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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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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고집

[한윤수의 '오랑캐꽃']<55>

70년대만 해도 비쩍 마른 사람을 놀릴 때 방글라데시라고 불렀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고, 기근으로 1974년에만 10만명이 굶어 죽었으며 비쩍 마르다 못해 뼈가 앙상한 어린이들의 사진이 신문에 종종 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방글라데시인들은 적당히 살집이 올라 보기 좋은 모습이다.

그런데 그 옛날 못먹을 당시의 방글라데시 같은 사내가 찾아왔다. 비쩍 마른 몸에 커다란 눈이 기묘한 대조를 이루어서 보기만 해도 저절로 동정이 가는 그런 얼굴이었다. 이름은 라조.

그는 불법체류자로 한달치 월급을 못 받았다고 했다. H주임이 말했다.
"불법이면 받기 힘든데. 방글라데시 갈 각오가 되어 있으면 몰라도."
"나 방글라데시 안 가요. 안 가고 받게 해주세요."
"그럼 갈 때 받으세요."
"돈 없어요. 지금 받아야 해요."
"그러면 진정서 써야 하는데."
"진정서 쓰면 노동부 가야 하잖아요. 노동부에 안 가고 받아주세요."

라조와 H주임은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 H주임이 손을 들고 말았다. H주임은 발안고등학교 시절에 선도부장을 지내서 누구보다도 선도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라조를 선도하지 못했다. 라조의 고집이 너무나 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안강최>라고 해서 안고집, 강고집, 최고집을 치지만 방글라데시 방고집은 좀 더 센 것 같았다.
결국 H주임은 직속상관인 U실장에게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비번인 U실장은 짬뽕을 기막히게 잘해서 짬뽕 국물까지 다 먹는다는 유명한 중국음식점에서 남편과 함께 느긋한 점심을 즐기는 중이었다. H주임을 패퇴시킨 라조는 이제 전화로 U실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방글라데시 안 가고 돈 받게 해주세요."
U실장은 같이 식사하는 남편에게 미안해서 중국집 자동문 밖으로 나가서 상담에 필요한 기본적인 사항을 물었다. 그러나 라조는 묻는 말에는 전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20분 동안 자기주장만 되풀이했다.
"나 안가고 돈 받게 해주세요."
지친 U실장도 무릎을 꿇었다.
"알았어요. 내일 와보세요."

전화 통화가 끝났을 때는 먹던 짬뽕이 다 불어서 떡이 되어 있었다. U실장은 평택에서 미군과 한국 주민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분쟁을 해결해준 유능한 협상 전문가였지만 라조에게는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라조는 외부의 지원세력을 적절히 활용할 줄도 알았다. 다음날 전혀 모르는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으니까.
"저 라조를 도와주는 교회 목사입니다. 라조 좀 잘 부탁합니다. 아니면 제가 직접 센터로 찾아뵐까요?"
나는 기겁을 하고 말렸다.
"천만에요. 오실 필요 없습니다.
결국 U실장은 별별 곡절을 다 겪으며 라조의 돈을 받아주었다.

먹을수록 냠냠이라고 재미가 났는지 며칠 후 라조가 또 왔다. 이번에는 비자 문제였다. 그는 점점 대담하게 나왔다. 해묵은 숙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듯이.
"비자 연장 해주세요."
여권을 보니 그는 3개월짜리 단기 상용(C-2) 비자로 입국해서 눌러앉은 케이스였다. 그는 고집만 잘 부리고 약간의 돈만 쓰면 단기 비자로 대한민국 국적까지 취득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고집이 자기 것은 하나도 희생하지 않은 채 상대방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어내려는 욕심에서 나오는 것임을 눈치 챘다. 그래서 조용히 물었다.
"비자 기한이 얼마나 지났죠?"
"1년."
"며칠이면 몰라도 1년씩이나? 그건 연장 안되요."
그러나 그 정도로 물러날 방고집이 아니었다.
"벌금 물고 연장한 친구도 있는데요."
옳지! 나는 그 말을 물고 늘어졌다.
"그럼 그 친구한테 연장해달라고 하세요."
방고집은 당황했다.
"아니, 여기선 안되요?"
"친구한테 부탁하라니까."
고집은 우물거렸다.
"정말 안되요?"
나는 큰소리로 말했다.
"안돼!"
그 날로 방고집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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