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6월항쟁이다.
전두환의 호헌 조치 후 발생한 노골적인 정치 폭력, 용팔이 사건
프레시안 : 1987년 4월 13일 창당 발기인 대회를 열고 직선제 개헌을 다짐한 야권 신당은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 후 어떤 상황에 놓였나.
서중석 : 4월 13일 이후 신당은 심한 탄압에 직면했다. 이철 의원이 전격 기소됐고, 신당에 참여한 김용오 의원은 구속됐다. 창당 대회 장소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당을 만들기 위해 지구당 대회가 각지에서 열렸는데,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괴한들이 백주에 잇따라 나타나 대회장을 점거하고 난동을 부렸다. 세칭 용팔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양김과 대립하던 신민당 비주류에서 이 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보도됐지만, 백주의 난동 배후에 안기부를 비롯한 전두환 정권이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사태는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을 뚜렷이 부각시켰다.
(전두환 집권기에는 이 사건 수사가 지지부진했다.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인 1988년 9월에야 용팔이(김용남)가 검거됐다. 사건 발생 1년 5개월 만이었다. 1989년에는 이택희(사건 당시 신민당 의원)가 용팔이의 배후로 검거됐다. 그 이후에도 다른 관련자가 구속됐지만, 이 정치 폭력 사건과 전두환 정권의 관련성 등의 문제는 규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재조사가 이뤄졌다.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그해 2월 25일 이택돈(사건 당시 신민당 의원)이, 3월 9일에는 장세동(사건 당시 안기부장)이 구속됐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장세동과 이택희·이택돈은 1986년 12월부터 안기부의 궁정동 안가 등에서 만나 정치 현안을 논의했고 그 과정에서 용팔이 사건을 모의했다. 이 사건이 있기 1년 전부터 장세동이 이택희를 수시로 만났고 그때마다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르는 정치 자금을 대준 사실도 드러났다. '편집자')
전두환 정권의 방해 책동에도 신당은 소속 의원 67명으로 원내 교섭 단체 등록을 했다. 그리고 5월 1일 가까스로 창당 대회를 열어, 이게 통일민주당인데, 김영삼을 총재로 선출했다.
각계각층에서 활화산처럼 타오른 호헌 철폐 투쟁
서중석 : 4월 13일 바로 그날부터 호헌 조치에 대한 반대 성명이 쏟아졌다. 4월 13일 대한변호사협회 등에서 반대 의사를 발표했다. 14일에는 전국 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목협)에서 전두환 정권 퇴진을 요구했고 KNCC는 4·13 호헌 조치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개신교의 다른 여러 단체에서도 호헌 조치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호헌 철폐 투쟁은 4월 21일, 22일경부터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21일 천주교 사제들의 단식 투쟁과 22일 대학 교수들의 시국 선언문 발표는 모두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큰 호응을 얻었고, 그러면서 4·13 호헌 조치 철폐 운동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됐다.
4월 21일 천주교 광주 대교구 소속 신부 19명이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를 드리며'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29일까지 단식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다른 지역의 천주교 사제들은 물론 개신교 목회자들도 연이어 그것에 호응하는 투쟁에 들어갔다. 천주교에서는 전주, 서울, 안동, 원주, 인천, 춘천, 마산, 부산, 대전, 청주 교구에서 많은 사제들이 단식기도에 동참했다. 보수적인 대구 교구와 수원 교구에서도 일부 사제들이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광주 대교구 수녀 79명, 원주 교구 수녀 21명 등도 단식기도에 동참했다. 5월 4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민주 개헌에 서명한 신부 571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전체 신부 숫자의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었다. 개신교 목사들은 5월에 들어와서 단식기도를 많이 했다. 서울 목협, 부산 목협의 목회자들과 인천, 춘천, 대전, 익산, 청주 지역의 목회자들이 단식기도에 돌입했다.
