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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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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국

[한윤수의 '오랑캐꽃'] <48>

현재의 인류는 약 5만 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난 같은 조상의 후손들이다. 아프리카에서 올라와 서쪽으로 간 사람들은 백인이 되었고, 동쪽으로 똑바로 가다가 태평양에 막혀 멈춘 사람들은 한국인이 되었으며, 동쪽으로 가다가 따뜻한 남쪽으로 휘어져 내려간 사람들은 동남아시아 인이 되었다.

5만 년 전에 헤어졌던 형제들이 현대에 와서 다시 만나 섞이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서다. 약 40년 전에 한국인들이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갔다. 독일인들은 대부분 잘 대해줬다. 그러나 일부 저질들은 한국인을 모욕하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럴 때 한국인의 피가 끓었다.

10여 년 전부터 동남아시아 인들이 노동자로 한국에 왔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잘 대해줬다. 그러나 일부 저질들은 동남아시아 인을 모욕하는 짓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럴 때 동남아시아 인의 피가 끓는다.

오전 이른 시간인데 한 여성이 울며 전화했다.
"나 필리핀 사람. 과장이 때렸어요."
무조건 오라고 했다. 30분쯤 후 키 큰 20대 여성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들어왔다.
"왜 때렸어요?"
"일을 잘못 한다고요."
"어디를 때려요?"
"여기요."
하는데 보니 뒤통수다.
"손으로 후려쳤어요?"
"예. 오늘은."
"그럼 다른 날도 때렸어요?"
"예, 막대기로 때린 날도 많아요."
"때리기만 해요?"
"아뇨. 엉덩이도 만져요."
"때리는 거 본 사람 있어요?"
"예, 베트남 친구하고 한국인 반장하고 한국인 아줌마 이렇게 셋이 봤어요."
"베트남 친구가 증인 서줄 수 있어요?"
"예, 베트남 친구도 맞으니까요. 엉덩이하고 가슴 만진 적도 많아요."
"만진 거 본 사람 있어요?"
"기계에 가려서 잘 안 보여요."

역시 성추행은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계속 물었다.
"사장님이 때린 거 알아요?"
"예, 알아요. 사장님도 때리니까요."
"그럼 사장님도 엉덩이 만졌어요?"
"아뇨. 사장님은 나 안 만졌어요. 때리기만 해요."

마침 점심시간이라 식당에 데리고 가서 밥을 시켜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콩나물국에 눈물방울만 떨어뜨릴 뿐 밥을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과장의 나이를 물어보았다. '많다'는 것을 보니 40대 아니면 50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서 고소장을 써가지고 경찰서에 제출했다.

담당 형사가 필리핀 여성의 진술을 받는 동안 나는 중키에 아주 단단해 보이는 형사반장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와 나는 저질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또한 얘기를 계속하다가 우리 둘은 꽈(科)가 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언가에 미치면 약간 맛이 가는 스타일이 나하고 얼마나 똑같은지! 그는 오산에서 남양까지 편도 35키로 왕복 70키로를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운동에 필(feel)이 꽂힌 사람입니다."
내가 말했다.
"나도 필이 꽂힌 사람이요. 분야는 다르지만."

둘은 함께 웃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저질들에게 본때를 보일 수 있을까를 상의했다. 우선 형사 두 사람과 우리 직원 하나를 공장으로 보냈다.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지만 이번 사건의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이렇다. 가해자가 구속되지는 않았다. 그에게 딸린 식구가 너무나 많아서 차마 구속시킬 형편이 못 되는데다가, 또 한편으로는 증인들까지 *증언을 꺼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과는 있어서 1) 사장으로부터 내일 아침 9시까지 노동자의 직장을 바꿔주겠다는 약속과 2) 가해자로부터 법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으며 다시는 여성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각서와 3)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문은 받아냈다.

*증언을 꺼려서 : 한국인 반장과 아줌마는 그 회사에서 최고참인 한국인 과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고, 똑같이 성추행을 당한 베트남 여성도 혹시라도 회사에서 재입국을 시켜주지 않을까봐 두려워하여 증언은커녕 우리 직원과 눈길을 마주치는 것조차 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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