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이들에게 늘 미래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미래를 먼저 살아본 어른은 단 한 명도 없다.
부모도, 교사도, 전문가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과 로봇, 생명공학이 이끄는 세상은 우리가 경험해 온 과거와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습관처럼 말한다. "내가 살아보니 그렇더라", "내 말을 들으면 적어도 손해는 안 본다."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과거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래를 살아갈 사람에게 과연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물론 기초 지식을 전달하고 사회적 규칙을 알리는 기존 교육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敎)'만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것이 내가 교육(敎育)을 넘어 찬육(贊育)의 시대를 제안하는 이유다.
'찬육'은 코칭 철학을 정립하며 새롭게 만든 조어지만, 그 생각의 뿌리는 2천 년 전 고전 <중용(中庸)> 22장에 닿아 있다.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사람과 만물의 본성을 다하게 할 수 있다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다.)
여기서 贊은 '돕다(助)'라는 뜻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글자는 단순히 힘을 보태는 助와는 결이 다르다. 갑골문에서 贊은 두 손으로 귀한 것을 받쳐 올리는 모양에서 왔다고 전해진다. 즉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두 손으로 받쳐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다.
고전은 왜 '만든다'거나 '가르친다', 혹은 '바꾼다'고 하지 않고 하필 '돕는다'고 했을까?
<중용>은 먼저 자신의 성품을 다하고(盡其性), 타인의 성품을 다하게 하며(盡人之性), 나아가 만물의 성품을 다 펼치게 돕는 길을 제시한다. 그 끝에 비로소 '천지의 화육을 돕는 일(贊)'이 위치한다. 사람을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내재된 무한한 가능성이 스스로 꽃피우도록 곁에서 보좌하는 것. 이것이 찬육의 본질이다.
공교롭게도 이 통찰은 동양의 여러 고전에서 반복해서 등장한다. 노자는 최고의 리더십을 두고 "太上下知有之", 곧 백성이 다스리는 이가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 뿐인 상태라 했다. 가장 뛰어난 도움은 도움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 역시 도마복음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네 안에 있는 것을 꺼내면 그것이 너를 살릴 것이다." 밖에서 무언가를 채워 넣는 일이 아니라, 안에 이미 있는 것을 꺼내도록 돕는 일. 동서고금의 스승들이 결국 같은 산을 다른 길로 오르고 있었던 셈이다.
<설문해자>에 따르면 교육의 敎는 "위에서 베풀고 아래에서 본받는다(上所施下所效)"고 풀어낸다. 가르치는 이가 정답을 쥐고 있고 배우는 이는 이를 받아들이는 구조다. 전수할 지식과 정해진 경로가 명확했던 시절에는 이 방식이 매우 효율적이었다. 지도가 있을 때는, 지도를 잘 아는 사람을 따라가면 됐다.
하지만 지도 자체가 새로 그려지는 시대에는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교육의 질문은 이렇다. "내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따르게 할까?"
찬육의 질문은 다르다. "이 사람 안에서 무엇이 자라려 하는가?" "어떻게 해야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게 도울까?"
"어느 대학, 어느 직업을 가라"고 정답을 주입하는 대신, "너는 어떤 일을 할 때 몰입하니?" "그 선택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포기하겠니?"라고 물어야 한다. 정답을 전달하는 대신 '답을 만들어내는 힘'을 길러주는 것. 이것이 수동적인 수행자를 자기 삶의 저자로 바꾸는 동력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찬육은 가르침을 포기하거나 위험을 방관하는 방임이 아니다. 차도로 뛰어드는 아이는 먼저 단호하게 제지해야 하고, 필요한 지식과 규범은 명확히 가르쳐야 한다. 敎와 贊은 서로 대체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손을 바꿔 잡는 관계에 가깝다. 위험 앞에서는 敎의 손을, 가능성 앞에서는 贊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르쳐야 할 것'과 '스스로 발견하게 도울 것'을 구별하는 안목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찬육은 敎보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아이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보다 훨씬 깊은 관찰과 기다림, 그리고 정교한 질문을 요구한다. 답을 주는 것은 순간이지만, 답을 스스로 찾도록 곁에서 기다리는 것은 인내다. 어쩌면 찬육이 지금까지 널리 퍼지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더 게으른 길이 아니라, 더 어려운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처럼 찬육을 실천하는 이들을 '찬사(贊師)'라 부르고 싶다. 찬사는 교사뿐만 아니라 부모, 코치, 상담자, 기업의 리더 모두가 될 수 있다. 상대에게 자신의 답을 이식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 안의 가능성이 자기 방식으로 피어나도록 돕고, 마침내 이루어낸 변화의 공로마저 그 사람 자신에게 돌려주는 사람이다.
교육을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지난날 교육이 해온 소중한 유산 위에 한 걸음 더 나아가자는 제안이다.
정답에서 질문으로. 통제에서 신뢰로. 가르침에서 동행으로.
다음 세대의 미래를 대신 만들어줄 수 있는 어른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미래를 개척해 나가도록 곁에서 도울 수는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도, 누군가의 부모이거나 교사이거나 리더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매일 두 가지 손 중 하나를 내밀며 살고 있다. 오늘부터 그 손을 조금 더 자주, 敎에서 贊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상대 안에서 이미 자라고 있는 것을 알아보고 두 손으로 받쳐 올리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다음 걸음이다.
오래된 한 글자 贊에서, 나는 미래를 밝힐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이제, 교육을 넘어 찬육의 시대를 함께 열어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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