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동맹국으로서 미국의 세계 군사전략 변화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한다. 전략적 유연성의 이행에 있어서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한국과 미국이 한미동맹의 협상사안 중 최대 이슈였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기로 합의해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19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한미간 첫 장관급 전략대화를 가진 뒤 공동성명을 발표해 이같은 합의내용을 밝혔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20일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논의는 '일단락'되었다"고 말해 이번 공동성명이 이 문제에 관한 사실상의 최종 합의임을 확인했다.
***정부 "법적·조약적 성격보다 정책적·정치적 성격"**
전략대화에 참석했던 김숙 외교부 북미국장은 20DLF "앞으로 특정 상황이 발생하면 한미동맹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정신에 입각해 한미 양국이 충분한 대화를 거쳐 상황별로 신속하고 긴밀하게 대처해 나갈 것"이라면서도 주한미군이 북한·대만 등 분쟁예상 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김 국장은 "향후 분쟁상황이 국지적이고 세부적일 경우 군사적 상황으로 판단할 수 있겠지만 비중과 범위가 큰 상황일 경우는 군사적 성격 외에 외교안보적 성격도 포함될 것"이라며 탄력적 대응을 강조했다.
그는 '중국과 북한 등의 반발이 예상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북아지역 분쟁에 개입되지 않을 것이라는 원칙에 합의한 사실을 감안하면 주변국들에게 추가적인 불안요소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 국민들에게도 동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문제를 조약 형식이 아니라 장관급 전략대화의 공동성명 형식으로 발표한 데 대해 "이 문제는 법적이고 조약적 성격이라기보다 정책적이고 정치적 성격이 강한 것"이라며 "기속력을 갖는 조약 형식을 취할 경우 전략적 유연성의 제도화라는 틀 속에 갇힐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입장 고려해 균형 맞춘 것"**
'전략적 유연성'이란 세계 어느 곳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주한미군을 포함해 전세계에 주둔 중인 미군이 특정 지역에 얽매이는 '붙박이' 군대가 아니라 기동성과 신속성을 갖춘 기동타격대 성격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개념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강력히 추진 중인 군사전략인 이 개념에 대해 한미 양국은 그간 한미안보협의회(SCM) 등의 회의에서 "전략적 유연성이 지속적으로 중요함을 재확인한다"(2005년 10월 21일 제37차 SCM)는 식으로만 언급하며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주한미군이 다른 분쟁지역으로 빠질 경우 대북(對北) 안보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보수적 여론도 있었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규정하고 있는 미군의 한반도 주둔 목적에 어긋난다는 점 ▲한국이 미국의 군사 전략을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된다는 점 ▲미군의 잠재적인 타깃이 되고 있는 중국·북한 등의 반발로 동북아 안보가 불안정해진다는 점 ▲한미연합전력구조 하에 있는 한국군도 전력 '투사'의 대상이 된다는 점 등에서 우리 시민사회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공동선언에서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주한미군을 동북아 분쟁지역에 파견하려 할 경우 어떤 기준과 판단으로, 어떤 협의 채널을 통해 결정할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구체적으로 합의하지 않아 논란의 소지만 키웠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그러나 "그동안 '전략적 유연성의 중요성 확인' 같은 말만 들어갔었는데 이번에는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문구가 들어가 균형을 맞췄다"며 공동성명의 의의를 강조했다.
이 당국자는 이어 "'특정 상황', 즉 주한미군을 뺄 수 있는 상황이 무엇이냐는 궁금증이 있을 텐데 개연성이 극히 낮은 특정 상황에 대해 구체화시킬 필요도, 실익도 없다"면서 "설사 그런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말에 따라 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주한미군 나가는 건 기정사실"**
그러나 그간 전략적 유연성의 문제점을 비판해 온 시민단체들은 이번 공동선언에 담긴 내용이 오히려 과거보다 후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민단체인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상임대표 홍근수 문규현)'의 유영재 미군문제 팀장은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말의 주어는 '한국', 즉 우리가 동북아 분쟁에 개입하는 일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으로 주한미군의 활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주한미군은 언제나 나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 팀장은 "이번 공동성명은 전략적 유연성을 전면 허용한 것으로 과거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라며 "그런 상황이라면 심지어 한국군의 개입도 배제할 수 없다"고도 말했다.
유 팀장이 언급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의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것"이고 "이는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원칙"이라는 지난해 3월 8일 공군사관학교 제53기 졸업 및 임관식에서의 말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해석 사실상 변경"**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이정희 변호사는 "과거에는 일종의 논의 수준이었는데 이번에는 양국 외무장관의 공동성명 형태로 합의가 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특히 '(공동성명은) 법적이고 조약적 성격이라기보다 정책적이고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는 김숙 외교부 북미국장의 말에 대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해석을 사실상 변경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반박했다.
이 변호사는 "주한미군이 어딘가에 투입돼야 할 상황이 되면 사전협의를 하기로 한 건데 과거 미일간에 유사한 합의가 있었어도 한번도 써먹은 적이 없다"며 "실효성이 있겠냐는 의문이 들고,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원칙을 인정한 상황에서 주한미군을 활용하겠다고 했을 때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이번 공동성명만 볼 때 한국군을 분쟁에 활용한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한편 유 팀장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한미 양국이 성공적인 공동의 노력을 통해 보여준 것과 같이 전세계에 개방되고 민주적인 제도와 인권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노력에 있어서의 협력과 조정'이라는 공동성명의 문구에도 전략적 유연성의 전면 허용에 버금가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는 지난해 경주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미동맹을 '가치동맹'으로 바꾸자는 합의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달리 말하면 이라크 침공 같은 미국의 일방적인 전쟁에 계속 협력하겠다는 것"이라며 "이는 한미동맹을 침략동맹으로 허용하자는 것"이라고 강력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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