 나는 이 점에 유념하여 되도록 질문을 먼저 던짐으로써 독자들도 이 과학놀이에 끼어 함께 생각할 기회를 주고자 한다."
그의 의도대로 이 책은 '우주의 조감도'로부터 시작해서 현대 우주론 이야기를 거쳐서 '인간과 우주'에 대한 성찰로 끝을 맺고 있다.
내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우주의 진화' 단원이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라는 소단원에서 그 다음 소단원에서 이어지는 팽창 우주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한 기초가 되는 상대성 이론에 대한 내용을 일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냥 관념적인 몇 마디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래프를 적절히 사용하면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현대 우주론을 다룰 때 꼭 넘어야할 산 중 하나인 상대성 이론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다만, 좀 더 깊이 있는 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독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다는 것이 내가 강의와 강연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린 결론이다.
또 다른 소단원인 '우주의 기원'은 내겐 더 마음에 드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주가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논의, 즉 우주의 기원에 대한 천문학적인 고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를 이야기할 때 너무나도 당연하게 등장할 것 같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내용은 아직 과학적인 관측을 할 수 있는 영역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또 가끔씩은 저자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물론 노골적으로 그렇다고 밝히지는 않지만) 누락되는 경우가 많다.
박창범은 <인간과 우주>에서 양자역학적인 우주 기원론을 예로 들면서 우주의 기원 문제에 대한 현대 과학의 입장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우주의 기원 문제는 본질적으로 난해하다. 따라서 우주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성과는 금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주, 즉 시공간과 물질과 물리 법칙의 기원에 대한 궁극적 질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우주는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그리고 왜 생겨났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과학자들 사이에 요사이 유행하고 있는 발상을 역시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우주는 무(無)로부터 저절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생겨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유일한가, 같은 또 다른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현대 천체물리학의 대답도 (예를 들면, 린데(Linde)의 '번식 우주' 같은) <인간과 우주>에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큰 아쉬움도 남는다. 이왕 양자역학적인 우주 기원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그 전에 먼저 '양자역학' 자체에 대해서도 정면 돌파를 시도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은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고 심지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내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다.
에필로그 격인 '인간과 우주' 단원에서는 그가 '초대의 글'에서 호언했던 것처럼 '우주 속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 천문학 이야기를 통해서 맥을 짚으려는 시도는 좋아 보인다. 다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인류의 우주탐사' 이야기와의 개연성 있는 연결이 좀 아쉽다.
박창범의 <인간과 우주>는 내겐 동지 같은 책이고 좋은 모델이 되었던 책이고 용기를 주었던 책이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것이 1995년이고 현재 서점에서 유통되고 있는 책(초판 5쇄)이 출간된 것이 2000년의 일이다. 그동안 현대 천문학의 내용은 혁명적으로 변했다. 특히 우주론 분야에서는 우주의 운명에 대한 생각이 송두리째 바뀐 것 같은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이런 시대적인 변화를 반영한 개정판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반인이 처음 읽을 만한 천문학 책'으로 <코스모스>와 더불어서 우리나라 천문학자가 쓴 책을 권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 책이 (언젠가는 나왔으면 하는) 박창범의 <인간과 우주> 개정판이든 또 다른 새로운 책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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