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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같은 '공정론자'들이 겨냥한 '공정 사회'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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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준석' 같은 '공정론자'들이 겨냥한 '공정 사회'란 무엇일까?

[창비 주간 논평] '이준석 현상'은 지속될 수 있을까

지난 6월 11일 제1야당 국민의힘은 30대 청년 이준석을 당 대표로 선출했다. 한국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사건인 만큼 '이준석 돌풍'을 이끈 원인과 향후 미칠 파장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보수야당의 근본적인 체질 변화는 불가능하기에 이준석의 당선은 일회성 '쇼'에 지나지 않는다며 애써 그 의미를 격하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신선하고 개혁적인 젊은 정치인이 한국 보수정치의 일대 혁신을 가져올 거라며 기대감을 부풀리기도 한다. 이처럼 정치적 성향에 따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지만 서로 공유하는 대목이 없지는 않다. 이준석이 새로운 사회적 정의의 기준으로 내세운 '실력'과 '공정'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진단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진단은 이준석이 실력과 공정을 강조한다는 점만 부각할 뿐, 그 '실력'과 '공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분석은 빠진 경우가 많다.

이준석은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시절인 2019년 펴낸 대담집 <공정한 경쟁>(나무옆의자 펴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한국은 산업화도 민주화도 태동기를 지나 안정기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시대정신에 맞는 새로운 리더십이 부상하리라고 믿습니다. (…) 저는 그런 시대정신은 다름 아닌 실력, 실력주의라고 생각합니다."(67면)

이는 얼핏 상식적인 얘기처럼 들리지만 기왕의 정치가 쌓아 올린 모종의 합의를 뒤엎는 급진성을 내포하고 있다. 예컨대 이제까지 정치인들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최소한 겉으로는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온정주의적' 태도를 표방해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소수와 약자를 따뜻이 배려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여성이 의사결정의 지위에 오를 수 있도록 기회를 늘"릴 것을 약속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취임사를 통해 "여성이나 장애인 또는 그 누구라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이준석은 그와 같은 온정주의를 '위선'으로 치부하면서 오직 '실력'이 사회적 자원을 배분하는 데 제일의 잣대가 되는 냉혹한 사회적 규준을 도입할 것을 주장한다.

'줄 세우기'가 공정인가?

이준석은 '시혜적 온정주의'를 부정하고 '가학적 실력주의'로의 이행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정책이 할당제 폐지론이다. 여성과 지역, 청년 할당제 등은 소수자의 사회 진출을 독려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구조적인 차별의 현실을 은폐하는 면도 없지 않다. 할당제를 둘러싸고 '역차별' 논란이 불거지는 것도 할당제에 내재한 근본적인 한계와 관련이 있다. 할당제는 약자와 소수자들이 취약하고 결핍된 존재로 재현되는 한에서만 온정적인 배려를 받을 수 있다는 편견을 강화시킨다. 약자와 소수자들이 틀에 박힌 피해자의 이미지를 거부하고 주류 사회의 시혜적인 태도에 맞서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때, 이제까지 불쌍해서 봐줬더니 감사한 줄도 모른다는 식의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것도 그런 고약한 편견 탓이다. 할당제의 이런 한계가 곧 할당제 폐지론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조적인 불평등을 치유하려는 치열한 노력 없이 할당제 하나로 할 일 다 했다는 식의 태도라면 '할당제 폐지론'이라는 백래시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다시 살펴볼 일이다.

할당제에 대한 분노에는 세상은 평등하지 않고 사람들은 각자가 가진 재능과 실력, 능력 등에 따라 위계적인 서열을 갖는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때 '공정'은 서로 다른 삶의 조건에 놓여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처지를 포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단지 각 개인에게 정확한 서열을 부여하는 문제로 축소되고 만다. 이준석이 외치는 공정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내세우는 '실력'과 '공정'은 사람들이 위계화된 서열 체계하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위치를 체념적으로 수용하게 만들기 위해 요청되는 객관적인 근거에 가깝다. 관련해 앞서 언급한 대담집에서 이준석이 국공립대가 학생을 철저하게 수능 점수로 줄 세워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준석은 그런 '줄 세우기'야말로 가장 공정한 것이라고 보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단일한 기준을 잣대로 삼은 '줄 세우기'는 각 개인이 놓인 상이한 처지와 삶의 조건, 미래의 가능성과 잠재력 등을 복잡하게 평가하는 수고 없이도 타인들에게 명확한 사회적 위계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줄 세우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준석 자신 같은 '엘리트'는 예외다. 이준석이 스스로 밝히듯 그 자신은 하버드대 입학사정관 제도를 통해 잠재력을 인정받은 경우다. 만약 하버드대가 시험 하나로 학생들을 줄 세웠다면 영어가 부족했다고 밝힌 바 있는 그가 합격증을 받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준석은 미국 대학의 입학사정관제가 바깥에서 보기엔 불공정해 보일지 몰라도 다양한 기준으로 학생들을 선발하므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이 모순을 이준석만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뛰어난 소수의 엘리트와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룰이 달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준석은 서울과학고 재학 시절 경쟁이 없어서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며 "구성원 전부의 실력이 다 같이 월등하면 그 집단에서는 경쟁이 무의미"(204면)하다고 말한다. 이준석은 이렇게 '우수한' 사람들을 구별하고 그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무한경쟁의 무간지옥으로 빠뜨리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준석이 말하는 '공정한 경쟁'은 뛰어나지 않고 우수하지 못한 죄로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사회적 형벌에 가깝다.

