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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소녀들이 고통을 몸에 '새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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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소녀들이 고통을 몸에 '새기는' 이유

[고통을 새기는 소녀들] ① 자해의 원인…가정·학업·학폭에 '여성'이라 겪는 성폭력까지

지민(17) 양의 왼팔은 일자로 그어진 흉터 자국이 '바코드'처럼 빽빽하다. 팔 안쪽엔 아직 살이 붙지 않았는지 파스가 붙어 있다. 상처가 심하면 병원에서 치료받고, 아물면 다시 긋기를 반복한다. 피가 너무 많이 흘러 응급실에 가기도, 폐쇄병동에 입원하기도 여러 차례지만 멈출 수 없다. 지민 양의 흉터를 처음 목격했을 때 크게 걱정하던 어머니는 이제 "또 했느냐"며 덤덤한 표정을 짓는다.

지민 양은 '성적 강박' 때문에 자해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매번 직전 시험보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특별히 좋은 성적을 강요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안의 장녀, 일가친척 가운데 첫째 손주·조카로 태어나 '어른들의 부푼 기대에 부응하는 멋진 아이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일찍 사로잡혔다. 학년이 오를수록 강박은 심해졌지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일상생활에서는 풀지 못했다. 지민 양은 중학교 2학년 끝자락 머리에 떠오른 대로 팔에 고통을 새겼다.

스트레스가 풀렸지만 잠시 뿐이었다. 여전한 성적 강박에 중학교 3학년 때 공황 증세가 찾아왔다. 처음엔 학교 밖을 나가면 진정됐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자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등 소음을 들을 때, 학교에 가려 버스를 탈 때도 공황을 겪었다.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불가능해진 지민 양은 자퇴 후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자해는 여전하다. 이유를 묻자 지민이는 이렇게 답했다.

세림(22) 씨는 지민 양보다 더 이른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자신의 팔을 괴롭혔다. 공부가 잘 안될 때면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머리를 때리는 정도로는 분이 안 풀리니 평소 가지고 다니던 칼에 손을 댔다. 일주일에 일곱 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고통을 새기던 세림 양은 정신과 진료와 흉터 치료를 병행한 최근에야 겨우 자해를 멈췄다.

학업 스트레스는 자해를 찾게 된 표면적인 이유였다. 근본적인 배경에는 '극도로 불안한 가정환경'이 있었다. 분노를 조절하기 어려워한 그의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딸에게 폭언을 일삼았다. 상의 없이 직장을 그만두더니, 사업을 하겠다며 섬으로 떠나 가족의 생계를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그나마 가정을 지키던 어머니도 남편의 폭력과 무책임함에 무너져 직장을 떠났다.

경제적·정서적 위기에 놓인 세림 씨가 스트레스를 풀 대상은 오직 자신 뿐이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자해를 시도하고, 피가 흐르면 안정감을 느꼈다. 상처가 너무 심해 중학교 2학년 때 응급실에 실려갔지만 멈추지 않았다. 고립된 세림 씨의 머리에 학창시절을 버틸 방법은 자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자해를 멈춘 지금도 과거 경험을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는다. "자해가 없었다면 내가 (죽어)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이유다.

괴로운 기억으로 가득 찬 한국을 떠나 일본 큐슈에 정착한 서비스직 종사자 지우(23) 씨도 자신의 자해를 "마지막의 마지막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지우는 죽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청소년 시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이렇게라도 안 하면 못 살겠다"는 자해 게시물을 보고 따라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나 자책이 몰려올 때면 죽음 대신 팔과 허벅지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지우 씨에게 자살과 자해 둘 중 하나를 고르게 만든 원인 중 하나는 '학교폭력'이었다. 지우 씨는 탈북 1세대인 조부모 손에 유아 시절을 보내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친구를 사귀려 반 아이들에게 "안녕 너는 이름이 뭐야?"라고 물었는데, 아이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다 6학년 언니들을 불렀다. 언니들은 지우가 조부모에게 체득한 북한 말투를 알아채고 "야 저XX 빨갱이잖아", "쟤 간첩인가봐" 소리 질렀다. '빨갱이' 소리를 들은 이후부터 6년 내내 따돌림 당했다. 길만 걸어 다녀도 돌에 맞았고, 심한 날엔 "죽여 버리겠다"며 칼로 위협하는 친구 앞에서 벌벌 떨고만 있어야 했다.

"빗자루가 부러질 때까지 맞는 일상이 반복됐다"는 지우 씨를 어떤 어른도 도와주지 않았다. 참다참다 담임 교사에게 말하니 "네가 뭘 잘 못했으니 괴롭히는 거 아니냐"는 타박을 들었다. 엄마도 "그러니까 북한 말투 고치라고 몇 번을 말했냐"고 질책했다. 지우는 지금도 "내가 괴롭고 자해밖에 할 수 없을 때 정말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른 한 명만이라도 있었다면 정말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프리픽(Freepik)

세림 씨와 지우 씨처럼 가정환경·교우관계는 여성 청소년들을 자해에 빠지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프레시안>이 만난 자해 경험 여성 (후기)청소년 16명 가운데 12명은 가정환경(가정폭력 포함), 11명은 교우관계(학교폭력 포함)에서의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다. 학업 스트레스의 경우 2명이 자해에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성폭력의 경우 16명 중 4명이 자해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성적 강박과 가정환경, 학교폭력처럼 '청소년'이 처한 위기만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라서 겪는 폭력을 겪었을 때, 폭력으로 인한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때에도 자해에 빠진 것이다.

서린(17) 양은 중학교 1학년 때 "집에 데려다 주겠다"더니 CCTV가 없는 구역으로 자신을 끌고 간 학교 선배에 의해 성폭력을 겪었다. 물증이 없는 데다 선배가 가해 사실을 부인하기까지 해 어떤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다. 의기양양한 선배는 도리어 "학교 아이들한테 성폭행을 소문냈다"며 서린 양을 명예훼손으로 신고했다. 사실이 아니기에 무혐의로 종결됐지만, 가해자 신분으로 조사받는 동안 서린 양의 마음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그해 서린 양을 덮친 재앙이 하나 더 있었다. 남자친구가 서린 양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잠적한 일이다. "너만의 잘못이 아니니 같이 해결해 나가면 좋겠다"고 호소했지만 답은 오지 않았다. 불행이 겹치자 서린 양은 "아무도 내가 겪은 문제를 신경 써 주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에 빠졌다. 지금은 기운을 차렸지만, 양팔엔 당시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 수 있는 흔적이 가득 남아 있다.

윤서(24) 씨도 중학교 2학년 때 성폭력을 겪었다. 가해자는 "왜 치마를 입고 왔냐. 네가 나를 꼬시려고 그런 것 아니냐"며 윤서 씨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윤서 씨는 충격에 빠진 채 "내 선택 때문에 성폭력을 당할 환경에 놓인 게 아닐까" 자책했다. 자책은 자해와 자살 시도, 환각·환청으로 이어졌다. 성인이 된 지금은 자책의 흔적을 타투로 가린 채 살아간다.

어른들은 자해하고 있거나 흉터를 가진 여성 청소년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곤 한다. '자해 대신 건전한 취미로 스트레스를 풀라'며 손쉽게 말하기도 한다. 윤서 씨는 "그런 어른들에게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린 친구들은 이미 지옥에 살고 있다. 자해는 죽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제발 살려 달라고 외치는 것"이라며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악마라도 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②편에서 계속)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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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혁

프레시안 박상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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