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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하기 위해 십수개 직장들을 전전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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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래를 하기 위해 십수개 직장들을 전전했던 듯"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9/26] 소리꾼 장사익씨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추석 연휴 마지막인 오늘, 귀경길 차 안에서 이 방송 들으시는 분들 많을텐데요 한국적인 혼과 한을 담아 구성진 목소리로 노래하는 우리시대 대표적인 소리꾼 장사익씨가 최근 슬프면서도 신명 나는 우리가락으로 러시아 청중들을 감동시키고 돌아왔습니다. 지난 8월 말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러 교류축제가 바로 그 무대였는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장사익씨를 초대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공연 얘기와 장사익씨의 음악 인생과 우리 노래의 매력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소리꾼 장사익씨입니다.

장사익씨는 1949년 충남 광천 출생으로 1980년 국악에 입문해 1993년 국악인 김용배 추모공연을 기획하고 태평소를 연주했고 그 다음해 장사익 소리판 하늘가는 길을 초연하면서 소리꾼으로 정식 데뷔했습니다. 1996년에는 타이빼이 난잉 국제민속축제에서 금산농악 태평소를 연주했고 로열심포니오케스트라를 비롯해 헝가리국립오케스트라, 그리고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 등과 함께 협연을 했습니다. 또, 전주 대사습놀이 공주 농악 장원을 비롯해 KBS 국악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고 하늘가는 길, 기침, 허허바다, 꿈꾸는 세상, 사람이 그리워서 5개의 앨범을 통해.. 이 시대 우리의 삶을 노래하는 대표적인 소리꾼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중국, 러시아 공연 갔다 오신 게 8월 말이었죠?

장사익 : 예. 그랬습니다.

박인규 : 러시아 공연은 어떤 공연이었습니까?

장사익 : 한국과 러시아의 친선을 도모하는 음악회였거든요. 그래서 국립국악관련악단, 국앆단과 같이 황병기 선생님, 안숙선 선생님과 같이 협연하는 무대였습니다. 그래서 모스크바, 떼쩨부르크에서 같이 공연했습니다.

박인규 : 황병기 선생님, 안숙선씨, 말하자면 우리 시대 대표적인 국악인들과 같이 가신 거군요. 이번 공연에선 어떤 노래들 부르셨어요?

장사익 : 저는 늘 찔레꽃이라는 노래하고, 아마 아버지란 노랜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국밥집에서'라는 노래, 이렇게 불렀습니다.

박인규 : 찔레꽃은 뭐 장사익씨의 대표적인 곡으로 알려져 있고 국밥집에서는 누군가의 시인 것 같은데요

▲ ⓒ프레시안

장사익 :
네. 그 노래는 제가 초창기 때 국악판에 좀 몰려다닐 때 제 후배가 하는 음식점 벽에 어떤 시인이 연필로 써놓은 시를 보고 참 좋다고 생각하고 그 이튿날 찾아갔더니 쓰레기통에 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시를 찾아가지고 노래를 하게 됐죠.

박인규 : 소리꾼 장사익씨가 러시아 가서 공연하신 건 이번이 처음인가요?

장사익 : 예. 처음입니다.

박인규 : 현지 사람들 반응이 어떻던가요?

장사익 : 글쎄요. 모스크바 쪽에서는 좀 싱숭생숭한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생 떼쩨부르크 그쪽에 갔더니 거기는 정말 유럽의 관문이고 문화의 도시라고 익히 들어왔거든요. 그런데 거긴 한 1700석 정도 되는 오래된 극장에 전부 다 정장을 입고 과서 한 100%가 전부 다 러시아 사람이죠. 물론 틈틈이 고려인도 계셨는데 예를 들어 우리 교포라든가 동포들은 좀 가사를 알아듣고 흥미롭게 듣는데 이 분들은 음악으로 들어요. 그래서 그렇게 열성적으로 열광하면서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데 아주 문화적인 그런 걸, 깜짝 놀랐습니다.

박인규 : 어떤 장사익씨의 내공에 감탄했나보죠?

장사익 : 저는 그냥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그냥 하는데 여하튼 따뜻한 그걸 느꼈어요. 어디서 보지 못했던

박인규 : 러시아 가기 전에는 중국에서도 공연하셨죠?

