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여름 더위가 시작되지도 않았던 6월, 열돔에 갇혀버린 유럽의 도시들은 낮 최고 기온이 섭씨 40도를 넘겼다. 6월 23일 섭씨 44도까지 오른 프랑스는 장례식장에서 사람을 받을 수 없을 정도라는 뉴스가 특파원발 보도로 소개됐다. 폭염으로 인한 유럽 사망자 수는 평년보다 만 명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지구촌에서 벌어진 전쟁에서의 희생자 수를 생각한다면 인간은 국가 간의 전쟁보다 기후변화와 더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이동에서 온실가스 감축의 문제는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하는 과제가 됐다. 개인의 편리성을 극대화하는 정책이 결국에는 모두에게 심각한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 독일의 도시들을 탐방하며 느낀 점은 공공교통이 잘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공공교통은 궤도를 기반으로 한다.
유럽은 오래전부터 공공교통, 특히 철도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교통개혁을 추진해 왔다. 육상교통에서 대량 수송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철도를 대체할 수 있는 모델은 없다. 궤도를 기반으로 하는 철도와 트램은 자동차가 구현한 '도어 투 도어' 이용할 수 없다. 그만큼 불편함이 따른다. 그러나 인프라가 갖는 경직성에도 불구하고 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는 장점들로 인해 궤도 교통은 기후 위기 시대의 대안 교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 발전한 정보통신 기술은 고립된 철도망을 다른 교통수단과 연결해 효율성을 높여준다. 철도나 지하철, 버스 같은 공공 교통수단은 더 이상 독자적인 메커니즘 속에서 운용되는 게 아니라 서로 연결된다. 그 결과 각각의 교통수단이 발휘하는 효율성을 더 높일 수 있다.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광역전철을 타면 객실 안 모니터에서 다가오는 정차역에 접근하는 노선버스들의 도착 시간을 알 수 있다. 열차 정차 빈도가 낮은 지역에서는 열차 도착 시간과 연동된 버스 배차를 하는 곳도 있다. 공용 자전거들은 잘 닦인 전용도로를 이용해 역과 버스 정류장으로의 이동을 도와준다. 공공교통 시스템이 유기적으로 작동할수록 지역 공동체의 역동성이 살아난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숙소가 있는 동네 주택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람들을 응원하는 'VIVA GAZA!!' 낙서가 크게 쓰여있는 벽도 촉촉이 젖어 있었다. 전철역에 내려 몇 블록을 걷다 보면 만나는 비바 가자 낙서는 이제 집에 거의 다 왔다고 안심하게 되는 표시였다. 짧은 시간 정들었던 동네와 낙서에 작별 인사를 하고 에쉬본행 전철에 올라탔다.
프랑크푸르트 에쉬본은 삼성과 엘지를 비롯한 한국 대기업들과 세계 여러 나라의 기업들이 들어와 있는 곳이다. 평일 아침 에쉬본 남역은 출근하는 노동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회사로 가는 노동자들의 발걸음이 만들어 내는 생동감이 거리를 가득 채운다. 숙소를 제공하고 프랑크푸르트시를 안내했던 한국 청년과도 에쉬본 남역에서 헤어졌다. 몇 나라를 거쳐 이주 노동자로 독일에 정착한 한국 청년은 사람들 속에서 손을 흔들고는 사라졌다. 글로벌 시대 세계 곳곳에서 열심히 삶을 개척하는 한국인들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에쉬본 남역에서 반대편 승강장으로 넘어가 프랑크푸르트 중앙역행 S반 열차에 올랐다. 중앙역 지하 S반 승강장에서 S반 8·9선을 타면 공항으로 갈 수 있지만 시간 여유가 있어 지상역으로 올라가 서점에 들렀다. 프랑크푸르트 명소 중 하나인 롸머 광장 건물이 담긴 냉장고용 자석 기념품을 사고, 역의 사진 몇 컷을 더 찍은 후 천천히 지하 S반 승강장으로 내려갔다. 공항 방면 승강장에 서니 곳곳에 캐리어를 챙긴 승객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록 공항행 열차는 오지 않았다.
승객들이 더 불어났고, 사람들은 일행끼리 모둠을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며 열차를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보통의 배차 간격과는 다르게 열차는 오지 않았다. 승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승강장에 열차가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열차에 올랐다. 나도 캐리어와 배낭을 객차 안으로 들여놓았다. 그러나 열차는 좀처럼 출발하지 않았다. 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이 동요하며 열차 벽면에 붙은 행선표를 보고 하는 와중에 역무원이 칸칸을 돌며 열차는 운행하지 않는다고 모두 내리라고 했다.
