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에 하나 전쟁이 나길 기도하는 목사가 있다고 치면, 그는 군수회사 주식을 사들인 뒤 전쟁이 터지길 바라는 탐욕스런 투자가나 다름없는 ‘사이비 목사’일 것이다. 죽음의 무기를 팔아 배를 불리려는 전쟁상인들은 날마다 기도를 드린다. "신이시여, 오늘도 어디선가 전쟁이 터지게 하시고, 한번 터진 전쟁은 되도록 길게 이어지고, 지금 휴전협상이 벌어지는 곳에선 그 협상이 깨지게 해주소서."
이런 기도 끝에 실제로 전쟁이 터진다면?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대량 난민이 생기는 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이웃 일본의 분위기가 그랬다. 차마 드러내놓고 기뻐하진 못 했지만, 엄청난 호기를 맞았다고 여겼다. 일본인들은 한국전쟁을 가리켜 '구원의 신'(救ひの神) 또는 '가미가제(神風)'라고 반겼다. 한국전쟁으로 이른바 '전쟁 특수(特需)'라는 호황을 맞았다.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한국전쟁 전에는 (당시 화폐가치 기준으로) 연간 3억 달러의 적자를 보였으나, 1950년 경상수지는 4000만 달러의 흑자를 보였다. 외환보유액도 1951년말 9억 4200만 달러로 2년 전에 견주어 4.5배로 급증해 만성적인 달러 부족에서 벗어났다(남기정, <기지국가의 탄생> 서울대출판문화원, 2016, 140쪽). 한국전쟁 특수는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패한 뒤 불황과 높은 실업의 늪에 빠져 그야말로 빈사상태에 허덕이던 일본경제를 되살렸다.
'지난날 식민지'로 수탈했던 이웃나라에서 전쟁의 불길이 치솟자, '지난날 가해국가'였던 일본이 이득을 챙기는 상황이 됐다. 이는 미국의 이해와도 맞아 떨어졌다. 당시 주일 미국대사 로버트 머피는 "일본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 네 개의 섬을 하나의 거대한 보급창고로 바꾸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미국은) 한국전쟁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 했다(니시무라 히데키, 196쪽). 일본은 이른바 '기지(基地) 국가'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군사기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한반도에서 쓰일 물자를 미군에 공급하는 병참기지로서 떼돈을 벌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에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두 가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더 있다. 하나는 일본은 한국전쟁에서 단순히 후방 출격기지, 보급기지로만 기능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많은 일본인이 전쟁 중인 한반도로 동원됐고 사망자까지 냈다. 한국전쟁에 투입된 인원은 8000명에 이르고, 1951년 1월 현재 57명이 사망했다.
또 하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일본 안에서 벌어졌던 반전(反戰) 투쟁이다. 일본이 한국전쟁에 쓰일 일용품(군복이나 군화 등)뿐 아니라 네이팜탄 등 살상용 무기들을 생산해 한반도로 보내지는 것을 막으려는 대규모 반전 시위가 벌어졌고, 그 투쟁의 한 가운데에 재일 한국청년들이 있었다.
북한취재 전문기자의 열린 시각으로 쓴 책
이 두 가지 비화들을 담은 책이 <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논형, 2020)이다. 이 책을 쓴 니시무라 히데키(西村秀樹)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일본 언론계에선 깊이 있는 이해를 지닌 저널리스트로 꼽힌다. 1982년 김일성 탄생 70년 행사 취재를 비롯해 여섯 차례 북한을 다녀오는 등 마이니치방송(毎日放送)에서 30년 넘게 북한취재 전문기자로 일한 경력을 지녔다. 제주도에서 두만강까지 한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하며 취재를 하기도 했다. 니시무라는 제주도 4.3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98년 제주 4·3 50주년 기념 심포지움에 참가하려고 제주도를 방문한 길엔 학살 현장들을 들렀다.
남북분단과 그에 따른 갈등 상황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저자의 이력은 이 책의 성격을 짐작하게 만든다. 일본의 우경화 흐름 속에서 극우 편향적인 보도를 하는 일본 언론의 꽉 막힌 분위기와는 결이 다르다. 동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의 과거를 떠올리면서 '왜 전쟁범죄 국가인 일본이 아니라 전쟁범죄의 피해국이었던 한국이 분단되었는가' 의문을 품을 정도로 열린 시각을 지녔다. 반공이냐 아니냐를 먼저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평화주의, 사람의 목숨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휴머니즘의 바탕에 서있다.
한국전쟁 2주년 맞아 벌어진 반전투쟁
이 책은 한국전쟁 2주년을 맞아 일본 오사카 지역에서 벌어졌던 2개의 대규모 반전(反戰) 투쟁을 비추고 있다. 하나는 히라카다(枚方) 폭파미수사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군수물자 수송기지를 습격해 가동을 멈추게 한 스이타(吹田) 사건이다. 히라카다 사건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구일본 육군이 포탄 제조공장으로 쓰던 공장을 불하받아 미군 군납용 무기와 군수물자를 만들던 고마쓰 제작소를 한밤중에 급습해 기계를 폭파하고 근처에 있던 사장 사택을 불태우려 했던 사건이다.