4월 22일에 시작된 대학 교수 성명은 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줬고 사회에 대한 파급력도 컸다. 4월 22일 고려대 교수 30명이 성명을 냈다. 고려대 교수들은 1986년 봄 개헌 서명 운동이 벌어질 때 가장 먼저 시국 선언을 발표했는데, 4·13 호헌 조치 반대 성명도 교수들 중에서 제일 먼저 냈다. 이어서 광주가톨릭대, 서강대, 성균관대, 가톨릭대 교수들이 성명을 발표했고 서울대에서는 교수 122명이 성명을 냈다. 5월에 들어오면 전국의 주요 대학에서 거의 다 성명이 나올 정도로 많은 대학 교수들이 4·13 호헌 조치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프레시안 : 4·13 호헌 조치를 규탄하는 목소리는 종교인과 교수뿐 아니라 각계에서 터져 나오지 않았나.
서중석 : 호헌 반대, 개헌 지지 성명을 내는 층이나 직업의 폭은 5월에 훨씬 넓어졌다. 그야말로 각계각층에서 시국 선언에 참여했다.
5월 2일 민족미술협의회 등 6개 문화 단체가, 6일에는 연극 연출가, 평론가, 극작가 등 연극인 18명이, 7일에는 해직 교사 58명이 성명을 냈다. 그 뒤를 이어 화가, 미술 평론가, 조소 공예가, 사진작가, 만화가 등이 4·13 호헌 조치를 무조건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감독, 조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 영화 음악 작곡가, 촬영 기사 등 영화인들도 성명을 발표했다.
5월 16일에는 조계종 승려 751명이 호헌 반대 성명을 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법주사, 해인사, 직지사 등 큰 사찰의 학인(學人) 승려들이 단식기도에 돌입했다. 운문사 비구니 200명, 동학사 비구니 114명도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발행인, 편집인, 영업인 등 출판인 359명도 시국 성명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서울신문, 한국일보, 대구매일, 코리아타임스 등의 기자들도 4·13 호헌 조치를 철회하고 언론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시국 선언은 6월에 들어와서도 계속됐다.
인기 있는 1단 기사, 호헌 반대 성명
프레시안 : 4·13 호헌 조치 후 학생 쪽 움직임은 어떠했나.
서중석 : 4월 15일, 16일경부터 대학가에서 시위가 늘어났는데 4·13 호헌 조치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호헌 철폐 투쟁에 교수들이 대거 참여한 것에 비하면 학생들의 움직임은 소극적이었다. 그 점이 눈에 띈다.
4·13 호헌 조치를 반대하고 개헌을 촉구하는 각계각층의 성명은 대개 사회면 1단 기사로 실렸다. 그렇지만 아주 많은 독자가 궁금해하면서 찾는, 인기 있는 1단 기사였다. 학생들은 자신의 학교에서 어떤 교수가 서명했고 몇 명이나 서명했는지 신경 쓰기도 했다.
6월 1일 전두환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시국 선언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시국 선언 교수가 50개 대학, 1527명으로 전체 교수의 7퍼센트이며 서명 교수 중 50퍼센트가 조교수 이하 소장 학자들이고 문화 예술계에서는 1031명이 시국 선언에 참여했으며 신부는 1200명 중 353명이 서명했다는 보고였다.
호헌 반대 시국 선언에는 1919년 3·1운동처럼 그야말로 각계각층이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인, 문화 예술인들이 시국 선언에 적극 참여했는데 가장 많이 참여한 쪽은 천주교, 개신교, 불교의 성직자, 승려, 신자였다.
(여론과 정반대로 4·13 호헌 조치를 환영하는 목소리를 낸 곳도 물론 있었다. 전경련, 대한상의, 경총, 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같은 재계 단체들 그리고 한국반공연맹, 대한노인회, 대한상이군경회, 재향군인회, 광복회 등이 그러한 곳들이다. 소설가 김동리가 이사장을 맡고 있던 한국문인협회는 4·13 호헌 조치 비판을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비국민적 행동"이라고 매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전두환을 예찬했던 시인 서정주는 4·13 호헌 조치를 '구국의 결단'으로 치켜세웠다. '편집자')
'박종철 고문 사망 진상이 조작됐다', 역사를 바꾼 사제단의 폭로
프레시안 : 4·13 호헌 조치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속에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 고문 사망의 진실을 폭로하지 않았나.