장사익 : 예. 중국 인민대장이라고 거기 로비에서 공연했습니다. 하고 바로 그 이튿날 갔었죠.

박인규 : 러시아 가선 고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장사익 : 예. 아주 바로 그 이튿날 가서 공연을 했으니까 시차도 그렇고 비행기를 한 10시간 이상 타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노래라는 건 늘 즐겁게 해야 되기 때문에 기분 좋게 즐겁게 했습니다.

박인규 : 중국의 인민대회장이란 데가 우리로 치면 국회의사당인데 아무나 못 들어가더라고요.
사실은 제가 장사익씨가 노래를 굉장히 잘 하신다는 얘길 들었는데 한 번도 못 들었어요.
이번에 제가 인민대회당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장사익씨 노래 듣고 나서 본전 뽑았다, 말씀도 하시고. 이번 행사가 국정홍보처 주최였는데 김창호 처장이 자신이 장사익씨를 꼭 모시기로 했노라고 막 자랑을 하시더라고요.

장사익 : 그러세요? 그때 저도 노래를 아주 힘껏 불렀습니다. 중국이란 나라가 땅덩어리도 크고 마음도 자기들 나름대로 크다고 생각하는 동네거든요. 그래서 우리 한국이란 나라의 매운맛도 있다 하는 식으로 제가 좀 오버하면서 아주 힘껏 좀 불렀습니다.

박인규 : 그때 제 기억으로는 앵콜곡으로 동백아가씨를 부르신 걸로 기억하는데요

장사익 : 예. 그렇습니다.

박인규 : 저는 장사익의 동백아가씨를 들으면서 야 동백아가씨를 이렇게 부를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해외공연을 자주 다니시는 모양이에요.

장사익 : 예. 1년에 한 두세 번은 갑니다. 금년엔 조금 딴 해보다 조금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박인규 : 6월에도 미국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장사익 : 예. 6월에는 제가 좀 그동안 꿈꿔왔던 미국 공연을 그냥 협연으로만 4,5년 동안 해왔거든요.

박인규 : 독무대가 아니고 여러 코너 중 한 코너로

장사익 : 예. 그래서 언젠간 제대로 된 공연을 한 번 보여드려야 되지 않겠는가 해서 우리 음악하는 친구들 한 15명, 또 스탭들... 음향이나 무대 이런 친구들 다 해서 한 25명이 미국에서 한 4개 도시에서 한 달 동안 먹고 자고 하면서 아주 큰 공연장에서 신명나게 놀다 왔습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장사익씨 혼자서만 쭉 노래를 부르는, 어디어디 다녀오셨어요?

장사익 : 그렇죠. 뉴욕하고 시카고, 워싱턴, LA 이렇게 다녀왔습니다.

박인규 : 다 대도시기도 하고 한국 교민들도 많은 덴데, 한국 교민들도 많이 오셨겠네요.

장사익 : 네. 아무래도 한 90% 정도가 동포들이시고 10% 정도가 외국 사람들이었습니다.

박인규 : 그런데 혼자서 이른바 리사이틀을 하시려면 굉장히 힘드셨을 것 같은데

장사익 : 힘들죠. 힘들지만, 일주일씩 제가 그래서 텀을 뒀어요. 그래서 그동안 이동하면서 체력도 좀 기르고 마음도 가다듬으면서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박인규 : 한국 교민들이야 물론 좋아하셨을 테고, 혹시 미국 언론들도 와서 반응을 좀 보이던가요?

장사익 : 예. 그 분들이 제 목소리를 듣고 우리들 음악을 보고 처음 듣는 음악이거든요. 물론 한국의 전통음악은 아마 접했을지 모르지만 현대 대중음악을 처음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뉴욕에 있는 극장 매니저는 첫 번엔 하대를 했습니다 우리를. 우리 막 준비하는데 오버차지도 한 7500불, 750만원 정도 우리한테 더 물고 그래서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딱 공연 끝나고 났더니 지가가 한 30년 동안 극장 관련 일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전율을 느낀 감동은 처음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제 포스터에 사인을 해주시면 영구히 붙여 주겠다는 얘길 하고 오버차지도 안 받겠노라고. 그래서 포스터는 네 군데, 세 군데에서 그런 제의가 들어와서 제가 사인을 해서 다 갖다줬습니다.