저자 니시무라가 이 책에서 특히 집중했던 것이 스이타(吹田) 사건이다. 사건의 내막을 알기 위해 저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핵심 관련자들을 만나러 다녔다. 스이타 사건은 1952년 6월 24일 밤, 오사카 인근 스이타시(市)에서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등 일본이 미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는 것에 항의하며 학생과 노동자, 재일조선인들이 일으켜던 반전 투쟁이다. 이 사건의 큰 줄거리를 저자가 요약한 부분은 아래와 같다(괄호 안은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덧붙인 것임).
오사카(大阪)는 한국전쟁에서 사용할 무기와 탄약의 생산기지가 되었다. (오사카의 한 구역인) 이쿠노 일대의 영세공장에서 만들어진 (네이팜탄이나 집속탄 등 살상무기) 부품들이 국철 스이타 조차장을 거쳐 고베(神戸) 부두에서 선적되어 한반도로 보내지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2년째인 1952년 6월 24일부터 25일 사이, 오사카대 도요나카 캠퍼스에서 노동자, 학생, 시민, 재일조선인들이 한국전쟁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집회가 끝난 후 약 1000명의 시위대는 국철 스이타 조차장에 난입해 25분간 (조차장 가동을 멈추게 하고) 구내에서 시위행진을 했다. 오사카부 경찰과 검찰은 소요죄(현재의 소란죄)로 111명을 기소했고, 20년에 걸친 재판투쟁의 결과,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는 일본국 헌법 제21조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반전운동의 승리였다(니시무라 히데키, 8-9쪽).
위 글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들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에 일본이 미국의 전쟁 수행을 위한 보급기지(병참기지)로 쓰이는 것을 반대하고 나아가 전쟁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집단행동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반전·반미 행동이 오랜 법정 투쟁 끝에 일본 사법부에서 ‘표현의 자유’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덧붙여 이 책에서 저자가 오랜 시간을 들인 노력 끝에 밝혀낸 사실은 재일 조선인 청년들이 오사카에서 일어난 반전·반미 투쟁의 주요 축을 맡아 해냈다는 것이다. 글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시인 김시종, 부덕수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일본은 한국전쟁에 뛰어든 '참전국'이다"
이른바 '전쟁 특수(特需)'를 누린 일본은 한국전쟁에서 단순히 병참기지로만 기능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 책에는 많은 일본인이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터에 투입됐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담겨있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 해안에서 기뢰를 제거하는 등 미군의 군 작전을 도운 일본인 숫자는 8천명으로 추산된다. 일본 상선 관리위원회 소속 선원 약 2000명, 기범선 선원 약 1300명, 인천으로 파견된 항만노동자 약 1000명, LR(예인선) 선원 약 2000~3000명. 전부 합쳐서 8000명 정도의 일본인이 한국전쟁의 해상수송을 위해 일본을 떠나 활동하고 있었다(147쪽 참조).
이들은 정확히 말해서 민간인이지 군인은 아니다. 2001년 9.11 테러 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내친 김에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민간군사회사'의 존재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도널드 럼스펠드 당시 국방장관이 추진했던 ‘전쟁의 외주화’ 정책으로, 수송이나 경비 같은 비전투 분야의 임무를 군인이 아닌 ‘블랙 워터’ 같은 민간군사회사와 계약을 맺고 넘겼다. 이라크전쟁도 아니고 베트남전쟁도 아닌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인들에게 외주를 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들은 군인이 아니다. 말하자면 민간군사회사의 선봉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기지 국가’라 불리는 또 다른 이유다. 일본은 한국전쟁에 실질적으로 참전하고 있었다(151쪽).
사망자들도 생겨났다. 전쟁이 터지고 1951년 1월까지 한국전쟁에 휘말려 사망한 일본인 숫자는 57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1950년 11월15일 원산상륙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원산 앞바다를 항해중이던 LT(대형예인선) 636호가 기뢰에 부딪쳐 승무원 27명 가운데 22명이 죽었다(148쪽). 당시 일본선원들은 미 해군과 고용계약을 맺은 상태였다고 알려진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일본은 한국전쟁에 사실상 ‘참전’했다고.
