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라는 담론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짜여진 것이라면, '농업 위기'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당장 정부는 녹색 위기를 말하면서 역설적이게도 '녹색 성장'을 강조한다. 식량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과 국가는 이 위기 담론을 통해 공격적인 수출을 통한 식량 수입의 당위성을 강조할 것이다. 마다가스카르의 예처럼, '세계로 뻗어나가 외국의 토지와 식량을 사들여라'는 구호가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위기를 인문학적이고 감성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보다 과학적인 인식과 대처로 이들의 논리를 깨 나가야 한다." (최병두 대구대학교 교수)
"이 시대에 학자는 자고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강연으로 화두를 던지자, 최병두 대구대학교 교수는 자못 '적색'이 묻어나는 대안으로 토론을 이어나갔다. 3시간 남짓의 강연과 토론을 지켜보던 한 참가자는 "녹색 대 적색 대안의 대결을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프레시안> 창간 8주년을 기념해 16일 오후 대구 MBC 강당에서는 김종철 발행인이 연사로 나선 가운데 '경제 성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강연회가 열렸다. <프레시안> 후원 회원 '프레시앙'을 비롯한 독자 70여 명도 참석해 김종철 발행인과 최병두 교수의 열띤 강의와 토론을 지켜봤다.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프레시안 |
최병두 교수 "'대안 사회' 구상은 인문학적 상상력에 과학적 분석 더해야"
'지금은 경제 위기 시대다.' 우리는 벌써 몇십 년째 같은 말을 듣고 있는 걸까. 1997년 IMF 당시부터 시작된 이 '위기론'으로 서민들은 금가락지까지 빼가며 '애국의 행렬'에 동참했건만, 여전히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경제 위기니 '더 참고 고통을 분담하자'는 정부의 구호는 여전하고, 그 속에서 국민들은 '국민 소득 몇만 불 시대'를 향해 전력 질주 해왔다.
이날 강연에서 김종철 발행인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위기가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사회에 만연해 온 '경제 성장에 대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른바 '민주 정부' 조차도 기득권의 입맛에 맞는 경제 노선을 채택하고, 이에 실망한 대중이 이명박 정부를 선택한 배경에는 경제 성장이라는 허상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
그는 경제 성장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좋은 사회를 만드는 필수 조건임을 역설했다. 민주주의에 토대를 둔 '우애와 협동의 사회', 그것이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는 뼈아픈 지적이다.
이날 지정 토론을 맡은 최병두 교수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강조하는 김 발행인의 대안 제시에 "위기 담론을 극복하기 위해선 사회과학적 분석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최병두 대구대학교 교수. ⓒ프레시안 |
그는 이어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협동 농장의 사례도 이상적인 모델로 꼽을 수 있겠지만, 설사 그 모델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그 안에 새로운 지배와 위계 질서가 형성된다면 결국 실패한 모델일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근대 국가의 지배 형식가 아니라 인민의 자기 통치라는 내용이다"라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또 김종철 발행인이 제시한 '대안 사회'의 방법론에 관해서도 의문을 제시했다.그는 "김 선생님께서는 사회적 분업과 고용 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자율 경제'로 가야한다고 말씀하시고, 저 역시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본다"면서도 "그렇지만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당장 '임금 인상 투쟁'보다 '임노동 철폐'를 위한 운동을 요구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당장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극심한 상황에서, 차별받지 않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화두는 자율적 노동이나 생산 수단의 관리가 아니라 당장의 정규직화 쟁취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우리는 국가 권력의 물신성을 끊임없이 비판해야 하지만, 현재의 국가 권력이 가지고 있는 속성에 대해 아무리 신랄한 비판을 한다고 해도 국가 권력 자체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나름의 해결책이 뒷받침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장 중심의 사회…우리 시대의 철학은 어디에 발 딛고 있나"
김종철 발행인은 "나는 '과학'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을 잘 지적해주신 것 같다"면서도 최 교수의 비판에 대해 하나하나 논박했다.
김 발행인은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 속에서 물론 자급자족의 순환 경제는 어려울 수 있지만, 지금의 위기 속에서 필요한 것은 근본적인 변혁"이라며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그는 "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있지 않다가 결국 끌려 다니기만 하지 않았나. 더 이상 가망없는 환상에 붙들리지 말고, 미리부터 작은 실천이라도 준비해보자"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역사가 단계적으로 진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탈근대'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비근대'로 가야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모두 귀농해야 한다거나 자급자족 경제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성장 중심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당장 우리의 철학과 원칙부터 확인해 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안 공동체 운동…'성장 중독 사회' 바꿔내는 출발점 될 것"
▲ 16일 대구 MBC 강당에서 열린 <프레시안> 창간 8주년 기념 강연회에서 약 70여 명의 독자들이 참석해 김종철 발행인과 의견을 나눴다. ⓒ프레시안 |
강연회에 참여한 청중들도 성장과 개발 중심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대안 사회'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이날 강연을 듣기 위해 KTX를 타고 부산에서 왔다는 한 고등학교 교사는 "요즘 4대강 사업이나 일제고사 문제 때문에 자다가고 벌떡 벌떡 일어날 지경"이라며 "요즘 들어 농촌에 귀향할까 고민도 하고 있지만, 오히려 농촌이 도시보다 더 이기적이고 각박해지는 것만 같아 불안하다"고 심경을 털어놨다.
대구의 한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한 참가자는 "김종철 발행인께서 대안 모델로 제시한 '성미산 마을' 사례는 자못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살 때는 좋을지 몰라도 결국 이 공동체 운동이 정치세력화 된다면 정권과 자본이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까. 그런 의미에서 불완전한 모델로 봐야하지 않을까"라며 의문을 제시했다.
이 같은 질문에 대한 김종철 발행인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명쾌했다.
"마을 공동체 모델이 모든 대안의 전부는 분명 아닐 것이다. 거리에서 촛불을 드는 것,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화를 위해 싸우는 것, 진보적 정당 정치를 위해 힘쓰는 것 모두 중요하다. 그 모든 공간에서 싸우되, 잊지는 말자. 성장 중독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내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보다 장기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
<프레시안> 창간 8주년을 기념해 진행하는 이번 강연회는 '김대중, 노무현 이후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큰 주제 아래 각 지역에서 다양한 주제로 개최된다. 광주를 시작으로 앞으로 3주간 매주 수요일 전주(21일), 부산(29일), 대전(11월 4일 목요일)에서 강연회가 이어질 예정이다. 자세한 일정은 프레시안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문의전화는 02-722-8494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