서중석 : 4·13 호헌 조치에 이어 전두환·신군부에 큰 타격을 가한 것이 5월 18일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였다.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광주민중항쟁 제7주기 미사가 열렸다.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과 미사가 끝나자 김승훈 신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듣는 사람들이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김 신부는 말을 에둘러 하지 않고 첫마디부터 핵심을 찔렀다. "박종철 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게 한 하수인은 따로 있다. (…) 박종철 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진짜 범인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학원분과 1반 소속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 경장 이정오로서 이들 진범들은 현재도 경찰관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사제단의 폭로 후 경사 방근곤은 경장 반금곤, 경장 이정오는 경장 이정호로 밝혀졌다. '편집자') 김 신부는 사건 은폐·조작 연출을 경찰 고위 간부가 맡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사건 당시 치안본부장이던 강민창 역시 은폐 및 범인 조작에 개입한 흔적이 확실하다고 김 신부는 밝혔다.
프레시안 : 사제단이 용기 있게 진실을 드러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확인된 사실로 인정될 수는 없는 상황 아니었나.
서중석 : 엄청난 진실이 폭로됐지만 그것을 일반인들한테 전달하는 역할은 언론이 맡아야 했다. 당시 TV가 그걸 할 리는 만무하고 신문이 했어야 하는데, 신문도 처음에는 아주 소극적이었다. 동아일보는 그다음 날인 5월 19일 자 석간에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명의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됐다'는 유인물을 배포하고 김승훈 신부가 그걸 낭독했다고 보도했다. 다른 신문들은 그 이후에 훨씬 작게, 1단 기사 정도로 짧게 보도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검찰과 경찰은 사제단의 주장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박하면서도, 사제단 발표에 대해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자체 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초대형 폭탄과 다름없던 사제단 성명이 그대로 묻힐 수는 없었다. 용기 있는 취재원이 귀띔해줘서 동아일보 김차웅 차장은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치안감이 참석한 경찰 간부 회의에서 범인 축소 조작이 모의됐다는 대형 특종을 잡았다. 이 대형 특종은 동아일보 5월 22일 자 1면에 '관련 상사 모임에서 범인 축소 조작 모의'라는 초대형 제목으로 뽑혀 머리기사로 실렸다. 세로 제목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경관 3명 더 있었다', 사이드 제목은 '물고문 범인 추가 구속'이었다. 사제단의 폭로가 진실임이 확인된 것이다.
5월 22일 자 동아일보는,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 직후인 1월 19일 자에서 보도를 잘했던 것처럼, 범인 축소 조작 건을 대대적으로 다뤘다. 2면 사설에서는 국정 조사권 발동을 주장했고 칼럼 란인 '여록'도 대부분을 이 사건에 할애했다. 5면에는 김승훈 신부 및 이 사건으로 구속돼 있던 조한경 경위의 형과 변호사 인터뷰 등을 실었고 10면, 11면도 거의 전부를 관련 기사로 메웠다. 이날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는 범인 조작에 대한 인책으로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는 한편 국회를 열어 국정 조사권을 발동할 것을 역설했다.
5월 23일 자 동아일보도 22일 자처럼 이 사건을 크게 다뤘다. 경찰의 은폐 모의 공작을 검찰 고위층이 석 달 전에 이미 알고도 수사 지휘권 발동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법무부 고위 관계자들도 검찰이 파악한 그러한 정보를 오래전부터 보고받았다는 것이 1면 톱기사 내용이었다. 법무부와 검찰의 최고 책임자들이 진상을 다 파악하고도 경찰의 은폐·조작 및 모의 공작 등을 묵인한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이때 법무부 장관은 김성기, 검찰총장은 서동권이었는데 이 사람들도 경찰의 은폐 모의 공작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걸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나.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이 사건 당시 "검찰 또한 사건의 진상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직무를 유기하여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고 "(정권의) 부당한 개입을 방조하고 은폐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헌법에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었음에도 권력층의 압력에 굴복해 진실 왜곡을 바로잡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지적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수사 검사들은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 은폐·축소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지만 이들은 그 후 승승장구했다. 주임 검사였던 신창언은 1994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됐다. 안상수 검사는 정치인으로 변신해 여당(한나라당) 대표를 지냈다. 박상옥 검사는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 대법관이 됐다.
