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공개된 정윤회 씨의 국정 개입 의혹이 담긴 청와대 문건은 집권세력 핵심부의 권력 분열상을 드러내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공식 직함도 없는 민간인 정 씨와 박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들이 비선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게 사실이라면 명백한 국정 농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靑 부인에도 커지는 의혹
<세계일보>는 '靑 비서실장 교체설 등 관련 VIP측근(정윤회) 동향'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문건은 지난 1월 6일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작성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공직기강비서관실은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들 관리가 주요 업무다.
감찰보고서 형식의 이 문건은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근무했던 경찰 출신 전직 행정관인 A경정에 의해 작성된 것도 확인됐다. 세계일보에 따르면 청와대 내부 정보가 외부로 새고 있다는 첩보에 의해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자체 감찰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의 해명은 애매하다. 공식 문서가 아니라면서도 유출된 문건이 조작되지 않았다는 점도 인정한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정식 문건으로 공식적으로 보고된 건 아니다"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를 저희들이 갖고 있다"고 했다. 민 대변인에 따르면 이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에게도 구두 보고됐다.
문건이 작성된 경위에 대해서도 '첩보에 의한 자체 감찰'이라는 세계일보의 주장과 달리, 청와대는 "찌라시라고 이야기하는 풍문들을 모은 글"이라며 "특정인을 조사해서 결과를 정리한 내용이 아니다"고 했다.
A경정과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이 잇따라 자리에서 물러난 점도 석연치 않다. A경정은 문건이 작성된 뒤인 지난 2월 돌연 경찰청으로 원대복귀했고,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은 두 달 뒤인 4월 중순 청와대에 사표를 제출했다. 문건과 돤련된 문책성 인사가 아니냐는 의심이 들게 되는 대목.
청와대는 A경정에 대해선 "통상적인 인사"에 따른 조치라고, 조 비서관에 대해선 "본인이 인생의 다른 길을 걷기 위해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안다"고 얼버무렸다. 그러나 이들이 물러난 직후 정윤회 씨에 대한 감찰은 사실상 중단된 것으로 알려져 외압에 의한 물갈이 의혹은 여전히 남는다. 문건의 보고 과정에서 내용이 정 씨 측에 흘러들어가 인사조치의 배경이 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김기춘 vs 정윤회+십상시?
유출된 문건에 적시된 '십상시'라는 표현도 눈길을 끈다. 십상시는 중국 후한말 영제 때 권력을 농단한 환관 10명을 이르는 말이다.
문건은 십상시의 핵심으로 '문고리 권력 3인방'으로 불리는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과 함께 청와대 정무수석실, 홍보수석실 등에 근무하는 행정관 3명과 전직 행정관 2명, 대선 캠프 실무진 2명을 꼽았다. 문건에 따르면 정윤회 씨는 이들과 매달 2회 가량 접촉해 청와대 내부 동향을 파악하고 비선 권력을 행사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정 씨는 김기춘 실장 축출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한 것으로 나타나 비선 영향력을 가늠케 했다. 정 씨는 지난해 송년 모임에서 김 실장의 사퇴 시점에 대해 "2014년 초·중순으로 잡고 있다"면서 참석자들에게 사퇴 분위기 조성을 지시했다.
이 같은 내용은 정권 초반부터 김기춘 실장과 '문고리 권력 3인방' 사이에 끊이지 않고 제기돼 온 갈등설과 무관치 않다. 김기춘 사퇴설이 주로 여권에서 나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에 따라 정 씨가 '십상시'의 배후에서 막후 권력을 행사한 게 맞다면, '야인'인 그가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을 무기로 청와대 공식라인을 무력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문고리 3인방' 등도 정보보안 의무를 어기고 내부 정보를 외부의 실력자에게 전달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겉으로는 최측근으로 박 대통령을 보좌하면서도 실제로는 정 씨와 내통해 권력을 농단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민경욱 대변인은 "(김 실장 축출설은) 근거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임 장소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고 이들의 해명을 전하며 "필요하면 그 장소에 가서 취재하면 될 것 같다"고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설명에 따르더라도 유사한 문건을 구두로 보고 받은 김기춘 실장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에 대해 민 대변인은 "(김 실장이 진상파악을 위한) 지시나 그런 건 하지 않았다"면서도 "본인이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 것"이라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향후 파장은?
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비서관은 이날 오후 법률 대리인을 통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세계일보를 상대로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했으며, 문건 작성자이 A경위에 대해선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키로 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이로써 정 씨의 비선개입 여부는 법정 다툼으로 비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과정에서 문건의 성격과 진위 여부, 정 씨의 비선 권력 행사 여부 등을 둘러싸고 추가 폭로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당사자들 사이의 다툼과는 별개로 정치권에도 후폭풍이 불가피해 보인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박범계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비선실세 국정농단 진상조사단'을 꾸려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아울러 국회 운영위원회를 통해 문건의 진위 여부를 규명키로 했다.
법적 다툼과 정치적 파장에 따라 정권 말기를 연상시키는 권력 내부의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내부로부터 혼선을 겪게 될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이 그동안 중용해 온 김 실장과 '3인방' 사이의 권력 갈등에 어떤 수습책을 낼 것인지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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