졸지에 승강장으로 쫓겨난 승객들은 역무원에게 열차 운행이 안 되는 이유를 물었지만, 별다른 해답을 얻지 못했다. 승객을 밖으로 내뱉은 열차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다른 노선의 S반 승강장에서는 쉴 새 없이 열차가 도착하고 떠났지만, 공항행 노선만 멈춰 섰다. 캐리어를 끌고 기관사가 있는 정차한 열차의 맨 앞으로 갔다. 기관사에게 운행 중단 이유를 물었지만, 되돌아오는 영어와 독일어가 섞인 답변은 해독 불가였다.
라인마인 교통연합 앱인 RMV앱을 켰다. 앱에는 공항으로 가는 8·9호선이 모두 지연 운행 상태임을 알리고 있었다. 문제는 지연이 아니라 운행 중단 사태였다. 앱에는 8·9호선이 공유하는 비스바덴 중앙역에서 운행 지장 상태가 발생했다고 이용자들이 신고한 내역이 공지돼 있었다. 빠른 시간 안에 정상 운행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공항에 가려는 사람들은 각자 대체 교통수단을 찾아 흩어졌다. 애초에 공항으로 가는 버스나 택시는 생각해 두지 않았기에 독일 철도 공사 앱을 열었다. 다행히 30분 정도 후에 떠나는 고속열차가 공항을 경유했다. S반은 일주일권을 샀기에 공항까지 무료였지만 고속열차는 새로 표를 끊어야 했다. 비행기를 놓치면 안되는 입장에서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1터미널에서 철도와 연결되는데 장거리 열차가 서는 역과 지역 광역 열차 S반이 정차하는 역이 다르다. S반의 경우 1터미널 역에서 내리면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 3터미널행 모노레일 역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지만, 장거리 열차를 탔을 경우 복잡한 이동 경로를 따라가야 한다. 나는 1터미널 장거리 열차 역에 내리자마자 3터미널행 모노레일 역사를 찾았지만, 안내표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공항 직원에 물으니 터미널 순환 버스를 타야 한다고 알려준다. 캐리어를 끌고 꽤 긴 거리를 이동한 끝에 3터미널행 버스에 탈 수 있었다.
1터미널에서 새로 개장한 3터미널까지는 버스로도 한참을 달려야 했다. 헐레벌떡 항공사 체크인 카운터에 수화물을 맡기고 표를 손에 쥐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여행에서는 언제든 돌발 변수가 생길 수 있고 예정된 계획에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서 '플랜 B' 갖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비행기를 타야 한다면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두고 움직여야 한다는 교훈을 새삼 깨달았다. 프랑크푸트트 공항이 시내와 가까운 위치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도시였다면 비행기를 놓칠뻔했다.
메트로폴리탄, 거대 도시의 철도망은 그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인프라가 됐다. 도시라는 유기체의 혈관이 된 교통망은 단단히 결합돼 있다. <카오스>를 쓴 과학사 작가 제임스 글릭(James Gleick)은 이륙하던 비행기가 동력을 잃어 땅에 부딪히는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고 중상을 입은 경험을 한 뒤에 여러 가지 비행기 사고를 분석했다. 글릭이 내린 결론은 긴밀히 연결된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독자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없다.
서울지하철의 수많은 노선 중 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면 글릭의 말대로 "진동은 어디에서나 느껴질 수 있다." 단단히 결합한 시스템은 한곳의 문제가 연쇄 파동을 일으켜 연결된 모든 곳에 영향을 미친다. 운행을 멈춘 심야 시간, 선로와 정비고, 통신망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굵은 땀을 흘리며 보수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매일 평범한 일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시스템과 연관된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눈에 띄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에 균열이 생기면 비행기를 놓치거나 출근을 못 할 수도 있고 심각한 경우에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어쩌면 평범한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사회는 교통 시스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 국적, 인종, 성별, 종교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도 동료 시민으로서 연결돼 있다.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며 평화로운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나와 남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한 사람임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거대한 동체가 땅을 밀어내더니 공중으로 떠올랐다. 비행기가 선회를 위해 날개를 기울이자, 지상의 풍경들이 미니어처처럼 펼쳐졌다. 동쪽으로 기수를 잡은 기체는 기다리는 일상을 향해 시간을 거슬러 날았다.
※ <독일 기행> 연재를 마칩니다. 함께해 주신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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