이들의 상관이었던 서동권 검찰총장과 정구영 서울지검장도 노태우 정권 때 승승장구했다. 서동권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 후 이뤄진 개각(1987년 5월 26일) 때 검찰총장에서 물러나지만, 노태우 정권 때 핵심 요직인 안기부장으로 등용됐다. 서동권은 노태우의 경북고 1년 후배이기도 하다. 정구영은 노태우 집권기에 청와대 민정수석을 거쳐 검찰총장을 지냈다. '편집자')
이부영→전병용→김정남→사제단…묻힐 뻔한 진실을 드러낸 주역들
프레시안 : 사제단의 폭로는 역사를 바꿨다. 그런데 그에 앞서 사제단이 진실을 알게 된 과정도 극적이지 않았나.
서중석 : 언론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그러니까 김차웅 기자가 엄청난 특종을 하기 전에 김승훈 신부가 폭로했는데 사제단은 어떻게 해서 그런 놀라운 비밀을 알 수 있었느냐. 엄청난 폭탄 성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 데에는 김승훈, 함세웅 두 신부 외에도 이부영, 김정남 등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간부였던 이부영은 1986년 5·3 인천 사태로 수배됐다. 김정남도 이부영에게 편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수배 중이었다. 그러다가 이부영이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얼마 후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으로 구속된 경위 조한경과 경사 강진규가 이부영이 갇혀 있는 영등포교도소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태도가 이상한 것을 접한 이부영은 기자 시절의 취재 능력을 발휘해서 두 경관으로부터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 그 진실을 밖으로 내보내야 했는데, 그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결국 이부영은 그때 역시 수배 중이던 전 교도관 전병용을 통해, 이 사람은 민통련 간부 장기표를 숨겨줬다고 해서 수배됐는데, 김정남한테 자신이 작성한 편지를 전달했다. 이때가 3월 중순께였다.
전병용은 재미난 사람이다. 민청학련 사건(1974년) 때 김지하 쪽지를 나한테도 준 사람이다. 전병용은 그 사건 때 김지하, 지학순 주교의 쪽지를 필요한 사람들한테 전달했다. 그 후에도 그런 일을 몇 번 했다. 민주화 운동 세력이 감옥소에서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1987년 이때는 교도관이 아니었지만 교도관들하고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부영이 작성한 자료가 바깥에 나올 수 있도록 했고, 그러면서 그걸 김정남한테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렇게 엄청난 내용이 담긴 편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진실을 어떻게 세상에 알리느냐 하는 것이었다. 임시 국회에서 야당 의원의 본회의 대정부 질의를 통해 공개하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야당 의원들은 거꾸로 자신을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고심 끝에 김정남은 함세웅 신부와 김수환 추기경에게 편지를 썼다. 발표자가 구속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사제단으로서도 무척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박정희 정권과 사정없이 싸웠던 사제단 아닌가. 1987년 이때에도 역시 사제단이 이런 엄청난 진실을 발표하는 부담을 져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해서 5월 18일에 폭로하게 된 것이다.
궁지에 몰린 전두환, 대규모 문책 개각
프레시안 : 사제단의 폭로가 진실임이 입증된 이상 전두환 정권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게 됐다. 전두환 정권은 어떤 조치를 취했나.
서중석 : 5월 29일 박처원 치안감 등 치안본부 간부 3명이 구속됐다. 박처원은 대공 경찰의 대부로 알려진 사람인데, 사찰계에 근무한 1950년대 이래 대공 경찰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대공 경찰은 정권 안보를 위해 고문 등 온갖 인권 유린을 자행하며 수많은 공안 사건을 만들어낸 곳이었다. 전두환 정권에 들어와서 대공 경찰은 서울에서 학림 사건과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 사건, 부산에서 부림 사건, 대전에서 한울회 사건과 아람회 사건, 공주에서 금강회 사건, 전주에서 오송회 사건 등을 조작했다. 박처원 구속과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한 단죄는 그러한 대공 경찰에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줬다.
