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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앗의 봉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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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앗의 봉투

[한윤수의 '오랑캐꽃']<23>

안산에서 베트남 노동자가 찾아왔다. 이름은 루앗.
그는 퇴직금을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는 애매한 처지에 있었다. 상시 고용인원 5명 이상이라야 퇴직금을 받는데 그 공장에는 정식 노동자가 베트남인 3명뿐이었다. 다만 파키스탄 불법체류자 2명이 더 있었지만 그들은 서류상에는 안 나타나는 인물들이었다!
서류상으로 따져가지고는 퇴직금을 받기 어려워서 근로감독관에게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5 명이라니깐요." "불법까지 포함하면 5명이 맞잖아요!"
센터에선 K간사가 매일같이 감독관에게 전화하고, 루앗은 안산 노동부로 직접 찾아가서 조르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다.
"내 돈 꼭 좀 받게 해주세요."

전화와 방문이 교차하는, 끈덕진 양면 작전에 피로를 느낀 감독관은 결국 사장을 호출했다.
"줄 거요? 안 줄 거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사장은 양보했다.
"주겠습니다. 하지만 나도 억울하니 좀 깎죠."

우리가 요구한 금액에서 40프로 정도가 깎였지만, 기본적으로 감독관이나 사장님이나 두 분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씨름해서 받은 돈이 142만원인데 루앗은 그중에서 10만원을 봉투에 넣어 가져왔다.
"목사님, 받으세요."
루앗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내밀었다.

예나 지금이나 센터를 꾸려나가는 일이 힘들지만 그렇다고 외국인에게 후원금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돈이 끼면 순수하게 돕는 관계가 왜곡될 것 같아서. 하지만 이번 루앗의 봉투는 받아도 될 것 같다는 안이한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못받을 돈을 받아주어서?
찜찜했지만 받았다. 물론 한편으로는 외국인도 우리 센터를 후원한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웬반루앗 10만원 후원!>은 우리 센터의 모든 홍보물에 실렸다. 그러나 이게 실수였다.

하필이면 그 직후 루앗이 곤경에 처하고 우리 센터는 그를 도울 수 없는 묘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돈은 받아놓고!

루앗은 3년 체류기간을 마감하는 마지막 직장을 잡았다. 벌써 세 번이나 직장을 바꾸어서 그는 더 이상 직장을 옮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직후 이 회사가 불법체류자를 고용한 젓이 발각되어 외국인 재고용이 취소된 것이다.

루앗은 3년 체류기간이 끝나면 그 회사를 통하여 재입국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재입국도 안되고 다른 회사로도 갈 수 없게 된 루앗은 나를 찾아왔다.

"한국에서 다시 일하고 싶은데요. 내 잘못도 아니고 회사 잘못 때문에 한국에 못 온다니 말이 되나요?"

말이 안된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현행법상으로는 뽀족한 방법이 없었다. 고용지원센터와 노동부, 출입국사무소 등과 아무리 상의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국민권익위원회에 진정해보았으나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길은 결국 없었다.

출국 만기가 다가올수록 미안한 마음이 더해갔고 왜 돈을 받았느냐는 자괴감에 그의 얼굴 보기가 괴로웠다. 심지어 키큰 사람이 들어오면 다 루앗처럼 보일 정도였다. 빚진 종이라더니! 돈을 받은 게 이렇게 괴로울 줄은 미처 몰랐었다. 외국인을 도울 수 있는 만큼만 돕고, 그걸로 만족하던 때가 좋았는데!

루앗은 출국을 차일피일 미루다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나는 불법체류자가 되지 말고 귀국하라고 강력히 권고하지도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루앗이 찾아온 것은 출국기한을 두 달쯤 넘긴 지난 12월이었다. 루앗은 물었다.

"내일 베트남 가려는데 출입국에 벌금 얼마나 내야 되요?"
미안하던 참에 나온다는 대답이
"벌금 없어요. 불법체류자가 가겠다는데 무슨 벌금? 대환영이지요!"
루앗은 씁쓸히 나를 바라보다가 악수를 청했다.
루앗은 그렇게 떠났다.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긴 채.
그 후 우리 센터는 아무리 어려워도 외국인의 후원금을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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