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펼쳐지는 고교야구 대회의 최대 관심사는 시속 150km를 웃도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의 화려한 모습이다. 미디어와 프로야구 관계자들도 이들의 초고교급 퍼포먼스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일본도 상황은 비슷하다. 하지만 여름철 고시엔으로 불리는 일본 고교야구 대회의 지향은 선수들의 뛰어난 실력을 가리는 데에만 있지 않다. 야구의 사회적·교육적 가치를 어떻게 확산시키느냐 역시 이 대회의 중요한 목표다.
아리아케의 뜨거운 여름
지난 5일 개막한 제108회 여름철 고시엔에서 재확인된 고교야구의 사회적 가치가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구마모토 현(縣) 대표로 이 대회에 사상 처음으로 출전한 아리아케(有明) 고교가 주인공이었다. 구마모토 현은 7월 28일 발생한 대지진으로 39명이 사망하고 9000명이 넘는 이재민이 생겨난 곳이다.
아리아케는 고시엔 대회에서 3경기 연속 역전승을 거뒀다. 아리아케의 승리 소식에 대피소에 있던 구마모토 주민들은 "지진 피해를 잠시 잊고 응원했다. 아리아케 덕분에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아리아케 고교를 응원하기 위해 구마모토에서는 원정 응원단도 꾸려졌다. 응원단은 숙박비를 절약하기 편도 10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밤샘 버스로 왕복했다. 일본 언론은 아리아케 응원단에 '열정적인 탄환 응원단'이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이들은 '자강불식(스스로 힘써 쉬지 아니함)'이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걸고 인상적인 응원을 펼쳤다. 아리아케 선풍이 전국적인 화제가 되자 100여 명에 불과했던 원정 응원단은 18일 8강전에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원정 응원단에 합류할 수 있는 아리아케 고교 취주악부 단원은 4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기에 시민악단 멤버 20여 명이 결합했다. 이들은 계속되는 여진 속에도 합동 연습을 실시해 야구 응원에 힘을 보탰다.
"플레이 플레이 구마모토", 상대팀도 외친 응원 함성
아리아케 고교에 대한 응원은 구마모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고시엔 구장을 찾은 팬들 역시 재난의 상처를 딛고 역전승 드라마를 써낸 아리아케 고교의 분투에 갈채를 보냈다.
흥미로운 대목은 상대 팀도 아리아케 고교의 분전에 진심어린 연대감을 표했다. 2차전에서 아리아케와 격돌한 나가사키 니치다이(長崎日大) 고교 응원단은 "힘내라 구마모토"를 연호했다.
3차전에서 아리아케에 패한 히가시닛폰다이 쇼헤이(東日大昌平) 고교의 투수는 "아리아케 선풍이 계속돼 아리아케가 우승을 했으면 좋겠다"고 응원했다.
후쿠시마 현을 대표해 고시엔에 출전한 히가시닛폰 쇼헤이의 응원단도 재난의 아픔을 공유하는 따뜻한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다.
"후쿠시마도 2011년에 피해를 입었습니다. 경기에는 졌지만 지금은 모두 구마모토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리아케에 당한 패배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18일에 펼쳐진 아리아케 고교와 겐다이 다카사키(建大高崎) 고교와의 8강전에서도 아름다운 응원전이 이어졌다. 겐다이 다카사키 고교 응원단이 "플레이~ 플레이~ 아리아케, 플레이~ 플레이~ 구마모토"를 목청껏 외쳤다. 경기장에는 그 어느 때보다 큰 관중들의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록 10회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0대 1로 패했지만, 아리아케 고교는 "경기장을 가득 채운 응원의 함성이 우리 팀을 여기까지 이끌어줬다"며 승패를 초월한 팬들의 성원에 감사를 표했다.
아리아케 고교 주장 사네다 사토시의 아버지는 18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0년 전 구마모토 지진으로 집이 전부 파손됐지만 아들은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올해 10년 전 악몽이 떠올랐지만 선수들이 좋은 활약을 해줬다. 가슴을 펴고 구마모토에 돌아와 줬으면 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승부의 세계를 넘어 좌절과 패배의 휴먼 드라마를 담은 미디어
고시엔 소식을 전하는 일본 미디어들은 패배한 팀에도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아리아케 고교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흔한 일이다. 방송사들은 패한 팀이 분루를 삼키며 고시엔 구장의 흙을 담는 장면을 승리 팀이 도열해 힘차게 교가를 부르는 장면 이상으로 강조한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일본에는 전국적으로 3746개 고교 야구부가 있다. 이 가운데 49개 팀만이 지역 예선을 거쳐 여름철 고시엔에 출전한다. 물론 승자는 오직 한 팀이다. 나머지 48개 팀은 결국 패자다.
이렇게 시각을 달리하면 고시엔 대회는 '패자들의 향연'이다. 미디어들은 승자의 환희를 일군 고된 과정에 뿌려진 패자의 눈물과 그 의미를 놓지지 않는다.
일본 미디어가 패한 팀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또 있다. 3학년 선수 대부분에게 여름철 고시엔 대회는 야구선수로서의 은퇴 경기에 다름아니다.
많은 선수들은 졸업과 함께 야구선수의 길이 아닌, 진학이나 일반 취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비록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해 그라운드를 떠나지만, 야구에 바친 패자들의 값진 청춘 역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격려와 애정을 렌즈에 담아 낸다.
재난 극복 희망을 던진 야구, 역사적 상처에 소금 뿌린 야구
일본은 자연재해가 많은 국가다. 그래서인지 일본 야구는 재난 극복의 원동력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1995년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 일본시리즈 정상에 올랐던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대표적이다. 당시 오릭스는 '힘내자 고베'라는 구호를 내걸고 유니폼 오른팔 소매에 그 구호를 문구로 새겨넣었다.
1995년은 한신 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한 해다. 6000명이 사망하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수많은 고베 주민들이 연고지 프로야구팀 오릭스의 활약과 그들이 보여준 연대 의식에 큰 힘을 얻었음은 물론이다.
2011년에는 일본 동북부에 대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해 미야기 현의 현청 소재지 센다이도 큰 피해를 입었다. 대지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2년 뒤 센다이를 연고지로 하는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일본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라쿠텐이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 센다이 시민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당시 라쿠텐을 이끈 호시노 센이치(1947~2018) 감독은 "대지진으로 고난을 당한 여러분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지난 3년 간 싸워왔다"는 소감으로 우승 이상의 위로와 희망을 선사했다.
사회적 연대를 잊지 않는 이같은 스포츠 정신이 아리아케 고교를 올해 고시엔 대회의 주인공으로 끌어올린 동력이자, 구마모토는 물론 일본 전역에 반향을 일으킨 저력이다.
다시금 지난 6월 한국 고교야구 대회에서 벌어진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 구호 사태를 되돌아 본다. 어린 선수들을 향해 철없다고 손가락질 하기 전에, 이를 정치 이슈로 끌어올린 목소리 큰 이들의 셈법에 휘말리기 전에, 한국 스포츠에 존중과 배려, 사회적 의식이 아직 남아있는지를 살펴볼 때다.
아리아케 야구부를 향해 상대팀과 일본 전역에서 울려퍼진 승부의 세계를 초월한 응원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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