(사건 당시 치안본부장이던 강민창은 1988년 1월 구속됐다. 한편 한울회 사건과 아람회 사건의 판결을 담당했던 판사들 가운데 이회창과 이인제는 훗날 정치인으로 나섰다. '5공 정치범 명예 회복 협의회'는 1997년에 펴낸 <역사의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에 한울회 사건과 이회창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다시 유죄를 확정한 2차 대법원 판결에 참석한 판사들 가운데는 '대쪽'이라 불리는 이회창 씨가 들어 있었다. 그는 소수 의견을 내지 않았다." 이인제는 한울회 사건과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대전지법 1심 판결 당시 배석 판사였다. '편집자')
여론이 빗발쳤기 때문에 전두환은 문책 개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26일에 발표된 문책 개각은 규모가 대단히 컸다. 노신영 국무총리가 물러나고 이한기가 국무총리가 됐다. 그리고 안기부장 장세동이 물러나고 국세청장 안무혁이 신임 안기부장으로 임명됐다. 내무부 장관으로 고건이 임명됐고 법무부 장관, 부총리, 재무부 장관, 법제처장,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서울시경국장이 모두 바뀌었다. 경제 관료도 이동이 있었지만, 특히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자리가 싹 바뀐 것이다.
전두환, 장세동과 호흡이 맞았던 노신영에서 이한기로 국무총리가 바뀐 것은 언론에서도 의외라고 썼다. 이한기는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감사원장이 된 사람이고, 또 민정당 후원회장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한기가 왜 감사원장이 됐는지도 몰랐다. 민정당에서도 이한기가 민정당 후원회장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한기는 서울대 법대 교수를 지낸 학자 출신인데, 학계에서 평이 괜찮았다.
물귀신 작전 편 정호용, 결국 물러난 '전두환 분신' 장세동
프레시안 : 다른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두환은 왜 자신의 분신으로 통하던 장세동까지 경질한 것인가.
서중석 : 이 개각에서 가장 놀랄 일은 장세동이 물러났다는 점이었다. 한 신문에서 "이번 인사의 의외는 아무래도 그동안 국정의 실질적 운영에 핵심 역할을 해온 장세동 안기부장의 퇴진"이라고 쓴 것에서도 그 점은 잘 드러난다.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전반기 3년 7개월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후반기 2년 3개월은 안기부장으로 전두환을 받들어왔다. 그 이전에도 1967년부터 전두환을 다섯 번이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보좌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 전두환을 계속 따라다닌 그야말로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을 왕으로 떠받들었고, 전두환이 물러난 후에는 전두환을 위해 감옥에 대신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안기부장 시절, 그것도 1986년 5·3 인천 사태 이후 그해 가을에 전두환과 함께 극단적인 강경 정책을 펴 개헌 세력을 탄압한 장본인이었다.
그런 장세동이 물러난 것은 뜻밖이라고 언론에서도 썼는데, 장세동을 물러나게 한 데에는 정호용의 물귀신 작전이 영향을 끼쳤다.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이 일어난 1월에 인책 개각을 할 때 노태우, 이춘구가 밀어붙여 전두환이 마지못해서 정호용을 내무부 장관에 임명했다고 전에 얘기하지 않았나. 정호용은 5월 23일 안가에서 열린 회의에서 안기부장을 포함한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다. 그러자 장세동은 대폭 개각은 대통령에게 부담을 준다는 특유의 불충 논리를 펴면서 반대했다.
