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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친구

[한윤수의 '오랑캐꽃']<15>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 사람들은 음식을 같이 먹은 사람을 친구로 생각해서 절대로 해치지 않았다. 단 그 음식이 배설되기 전까지만! 왜냐하면 먹다 남은 그 음식에 마술사가 저주를 걸면 그 음식을 먹은 사람은 똑같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공동운명체라고나 할까.

태국 노동자 오라눗.
유난히 주근깨가 많고 눈물이 많았던 여성이다. 작년 8월 그녀는 출국 만기 4개월 전에 해고당했다. 임금 일부는 받지도 못한 채. 당시 법으로는 마지막 회사에서 6개월 이상을 근무해야 재입국할 수 있었으므로 그녀는 재입국할 수도 없었고, 4개월밖에 안 남은 노동자를 고용할 회사도 없었으므로 태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4개월밖에 안 남은 노동자를 해고하다니! 참으로 잔인한 짓이었고,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게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나는 그녀를 대신해서 임금 체불에 관한 소송을 진행했다. 재판은 지지부진하여 12개월이나 끌었으나 다행히 승소하여 나머지 임금 76만 6890원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돈은 오라눗의 통장으로 입금되었는데 찾을 방법이 없었다. 오라눗이 센터에 맡기고 간 현금카드는 유효기간이 지나서 사용이 불가능했으니까.

돈을 찾는 유일한 길은 태국 시골에 사는 오라눗이 방콕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찾아가서 은행 업무에 관한 모든 사항을 나에게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쓰고 그것을 대사관 직원이 한국어로 번역하고 공증해서 농협중앙회 발안지점으로 보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사실 말이 쉽지, 실제로는 무척 어려운 절차다. 한국 사람인 나도 머리가 딱딱 아픈데 이걸 어떻게 태국 사람에게 설명한단 말인가? 또 설명한다고 알아들어?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면 오라눗이 돈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그것은 농협 직원들과 우리 센터 직원들이 매일 점심시간에 발안시장 안에 있는 <만호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친구가 아닌가? 밥친구! 만일 만호식당 밥에 마술사가 저주를 건다면 농협 직원이나 우리 직원이나 똑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 그걸 믿고 나는 농협 외환담당 K과장을 찾아가서 선처를 부탁했다.

"저 알죠? 왜 밥 같이 먹잖아요."
"예. 외국인센터 목사님."
"이 현금카드를 살릴 방법이 없나요?"
"사실은 없어요. 본인이 직접 오는 수밖에."
"앓느니 죽죠. 찾을 돈보다 한국 왔다 갔다 하는 비행기값이 더 들겠네! 그러지 말고 오라눗 본인이 저에게 써준 위임장이 있으니 저를 믿고 카드를 살려주세요."

그녀는 한참 생각하더니 사고가 나면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각서를 받고 현금카드를 부활시켜 주었다.

만일 그녀가 안된다고 하면
"같이 밥 먹는 처지에 이럴 수 있어?"
라고 막가보려고 했지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즉시 현금카드로 77만원을 찾아 달러로 환전한 후 오라눗에게 591달러를 송금했다.
같이 밥 먹는 사이! 역시 대단한 사이다.

*후기 : 오라눗의 돈을 찾게 해준 농협 K과장은 근본적으로 외국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K과장은 이런 사연을 들려주었다.

"이모부님이 중동에 노무자로 가셔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선지 친정 엄마가 형부(이모부) 생각을 해서 식당을 하실 때 굶는 외국인들에게는 밥을 거저 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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