'공정'을 정말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면

이처럼 엘리트주의적이고 가학적인 이준석의 실력주의 담론이 별다른 견제와 비판 없이 추인되는 듯 보이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에 대한 내 대답은 '이준석의 실력주의와 공정한 경쟁론은 제대로 된 정치적 검증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관련해 특히 이준석의 페미니즘 비판이 남성 청년들의 맹목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정작 그의 담론에 내장된 모순과 결함에 대한 검증을 막아선 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준석이 내세우는 '실력주의'가 새로운 사회적 정의의 기준으로 적합한지를 놓고 제대로 된 논쟁이 벌어진다면 그 과정에서 그의 주장에 내재한 모순과 가학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준석 현상'이 거품처럼 사라질 거라고 믿는 것도 성급하다. 이준석 현상의 배후에는 계층적 유동성이 제한되고 경제적 자산과 문화적 지위를 세습화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성 정치권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불평등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거기서 발생하는 대중들의 분노와 원한을 손쉽게 이용하려는 세력은 얼마든지 얼굴과 구호를 바꿔가며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실력'과 '공정'은 대중들에게 긍정적이고 매력적으로 다가서는 기표이지만 주장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그 속을 임의로 채울 수 있는 여지가 큰 개념이기도 하다. '공정'에 대한 규범적인 탐구를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모종의 원한과 혐오의 감정으로 그 개념을 전유하려 든다면 이준석처럼 서열화와 줄 세우기가 곧 공정이며 다양성의 추구는 공정성의 교란에 불과하다는 식의 단순한 주장도 그럴듯한 것으로 포장될 위험이 여전히 우리 곁에 상존해 있다.

얼마 전 KBS에서 벌인 세대 인식 집중 조사 설문 결과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설문 내용 중 하나는 '모 편의점의 페미니스트 채용 거부 논란에 대한 의견'으로 이 조치가 공정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고 있었다. 무려 47.3퍼센트의 청년 남성들이 채용 거부가 '공정하다'라고 답한 것에 많은 이들이 주목했지만(같은 질문에 '공정하다'라고 답한 50대 남성은 11.5퍼센트, 50대 여성은 5.4퍼센트에 불과했다) 내가 처음 든 생각은 이것은 공정의 잣대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채용을 거부하는 일은 '공정'이라는 규범이나 도덕의 영역으로 굳이 끌고 올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 위법적 소지가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요새는 '동성애에 대해 찬성합니까?' 같은 질문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건 동성애가 찬반의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찬반의 문제가 아닌 것을 찬반의 프레임으로 묻는 것이 사안의 본질을 흐리는 것처럼 세상만사에 관습적으로 '공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공정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을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퇴락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준석과 같은 '공정론자'들이 겨냥하는 건 '공정한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엄밀하고 규범적인 탐구가 아니라 우리가 계발해야 할 공정에 관한 사회적 감수성의 퇴락인지도 모른다. 공정에 대해 진지한 애착을 갖는 사람은 어디 화풀이하듯 "이건 공정이냐? 그러면 저건 공정이냐?" 하는 식으로 공정을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 함부로 내던지지 않는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타인에 대한 교묘한 비난이나 저열한 공격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일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이준석 현상'이 한국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동력으로 기능하기를 이준석 자신이 바란다면 평범한 사람들을 정확하게 줄 세우는 일이 곧 공정이라고 강변할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마주한 이들에게 공정의 이름으로 제시할 수 있는 희망의 세목을 만들어나가려는 태도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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