이들의 신분이 민간인이어서 그렇지 군인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생겨난다. 1946년에 공포되어 이듬해 시행된 일본헌법 제9조 1항과 2항에는 '전쟁'과 '군대'를 포기한다는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이는 줄곧 '평화헌법'이라 불리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이 한국전쟁에 참전을 했다면, 헌법 제9조를 어기는 것을 뜻하고, 평화헌법의 토대가 흔들리게 된다. 문제는 일본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과 일본 양쪽 모두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군수 열차 10분간 멈추면, 1000명의 동포 살린다"
스이타(吹田) 사건을 취재하면서 저자 니시무라가 오랫 동안 공을 들여 거듭 만나며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시인 김시종과 부덕수(사건 당시 민주애국청년동맹 오사카본부위원장)이다. 1929년생 동갑내기인 이들은 둘 다 제주도 출신으로 4.3학살에 남다른 기억들을 지니고 있던 열혈 청년들이었다.
시인 김시종은 4.3에 연루돼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일본으로 밀항해온 아픈 과거를 지녔다. 부덕수는 어머니가 해녀로 갖은 고생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노동자로서의 건강한 투쟁의식을 품게 됐다. 이 둘이 한국전쟁 중 일본으로 보내지는 전쟁물자를 막으려는 대규모 시위 투쟁에 뛰어든 것은 당시의 그들로서는 자연스런 결단이었다.
시위대 현장 조직자였던 김시종 시인은 "당시 한국전쟁에 보내지던 군수 열차를 10분간 멈추면, 1000명의 동포를 살릴 수 있다고 해서 필사의 심정으로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
"한국전쟁에 대한 반전·평화 시위는 오사카에서 집속탄이나 네이팜폭탄 같은 군수물자를 한반도로 수송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주민들이 모두 잠들어 조용한 틈을 타서 다양한 무기와 탄약이 운반되었습니다. 열차수송을 저지하는 결사대가 내가 알기로는 십여 명으로 조직되었습니다. 그들은 투쟁이 실패하여 열차가 움직이면 선로에 몸을 던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렸다가 정말로 모두 열차의 선로에 몸을 눕혔습니다”(312쪽).
김시종은 스이타 조차장으로의 시위 동선을 사전에 꼼꼼하게 답사하고 문제점을 체크하는 등 사전준비에 만전을 기함으로써 당일 시위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했다. 부덕수는 시위대를 이끌며 밤새 먼 길을 걸어 스이타 조차장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부덕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1000여명에 이르렀던 대규모 시위 투쟁 참가자들의 3분의 2가 재일 한국인들이었다(스이타 사건으로 기소돼 법정에 선 피고인 111명 가운데 조선인은 50명).
당시 55만 명쯤이던 일본에 재일 동포들은 외국인 등록을 하도록 돼 있었다. 그들 가운데 절대 다수가 ‘한국’(남한)이 아닌 ‘조선’(북한)으로 국적을 표기했다. 1950년 9월말 기준으로 보면 79.6%가 자신의 국적을 ‘조선으로 등록했다(정영환, <해방공간의 재일조선인사> 푸른역사, 2019, 388쪽).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갈라지고 남한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제주 4.3을 비롯해 민중들이 학살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재일 한국인들 상당수가 “우리의 정치적 모국이 어디인가”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고민했을 것이다. 그런 고민 속에서도 전쟁을 반대하고 미국의 한반도 전쟁 개입에 비판적이었던 좌파 청년들은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마음으로 스이타 조차장을 습격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정의롭다고 여겼던 북한에 실망하고 만다. 1955년 12월 북한에서 박헌영(朴憲永)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들 청년들에게 북한은 더 이상 '정의'가 아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순수한 열정을 지닌 청년들을 투쟁 현장으로 내몰았던 일본공산당도 이들을 버렸다.
(일본공산당은) 과격한 무장투쟁노선을 자아비판하면서 노선전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 두 사건(스이타 사건과 히라카다 사건)을 청산해야할 과오로 낙인찍었다. 나아가 소박한 믿음으로 이에 참가하여 적극 시위를 주도했던 재일조선인에게 그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겨버렸다(남기정, 333-334쪽).
김시종과 부덕수, 이 두 사람은 젊음을 바쳤던 그날의 투쟁을 후회할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스이타 사건은 이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해 김시종은 러시아의 혁명가 크로포트킨(1842-1921)의 일기에 나오는 말로 대신한다. “그걸로 됐다. 거기에는 나의 지순한 시절이 있었으니.”
그렇다. 김시종, 부덕수 이 두 사람에게 ‘순수의 시대’는 바로 그때였다. 그들이 두 발로 서있던 곳은 남북분단과 전쟁이라는 불행의 씨앗을 뿌린 일본이었지만, 반전을 외치며 한반도에서의 전쟁 희생자를 줄여야 한다는 열정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 아닐까 싶다. ‘왜 전쟁범죄 국가인 일본이 아니라 전쟁범죄의 피해국이었던 한국이 분단되었는가’ 하며 저자 니시무라가 품었던 의문을 비롯해, 여러 가지 잊고 있었던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바라는 독자들이라면 일독할 가치가 있다.
* 이 글은 월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실린 필자의 서평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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