박인규 : 극장 매니저가 전율을 느꼈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러시아 공연 끝났고 올해는 해외공연 또 없으십니까?

장사익 : 10월에 이란에 공연을 갑니다. 작년에도 갔는데 반응이 좋아서 이란 대사관, 우리 한국 대사관하고 이란의 야외공연장에서 옛날 팔레비 국왕이 이렇게 했던 국왕 왕궁이 있습니다. 야외에서 한 2, 3천명 놓고 공연하는 게 있고. 또 11월에는 일본 고베에서 단독 공연을 하게 돼 있습니다.

박인규 : 굉장히 바쁘시군요.

장사익 : 조금 그렇습니다.

박인규 : 이란 같은 나라는 사실 핵문제 가지고 미국과도 굉장히 대립하고 있는 나라고, 서방에 대해서 굉장히 안 좋은... 그런 생각이 나는데 한국 음악에 대해서 호감을 좀 보이던가요?

장사익 : 그렇죠. 우리가 서방 쪽의 시각으로 볼 적에는 좀 안 좋은 시각들이 많은데 실제로 제가 가봤을 때는 60%가 다 우리나라 프라이드 차입니다. 그리고 가전제품의 100%가 다 우리나라 제품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자존심을 느꼈어요. 자긍심을 느끼고. 그래서 그 이란 사람들이 우리 한국 사람을 볼 적에 옛날 우리가 미국이나 선진국들 보는 그런 눈초리로 우릴 보고 있어요. 그래서 무역도 많고. 그래서 그쪽 나라에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 장사만 많이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자꾸 문화적인 걸 홍보하면서 그래야 되지 않겠나 해서 작년에 이어서 금년에 두 번째로. 외국 공연단이 이란에 온 건 거의 처음이라고 제가 들었었거든요.

박인규 : 제가 듣기로는 우리나라의 이란 수출액이 네 번째인가 그렇다고 굉장히 많다던데, 경제적 진출이 아니라 장사익씨 같이 우리나라 문화를 알리는, 말하자면 한국 홍보대사가 되셨군요.

장사익 : 아마 그런 격이 될 것 같습니다.

박인규 : 아니 그런데 중국, 러시아, 미국, 이란 이렇게 외국만 다니시면 국내 팬들은 언제 만나십니까?

장사익 : 국내는 그 틈틈이 10월부터 12월까지 한 12군데를 전국을 다니면서 단독 공연을 다 계획돼 있습니다.

박인규 : 두 달 동안 12군데면 그것도 웬만한 체력이면 힘들 것 같은데요

장사익 : 예. 아주 열심히 하죠.

박인규 : 서울에선 안 하십니까?

장사익 : 서울에선 제가 2년에 한 번씩 합니다. 그래서 제가 세종문화회관에서 6번을 했거든요.

박인규 : 올해는 안 하는 해입니까?

장사익 : 예. 올해는 안 하고, 작년에 했으니까 내년 11월에 계획돼 있습니다.

박인규 : 그렇습니까? 저는 이번에 인민대회당에서 보고 장사익씨 공연 한 번 가봐야겠다 생각했는데 내년까지 기다려야겠네요. 여기서 잠깐 장사익씨가 부른 동백아가씨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사익씨가 부른 동백아가씨는 이미자씨가 부른 이른바 오리지널하고는 상당히 다르네요. 제가 듣기로는 노래를 하시면서 반주나 이런 것들을 스스로 편곡이라고 합니까 스스로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 ⓒ프레시안

장사익 :
예. 제가 제 의도대로, 생각을 해서 예를 들어 기타 치는 친구들, 피아노 치는 친구들한테 알아서 하고 여기선 이렇게 좀 해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여긴 해금이 좀 들어왔으면 좋겠다, 여기는 북이 좀 강조됐으면 좋겠다 해서, 그 친구들은 일당백을 하는 친구들이거든요. 그래서 맡겨 놓으면 자기 기량의 한 100%, 200%를 할 수 가 있는, 편곡은 정해주면 그것만 치거든요.

박인규 : 곡을 만들어서 보여주시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시면서 이거 쳐봐라, 이렇게 하면서 그런게 역곡을... 만들어 가시는군요?