그다음 날 정호용과 이춘구는 김성기 법무부 장관을 만나서, 법무부 장관이 청와대에 들어가 검찰 수사를 보고할 때 '안기부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얘기해달라고, 그러니까 책임 소재를 확실히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정호용은 '박종철을 죽게 만든 치안본부 대공팀은 경찰 소속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안기부가 관장하는 곳이다. 예산, 업무 지시 모두 안기부에서 나온다. 따라서 안기부장은 그대로 두고 경찰에만 책임을 물으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논리를 폈다. '편집자') 사실 전두환은 개각 전날인 25일 아침까지도 장세동을 경질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권력 교체기에 노태우 측의 강한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 1987년에 들어와서 장세동이 큰 실수를 연이어 저지른 점도 작용했다. 장세동은 신민당 내분 조장 및 신당(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공작에 실패했다. 더군다나 엄청난 정치적 오산이었던 4·13 호헌 조치를 강력히 주장해 전두환으로 하여금 밀어붙이게 했는데, 그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6월 10일에 열리는 민정당 전당 대회, 즉 대통령 후보를 정하는 공식 행사인 이 대회가 2주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전두환은 노태우 쪽의 주장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기 분신을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됐는데, 그것은 6월항쟁 전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프레시안 : 정호용은 왜 장세동을 물고 늘어진 것인가. 장세동을 그냥 두면 노태우가 권력을 이어받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인가.
서중석 : 그렇게까지 명확하게 나온 건 내가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어떤 자료에는 장세동이 자신도 노태우를 후계자로 추천했다는 식으로 밝힌 것으로 돼 있지만, 그와 달리 노태우는 후계자로 부적당하다는 태도를 장세동이 취했다고 나와 있는 자료도 있다. 그런 면에서 장세동이 어느 쪽이었는지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장세동은 노태우 쪽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장세동은 전두환을 위해 모든 충성을 바칠 사람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노태우 쪽의 행보에 방해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건 분명했다.
장세동 경질 포함한 대폭 개각, 6월항쟁 전개에 상당한 영향 끼쳤다
프레시안 : 장세동 경질이 6월항쟁에 어떤 영향을 줬다고 보나. 장세동이 안기부장으로 그대로 있었다면 전두환 정권이 군 동원을 비롯해 훨씬 강경한 정책을 썼을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서중석 : 그건 그야말로 가정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얘기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장세동이 그대로 있었다면 전두환 정권이 더 강경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다는 점은 생각해볼 수 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권력을 쥔 사람들, 그러니까 안기부장은 말할 것도 없고 내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요직을 맡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맡고 불과 얼마 안 지나서 6·10 국민 대회를 맞이하게 됐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손발을 착착 맞춰서 일사불란하게 대응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전에는 전두환과 짝짜꿍한 장세동이 중심이 돼서 관계 부처 회의를 열고 거기서 장세동이 강경 조치를 밀어붙이는 식이었는데, 그 역할을 할 사람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이건 6·10 국민 대회에 상당한 영향이 있었다고 난 본다.
6월항쟁을 살필 때 진보 세력은 대개 자신들이 전개한 시위 투쟁에 관심이 있을 뿐 권력 내부 상황, 특히 청와대와 민정당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게 6월항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데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전에 6월항쟁에 대한 책을 냈을 때 내 책을 읽은 여러 사람이 '이 책을 보기 전에는 그런 부분을 잘 몰랐다', 그 얘기를 제일 많이 하더라. 실제로 별로 관심이 없다.
중요한 건 역사는 그렇게 전개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권력 내부에서 발생한 의견 차이 같은 것들이 다른 상황에 영향을 준 일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신 말기 김재규 건 아닌가. 1987년에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6월항쟁 그리고 6·29선언까지 이르는 그 과정을 보면 이춘구를 대표로 하는 온건파 세력하고 과거에 장세동으로 대표되던 강경파, 즉 전두환 그쪽하고는 그전부터 상당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 특히 개헌 문제에 대해 그랬다. 그러면서 1월에 개각할 때 이춘구가 노태우를 앞세워 정호용을 내무부 장관으로 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안무혁은 이춘구와 육사 14기 동기다. 이춘구하고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안무혁을 이 시기에 안기부장에 앉힌 데에는 이춘구 쪽 의향이 어떤 형태로든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서른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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