장사익 : 그렇습니다.

박인규 : 외국 공연은 원래 오래 전부터 다니셨습니까?

장사익 : 예, 몇 년 됐습니다. 제가 초창기때부터 사물놀이 쫓아다니면서 일본 같은 데는 많이 다녔어요. 태평소 불면서. 가끔 노래도 좀 부르고

박인규 : 소리꾼 하시기 전에 태평소 하셨죠. 외국을 많이 다니셨다니까 외국에 가서 외국 민요도 많이 들어보셨을 테고 외국에 가서 우리 소리에 대한 외국인들의 반응을 보시면서 우리 소리의 강점이랄까 특징이랄까, 말로는 어렵겠지만...

장사익 : 제가 이번에 가장 비근한 예로, 6월 공연 가기 전에 5월달에 마침 우연하게 애틀란타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애틀란타에서 재즈 공연하는 흑인들과 같이 공연하게 됐었는데, 아주 애틀란타에서 유명한 재즈뮤지션들이라고... 한 5명 정도 되는데 그 친구들이 공연하고 나서 제가 제 노래를 블렀어요. 그랬더니 공연이 끝나고 나서 그 친구들이 저랑 같이 사진을 한 번 찍자고 사회자가 그렇게 왔어요. 그러면서 당신 노래가 블루스 같다. 블루스라는 건 흑인들의 애환이거든요. 속에 있던 노래를 부르는, 마치 옛날 우리나라의 판소리라든가 이런 것이 전부 다 그런 애환들이 많이 들어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느끼는 감정들이, 제가 찔레꽃을 부르는데 그 사람들은 블루스로, 이렇게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슬픔을 제가 얘기했을 적에 그 친구들 슬픔을 안다는 것이죠.

제가 빨간 걸 노래했을 때 그 사람들은 불그스름하게 와닿고, 또 노랗게 노래했을 때는 누르스름하게, 그러면서 자기들이 느끼지 못했던. 그러니까 제가 이번에 미국 가면서 말씀드렸던 것이 된장을 어깨에 한 번 짊어지고 간다는 마음으로 갔거든요. 된장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장 가까이 하면서도 약간 좀 하대하는 음식이잖아요. 그렇지만 몸을 평정시키고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냄새거든요 음식이고. 거기다가,외국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어떤 톡 쏘고 맵고 그것이 바로 액센트가 아닌가. 우리나라 지형을 보면 산들이, 서울도 보면 산들이 삐죽삐죽 많잖아요. 바로 그런 데서 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을 것, 그걸 제가 선보였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제 음악, 한국의 음악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감동하고 전율하는 것이 아닌가....

박인규 : 말은 통하지 않지만 음만으로도 통할 수 있는

장사익 : 그렇죠. 느낌은 다 가죠.

박인규 : 러시아는 어떻습니까?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러시아의 백학이라든가 이런 노래를 들으면 참 울린다는 느낌이 드는데 러시아에선 어떤 경험을 하셨어요?

장사익 : 아무래도 러시아의 음악들은 그쪽 음악은 좀 음울하고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 대중음악들은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취향이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가서 노래를 했는데 역시 그 사람들도 자기들이 갖고 있지 않은 액센트 같은 것, 톡 쏘고 하는 그런 노래를 듣고 똑같은 느낌들을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음악이라는 건 모든 걸 다 느끼고 통하는구나, 소통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인규 : 대부분 아시는 분들은 아시지만 장사익씨 하면 늦깎이 음악시인이다 해서 젊었을 때 고생을 무지하게 하시고

장사익 : 무지하게는 안 했어요.

박인규 : 45살 때 소리꾼으로 데뷔했다고 알고 있는데 오늘 제가 이렇게 약력을 소개하다 보니까 이미 국악 쪽에 입문하신 건 이것도 빠른 건 아닙니다만 서른 살 초반에 입문하셨다고 돼 있어요. 국악에 원래 관심이 많으셨나요?

장사익 :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아버님이 고향에서 장구를 잘 치셨어요. 그 리듬이나 음악을 어려서부터 몸에 담고 있다가 특히 거기서 우리 동환이 아버지라고 아저씨가 태평소를 참 잘 부셨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황혼이 지면 그 아저씨가 늘 태평소를 연습하고 부셨어요. 그 소리가 참 애잔하고 흥겨워서 유난히 우리 친구들이 많은데 저만 그 아저씨 옆에서 늘 그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박인규 : 아버님이 전문 예인은 아니셨나보죠?

장사익 : 전문 예인은 아니시고 때가 되면 명절이나 큰 행사가 있을 땐 장구를 치셨죠.

박인규 : 제가 왜 그 얘기를 여쭤봤냐면, 저희가 김덕수씨를 국악인생 50년이라서 모셨는데 그 분은 남사당패니까 6살 때부텨 하셨다더라구요.
그 뒤의 인생을 보시면 상고를 나오셔서 은행을 다니셨다고 하던데

장사익 : 네. 보험회사 다니고 한 15, 16개 왔다갔다 했습니다.

박인규 : 그러다가 80년대에 국악에 입문했다는 건 그때부터 말하자면

장사익 : 아마추어로

박인규 : 뭘 배우신 겁니까?

장사익 : 제가 태평소라는 아까 말씀드리다 말았는데 그 소리를 꼭 언젠가는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죠. 객지생활 하면서 직장생활 하면서, 그러다가 우연히 한소리라는 국악동아리가 있습니다. 거기 가서 그걸 배우게 돼서 단소를 한 1년간 배우고 피리를 한 5년간 배우고 거기서 나중에 한 6년 이후에 태평소라는 악기를 3개월 배우고

박인규 : 소리꾼이 되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하신 거군요?

장사익 : 글쎄요, 운명적으로 제가 노래를 하기위해서 그렇게 한 게 아니라...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런 모든 것이 제가 노래를 하기 위해서 벽돌을 하나씩 하나씩 쌓아온 게 아닌가

박인규 : 그런데 사실 장사익씨가 이른바 전문 국악인으로 이름을 알린 건 태평소였죠.

장사익 : 전문도 아니고 저는 그냥 곁다리로 한 것인데 하여튼 태평소로 본격적으로 나서긴 했죠.

▲ ⓒ프레시안

박인규 :
상도 받으셨다고

장사익 : 넘들이 상 받을 때 줄 선 거죠 뭐, 그렇게 큰 것은 아닙니다.

박인규 : 한때 유명했던, 가수 서태지가 부른 하여가의 태평소도 장사익씨가 부신 거라고

장사익 : 예. 그건 녹음은 김덕수씨가 했고 라이브에선 제가 했습니다.

박인규 : 레코드판에 있는 건 김덕수씨 태평소고 라이브 때

장사익 : 예. 제가 그때 카센터에 근무하고 있을 땐데 그 매니저가 놀러 와서 카센터에 차를 맡기면서 그 얘길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불고 내 팀들이 있다고 해서 하게 됐어요.

박인규 : 말하자면 90년대 초까지는 태평소 연주자셨는데 94년도에 소리꾼이 되셨단 말이에요. 어떻게 하다가 소리꾼이 되신 거예요?

장사익 : 제가 92년까지 직장생활... 그러니까 마지막이 카센터 매제가 하는 데서 어서옵쇼 하고 차 파킹해주고 하다가 이건 아니다 생각을 하고, 93년부터 제가 하고 싶을 일을 해보자, 그래서 몇 가지를 놓고 했는데 넘들이 관심을 별로 두지 않았던 태평소라는 악기를 한 3년만 열심히 하면 밥은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별로 욕심도 없는 생각이죠. 그걸 열심히 불다 보니 아까 같은 친구들이 상을 받을 때 저도 같이 덩달아 받고. 꼭 뒷풀이에서는 막걸리 한 잔 하면서 한 판 벌어집니다. 제가 그래서 춤도 추고, 옛날에 음악도 배웠고 해서 늘 노래를 했죠. 하다가 94년도 여름에 임동창이라는 친구를 만나서

박인규 : 약간 기인 같으신

장사익 : 예. 피아노 치는, 그래서 아 형님 노래 한 번 하시죠. 싫다 그랬더니 저를 밤새 설득해서 94년도 11월에 제가 신촌에 있는 예극장이란 조그만 극장에서 그냥 객기 하나로 한 번 딱 해본다는 마음으로 했는데 이틀 했어요. 그런데 그게 오늘까지 온 거죠.

박인규 : 그 당시 반응이 좋았나보죠?

장사익 : 예. 한 100명 앉을 수 있는 극장인데 이틀에... 하루에 400명씩 800명이 오셨어요. 그래서 아주 폭발적으로.. 하여튼 저도 의외고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깜짝 놀라고 그게 이렇게

박인규 : 94년 첫 공연부터 지금까지, 말하자면 전문 소리꾼이 되신 거군요.

장사익 : 그렇죠.

박인규 : 노래 하시는 걸 들어보니까... 판소리 하시는 분들은 득음하신다고 폭포 밑에서 피를 토할 때까지 하시고 그러는데 상당히 그런 정도로 그 전에 수련을 쌓으셨다는 느낌이 드는데 어떻게 그런 목소리가 나오세요?

장사익 : 저는 일단 술, 담배를 않고요.

박인규 : 원래 안 하세요?

장사익 : 예.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렸을 적에 고향 살 적에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웅변을 했어요. 중학교 3학년까지, 뒷동산에서 5년 동안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발성연습을 하고 소리를 텄죠. 그것이 제가 음악은 영 빵점이었는데 이것이 시간이 가다 보니 목이 트이다 보니까 노래 같은 건 곧잘 하고 자연적으로

박인규 : 어떻게 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다 이렇게 준비를 하신 거군요.

장사익 : 글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태어난 이유가 아마 노래를 하라고 한 것이 아닌가. 직장도 한 열댓 개 옮기고, 물론 제가 성격이 좀 충청도 말로 자발없죠. 차분하지 못하고. 아마 꿈이 많았던 것 같은 생각도 들고 제가 노래를 하기 위해서 직장들을 전전하지 않았던가 생각이 들어요.

박인규 : 그런 직장을 전전하셨던 경험도 노래를 부르시는 데 도움이 되나요?

장사익 : 그렇죠. 아무래도 제가 어렸을 때 막연하게 고등학교 졸업하고서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는데 이 길을 마다하고 에둘러 왔거든요. 그래서 이런 에둘러 왔던 길들이 노래를 하기 위한 토양이 되지 않았는가

박인규 : 40대 중반까지의 경험들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장사익 : 그렇죠. 엄청나게 소중하죠.

박인규 : 장사익씨께서는 노래를 만드실 때 직접 댁에서 작곡하시는 걸로 아는데 가사는 어떻게...

장사익 : 저도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발전하기 위해선 노랫말이 좋아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한 번에 들어서 좋은 것보다도 몇 변 들어서... 좋은 음식도... 몇 번 들어서 그 맛을 알고 했을 때 그냥 진정한 맛을 볼 수가 있거든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노랫말이 좋다보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오래 갈 수 있거든요. 클래식 같이 유행을 타지 않고. 그래서 저도 좀 시인들처럼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 분들처럼 세상을 보는, 또 자연을 보는 관조나 깊고 넓은 세상이 없기 때문에 제가 생각하는 시를 보면 마치 제 시가 되거든요. 저는 하늘을 늘 어렸을 때 노을을 봤는데 노을이 빨간데 어떤 시인이 빨갛게 노래했단 말이죠. 그럼 그 시가 제 시가 되는 거죠. 그래서 그 시를 차용해서 노래하게 되죠.

박인규 : 직접 시는 못 쓰시지만 좋은 시를 많이 찾으시는군요.

장사익 : 그게 30% 제 작업입니다.

박인규 : 노래를 만드실 때는 직접 불러보시고 같이 해가면서 엮어가는 과정. 한 곡 만드시려면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리시겠어요.

장사익 : 그렇죠. 1년이 될 수가 있고 3년이 될 수가 있고.

박인규 : 이제는 아주 전국에서 알아주는 소리꾼이 되셨고 40대까지의 고생에 비하면 생활이 달라지셨는데 지금 생활에 만족하십니까?

▲ ⓒ프레시안

장사익 :
그렇죠. 밥먹고 등 따숩고 대우도 받고 하니까 더 이상 바랄 것 없고 그렇죠.

박인규 : 아드님도 국악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장사익 : 예. 걔도 공부를 별로 못해서 제가 옛날에 대금을 좀 했기 때문에 그래서 둘을 그냥 시켰더니 잘 적응해서 학교 다 나오고 직장생활 다 하고 있습니다. 악단에서.

박인규 : 현재 활동을 하고 있습니까?

장사익 : 예. 큰 놈은 저랑 러시아에서 같이 공연도 했고 작은애는 영동에서 난개국악단이라고 거기서

박인규 : 아드님 중에 아버지처럼 나도 소리를 좀 하겠다,이런 건 없습니까?

장사익 : 그런 건 없어요.

박인규 : 예전에는 유행가라고 했고 요즘엔 대중가요라고 하는데 요즘 나이 드신 분이 듣기에는 굉장히 랩이라든가 여러 가지 다르잖아요. 댄스 가수도 많고. 이른바 주류의 대중가요에 대해선 어떤 느낌을 갖고 계세요?

장사익 : 글쎄 좀 뭔가 대중음악이라는 것은 대중들을 정말 즐겁게 하고 슬플 땐 슬프게 하고 감성을 건드려서 세상 살아가는 맛을 알게, 즐겁게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너무 즐겁게만 하거든요. 그래서 좀 깊고 넓은 인생의 그런 면들이 있어야 되지 않나

박인규 : 아프고 슬픈 면도 건드려 주고.

장사익 : 그렇죠.

박인규 : 계속 노래를 만들고 계시지만 혹시, 이제 앞으로도 상당히 몇십 년 활동하셔야 될 것 같은데, 앞으로 특별히 하고 싶은 공연 같은 게 있습니까?

장사익 : 글쎄요. 세월이 가면서 힘도 많이 딸리고 그러는데 저는 노래라는 건 인생의 기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레코드라고 옛날에 LP판이라고, 얘기들 하는데 제가 40대부터 50대 후반까지 여태까지 노래를 했어요. 제 인생을 노래한 거죠. 앞으로는 60대, 70대, 80대, 그 시간들을 아주 신기하게 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노래할 것인가

박인규 : 그 나이에 맞는 노래를 하신다는 말씀인가요

장사익 : 예. 꿈을 꾸고 있습니다.

박인규 : 장사익씨의 노래는 장사익류라고 할 정도로 굉장히 독특한 창법이나 노래 만드시는 거나, 그런데 혹시 그런 것들을 좀 배우겠다는 후배들을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장사익 : 저도 배우는 입장이라 아직 그런 계제도 안 되고

박인규 : 그래도 혹시 장사익 선생님 밑에서 소리를 배우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장사익 : 없어요.

박인규 : 아직 없습니까?

장사익 : 좀 시대에 떨어지는 모양이에요.

박인규 : 그게 아마 공력을 쌓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장사익 : 노래라는 것은 나이가 들어야 노랠 할 수가 있어요.

박인규 : 그런 여러 가지 쓴맛 단맛을 봐야 제대로 된 노래를 할 수가 있다. 저희가 마지막으로 장사익씨 노래 중 하나를 들을 텐데, 찔레꽃은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황혼길이라는 노래를 들어볼까 하는데, 이 황혼길이란 노래가 어떤 건지 소개를 좀 해주시죠.

장사익 : 이 노래를 제가 만들기 전에 제 어머님 돌아가셨을 적에 한 5년 됐는데 영전에서 제가 노래를 불렀어요. 우리나라 시의 최고봉이신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인데 마치 죽으러 가는 것을 시집간 딸네 집에 놀러 간다는 그런 가사, 아주 기막힌 가사들이 구구절절 있더라구요. 그래서 야 이 노래를 언제 한 번 불러봐야겠다. 마치 하나의 레퀴엠, 장송곡일 수도 있고 제 나름대로 불러 봤는데 사람들은 아직 궈에 안 닿는 모양이에요.

박인규 : 시집간 딸네 집에 가듯이 말하자면 돌아가시는

장사익 : 예. 그래서 명절 때가 되고 하니까 어머니 생각도 나고 그래서 이 노래를

박인규 : 그러면 우리 시대 대표적인 소리꾼 장사익씨가 만든 노래 황혼길을 들으면서 오늘 순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장사익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우리시대 소리꾼 장사익씨를 초대해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공연 얘기와 장사익씨의 음악 인생과 우리 노래의 매력에 대해 얘기 나눴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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